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미완성인 대로 뒷대에 물려주고 가는 게 인생

2012.11.01 22:05 입력 2012.11.01 22:07 수정
김재희 작·김정란 그림

돌아누운 상섭의 어깨가 약간 들썩였다.

“수녀님,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십니까?”

“염 선생님. 그동안 어디에도 힘들다고 하소연 한 자락 못하셨잖아요. 그 마음 주님이 잘 아세요. 주님은 애통해하는 자를 찾으세요.”

엉엉, 그날 상섭은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고, 수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수녀님 졌습니다. 가톨릭에 입교하겠습니다.”

[소설 횡보 염상섭](20) 미완성인 대로 뒷대에 물려주고 가는 게 인생

상섭은 윤형중 신부와 김돌로로사 수녀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았다.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65세가 넘어서 얻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상섭은 찾아온 신부에게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구절을 물었다.

“신부님, 제가 이제까지 글 써온 일도 이 구절에 합당할까요? 지금까지 구차한 작품이나 쓰면서 이렇게 초라하게 병든 노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형제님의 글은 읽는 이에게 자유와 해방,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을 겁니다. 가난한 자, 포로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겁니다.”

신부는 미소와 함께 상섭의 손을 잡아주었다. 병상에 드러눕는 날들이 많아졌다. 1962년 8월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게 되었으나 시상식장에 나가지 못하였다.

아, 인생의 겨울이 왔구나. 젊은 후배들이 지면을 얻지 못할 때도 나는 항상 보란듯이 연재를 해왔으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행복한 삶이었구나.

몸은 아파왔지만 원고 청탁은 마다하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하여 펜을 잡았다.

1962년 11월, 마음을 크게 먹고, ‘횡보 문단회상기’라는 글을 ‘사상계’에 연재하고자 결심하였다. 쓰다 지치면 입으로 구술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받아 적었다.

‘작가가 되려거든 기자생활을 집어치우든지, 기자가 되려거든 작가는 아예 단념하여 버려야 하겠거늘, 붓 한자루로 되는 일이라 해서 그런지, 쌍수집병(雙手執餠)으로 두 갈래 물결에 쓸려 내려왔던 것이 나의 과거의 문필생활이었었다….’

1963년, 3월11일 맏딸 희경의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밤에 병원에 입원하였다. 차도가 없어 자택으로 옮겼다. 14일 오전 일찍부터 상섭은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애썼다.

“술…….”

“술이라고요? 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내는 상섭의 입에 숟가락으로 술을 떠넘겨 주려고 얼른 소주병을 들고 왔다. 상섭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출……근, 재용이 출, 출근…….”

윤형중 신부, 돌로로사 수녀를 비롯하여, 온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려 모여든 가운데, 상섭은 장남이 출근은 안하느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여보, 평, 평생 술상 차……리느라고, 고생 많았소. 너, 너희들을 위해 평, 평생 한 일이 없……구나.”

“아버지! 흐흐흑.”

상섭의 눈에 광화문 기와 뒤로 석양이 지는 광경이 보였다. 어릴 적 늘 보던 광화문, 그 앞에 어머니, 아버지, 형, 나도향, 김동인, 나혜석이 나와서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상섭도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백 년을 산대도 가던 길을 못 걷고, 하던 일을 손에 붙든 채 쓰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자기완성을 하고 떠나지는 못하는 것인데-미완성인 대로 뒷대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야…….”

일찍이 단편소설 ‘임종’에 넣었던 문장이 이렇게 상섭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영면에 들었다. 향년 66세였다.

임종 당일 박두진이 동아일보에 시를 써서 보냈다.

“아! 횡보, 횡보 선생 당신이 가시다니 너무도 고생만 겪으시다 차가운 방에서 가시다니 서러움보다 눈물보다 앞서 오늘 왜 우리는 분하고 억울하고 또 분하기만 한지요.”

1963년 3월18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앞뜰에서 문단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위원장 박종화가 식사를 하였고, 홍효민의 약력보고에 이어 전영택, 유광열 등이 조사를 읽었다. 성당 마당에는 김상돈, 이상철, 주요한, 방인근 등 정치 사회 문화 전방면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방인근이 주요한에게 말을 건넸다.

“보름 전에도 누운 채 술을 받았는데, 참으로 안타까워.”

“상섭 형이야말로 누구보다 아등바등 살려던 분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나 말이야. 어제 탐정물이라도 제대로 써볼까 하고 원고 50장이나 써보았는데, 어때?”

“에이, 상섭 형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어요. 원고 100장 쓰고 나와서 새벽까지 술 드시던 양반인데요. 후세 사람들이 염상섭 형을 기억해 줄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한 법이야. 염상섭은 갔어도, 그가 남긴 작품은 아마 영원히 살아 남아 반짝거릴 거야. 후후, 지금도 하늘에서 한 잔 걸치고 소설 쓰고 있을지 누가 알아.”

장편 17편, 단편 160여 편에 평론 100편, 수필과 논설, 기사 등 500여 편이 넘는 글을 남긴 염상섭은 평생 글과 함께 살았다. 수없이 셋집에서 셋집으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앉은뱅이책상, 펜, 펜대, 잉크병이 놓여있는 곳이라면 들어앉아서 글 쓰는 습관을 들였고, 결국 남긴 유품도 그것뿐이었다.

작가로 살면서 시대를 증언한 염상섭은 서울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살아남아 일본 도쿄 등지와 경성, 만주 그리고 서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횡보한 초인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끝>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