(16) ‘일대의 유업’도 못 지킬 형편이 되다

2012.10.28 21:42
김재희 작·김정란 그림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지만, 미군은 서울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되었는데도 좌우익의 끝없는 소모전으로 정국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하였다. 상섭은 ‘효풍(曉風)’이라는 소설을 자유신문에 연재하였다. 새벽바람이라는 제목처럼 차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남녀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다루었다.

영어교사였으나 골수 좌익이라는 모략으로 사직하게 된 김혜란은 골동품 가게의 지배인으로 일한다. 김혜란은 신문사 기자 박병직과 사랑하는 사이지만, 중간에 동료 기자 최화순이 끼어들어 사랑전선이 위태롭게 된다. 우익 청년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대대적인 좌익 빨갱이 색출 바람이 불고, 이로 인해 박병직은 신문사에서 쫓겨난다. 친일파 잔당과 정직한 지식인들도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이데올로기에 얽혀들면서 서로 파가 갈리고 통일은 멀어진다. 박병직은 최화순을 따라 월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남하하여 김혜란과 결혼하게 된다. 상섭은 이념이 다른 남녀의 사랑이 성공에 이르는 결말을 통하여 대립을 아우를 수 있는 길은 인간애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남북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 무렵 서울에는 미군을 통하여 들어온 물건들이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상섭도 몇 번 미제 초콜릿을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번 먹어보면 자꾸 먹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재용이 아버지, 잠깐 나와 보세요.”

[소설 횡보 염상섭](16) ‘일대의 유업’도 못 지킬 형편이 되다

아내가 애타게 불렀다. 상섭이 밖으로 나가보니 굼뜨게 생긴 몸집에 노르끄레하게 물을 들이고 한껏 부풀린 머리에 거무튀튀한 얼굴을 한 여인이 딱 달라붙는 상의에다 무릎이 드러나는 스커트를 입고 서 있었다. 혼혈 여인인가 싶어 상섭의 눈이 둥그레졌다. 큰딸이 다가와서 말하였다.

“아빠, 옆집 사는 애니 언니예요, 미국분이 편지를 보냈는데 해석 좀 해달라고 하네요.”

튀기처럼 보이는 여인의 손에는 편지와 함께 양과자갑이 들려 있었다. 아내가 들어오라 손짓을 하였다. 상섭의 심기가 자못 불편하였다. 편지를 얼핏 보니, ‘디어 미스 리’라고 시작하면서 애정을 표현하였다. 내일은 집으로 좀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내용이 이어졌다. 상섭의 기분이 홱 상했다. 간단하게 번역을 해주고 돌아서는데 애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과자 좀 드세요.”

딸이 다가가 과자를 받아들었다. 애니가 편지를 돌려받고 나가는 순간 상섭이 큰소리를 쳤다.

“거 과자 돌려줘요. 왜 사람을 함부로 들이나.”

서울에는 미국 물건이 판을 치고 대한민국의 처녀들 중에 미군의 애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런 것은 이해하겠지만, 딸과 아내가 양과자 하나에 부산을 떠는 게 영 못마땅하였다. 방으로 들어온 상섭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쳤다. 이거야말로 소설 소재였다. 방에 틀어박혀서 ‘양과자갑’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영어를 공부한 지식인 영수에게 ‘안라’라는 얼굴을 거뭇거뭇하게 화장한 여자가 찾아와 영어 번역을 부탁하고 영수는 거절한다. 딸이 대신 번역을 하고 양과자갑을 받지만, 이 사실을 안 영수는 과자갑을 마당에 내동댕이치면서 버럭 화를 낸다.

해방정국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미군에 기대어 이득을 보려는 무리들, 이리저리 세태를 따라다니며 눈치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 글쎄, 옆집 과수댁이 김 선생이란 사람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지 뭡니까?”

“아니, 정말이요?”

상섭이 두문불출하며 방안에서 집필에 골몰하는데 아낙들의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았다. 아내와 이야기하던 아낙들이 슬금슬금 상섭의 눈치를 보며 문으로 향하였다.

상섭이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옆집 하숙에 김 선생이라는 점잖은 회사원이 새로 들어왔는데 주인여자가 그 선생 반찬만 더 신경쓰고, 청소도 조석으로 해주고 한대서 하숙방 학생들에게서 말이 나왔나 봐요.”

“누구, 옆집 청상과부 말이요?”

“네.”

“거, 왜 쓸데없는 소리들은 옮기고 다니는지.”

상섭은 혀를 끌끌 찼지만, 하숙집 치는 과수댁과 하숙에 든 남자의 이야기를 요즘 세태에 잘 맞게 풀면 꽤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상섭은 소재를 머릿속으로 굴려보았다.

청상과부 기현 어머니는 남편이 남긴 한옥을 개조하여 생업으로 하숙집을 연다. 남편은 집은 절대 팔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기현 어머니는 처음에는 조신하게 처신하여 잡음이 없었는데, 김 선생이 하숙을 들게 되자 점차 마음이 동하고 급기야 술 취한 김 선생이 안방에서 자버리는 일이 생긴다. 그러던 김 선생이 사택이 나서 가족들과 지내게 되자 기현 어머니는 조신한 성격이 괄괄하게 변하게 되고, 결국에는 남편이 남긴 집마저 시숙과 싸우다 넘겨야 될 형편에 이른다. 이 이야기를 단편 ‘일대의 유업’으로 발표했다.

“경성에는 그래도 삼대를 가는 유업이라도 있지만, 해방 이후 서울은 극도의 혼란기이다. 모든 게 삼대를 못 가고 일대의 유업인 집마저 눈 뜨고 앉아서 뺏길 형편들이다.”

상섭이 집에 의미를 두고 소설을 집필한 것은 일본인들이 철수하고 주인 없는 적산가옥들이 미군에 기생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불하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미군 장교의 애인만 되어도 상섭이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집 한 채를 버젓이 얻게 되는 것을 보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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