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소설가 백민석

2014.08.15 21:01 입력 2014.08.15 21:06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만나보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다. 실제로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문단에서 사라졌다. 왜 절필을 했는지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내가 아는 그는 없다. 내가 아는 전부는 소설과 책날개에 박혀있는 몇 장의 사진과 문단에 풍문으로 떠돌던 몇 개의 에피소드가 전부다. 오래전부터 기회가 되면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언젠가 어렵게 전화번호를 얻어서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이미 그가 문단에서 사라진 지 오 년이 넘은 뒤였다. 소설가 백민석 선생이냐고 물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상대방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 이후 나는 그가 뭔가 단단히 삐뚤어진 사람이라고 여겼다. 만나서 물어보니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전화번호였던 모양이다. 그가 문학이나 소설에 상처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오해가 그런 사건을 만들었다.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가 다시 소설을 썼으면 하고 바랐다. 응원하고 싶었고,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소설을 쓰지 않은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했고 그가 남긴 소설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가 돌아와 예전처럼 독특한 자신만의 소설을 보여주길 바랐다.

문학을 하게 된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짐작은 하지만 알지는 못한다. 내 경우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하루의 일상같이 없어서는 안 되는, 작고 중요하고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들 때문이었다.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그 이유 중 하나, 백민석도 있다. 나는 나름 그의 소설 팬이었다. 과거형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시라. 문단으로 복귀한 후 최근 나온 그의 소설을 아직 읽지 못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19) 소설가 백민석

어쨌든 나는 94학번이고 그는 95년에 데뷔를 했다. 나이는 세 살 차이가 난다. 그는 아주 일찍 데뷔를 했고, 나는 대학 다니는 내내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는 내게 가장 현실 가능하면서 소설의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지시등 같은 느낌이었다. 구십년대 말 IMF 상황이 가져온 가치관과 정체성의 변화를 예측한 기시감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새로웠다.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것이 이전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기괴함부터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읽었다. 혹은 분해되고 해체된 이미지가 어떤 이야기로 모아졌다.

소설을 읽다 언뜻 작가인 듯 보이는 사람도 읽었다. 소설을 쓰면서 그런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독자로서 읽는 백민석도 있었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소설에 드러날 때마다 ‘이 사람은 좀 냉정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소설 안에서 슬픈 것이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보였다. 소설에서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 정도로만 드러내는 일은 어떤 경지에 서지 않으면,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가 돌아왔다. 내가 흠모하던 소설가가 돌아왔다. 그의 소설이 다시 시작됐다. 일부러 만나지 않아도 어디선가는 볼 수 있겠지, 고대함이 생겼다. 새로 나온 그의 소설은 읽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아니 일부러 그랬다. 나중에 아주 천천히 읽고 싶은 책도 있다. 만나게 되면 내가 데뷔하기 전에 읽었던 장편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과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같은 그가 쓴 소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옛날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늠해보니 책장에 그가 출간한 책 거의 모두가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우연히 그를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결국 내가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만나보니 그의 말은 조금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우며 뭔가를 베는 데 쓰였다. 당황스러웠다. 그의 농담은 때로 진심인 듯 들려서 난감했다. 또 가장 사실인 것만 얘기해서 두렵기도 했다. 우연히 소설 쓰는 정영문 선배를 만나 같이 동석했다. 사진 찍는 다흠이까지 넷이서 어색하게 냉면을 먹었다. 냉면을 먹으면서 냉면 얘기만 했다. 냉면집에서 나와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어색한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백민석 선배의 화법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악의는 전혀 없으나 가끔 난감한 무엇이 있었다. 가령, 이런 대화들이다. “선배는 나 없는 십 년 동안 뭐했어요?” 백민석이 정영문에게 묻고 “음, 음, 그냥, 뭐 소설을 썼지.” 정영문이 백민석에게 답한다. “십 년 동안 소설만 썼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소설만 쓴 게 그간 쓴 그 소설들이에요?” 정영문 선배는 멋쩍게 웃었다. 나는 진의를 파악하려 눈을 굴려보지만 잘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이다. 비꼬거나 깐족대기에 그의 성격은 너무 직선적이다. 그러니 농담으로 들어야 했고, 맞았다.

[백(白)형제의 문인보](19) 소설가 백민석

다급하게 술이 필요했다. 강력하고 효과가 빠른 약 같은 술이 필요했다. 다흠은 회사로 돌아갔고 셋이서 연희동에서 천천히 걸어서 연남동으로 갔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그렇게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 등에 땀이 흘렀다. 소설가 셋이 가끔 나란히 걷거나 간혹 한 줄로 걸었다.

중국식당에 갔다. 그는 양꼬치와 중국술을 처음 먹어본다고 했는데, 굉장히 좋아했다. 과거 이야기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술을 넘겼다. 십년간 그저 회사 다니면서 평범하게 살았다고 했다. 자기가 읽은 소설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인문, 철학에 대해선 열정이 넘쳤다. 나는 잘 알지 못하니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는 소설가 백민석보다는 개인적인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그는 모호하면서 비밀스러웠다. 술자리 사람들이 늘어났다. 소설가 김태용과 평론가 강동호, 시인 김선재가 왔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내 딴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새벽으로 가는 시간, 그가 불쑥 화를 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니 그게 맞았다. 화를 냈는가 싶으면 신기하게 금방 가라앉았고, 다시 농담을 했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 일 없고 별일 없이 우린 헤어졌다. 각자 취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에 대한 인상기를 쓰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그가 또 슬그머니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 소설가 백민석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러셔> <죽은 올빼미 농장>이 있다.

2003년 돌연 절필했다가 10년 만인 2013년 겨울, 소설집 <혀끝의 남자>를 내놓으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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