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시인 함민복

2014.08.22 21:16 입력 2014.08.22 21:20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백 마디 말보다, 그의 시를 보라

함민복 시인만큼 울림이 큰 시인을 찾기도 보기도 어렵다. 그만큼 투명한 시인이 드문 시절이다. 시라는 것은 곧 ‘시인의 몸’이라고 나는 떠들고 다니는데, 소설을 쓰는 자들과는 좀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마치 시인의 살비듬 같다. 시는 시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얇고 순정하고 투명한 비늘 같다. 툭툭 털면 떨어져 나오는 것처럼 신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몸이 온전하지 못하면 그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시도 온전치 못하고 불투명하다. 함민복 시인은 그런 의미에서 시로밖에 그를 알지 못하지만 시로 그의 몸이 오롯이 전해진다. 그의 시에는 그의 삶이 투영된 진정과 진심이 있다. 그것을 읽는 일이란 얼마나 귀한 일이던가. 모든 것이 겉과 속이 뒤바뀐 세상에 우리는 놓여 있지 않던가. 투명한 그의 시는 그래서 쉽고 깊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0) 시인 함민복

그를 생각하면 한 기억이 떠오른다. 한밤중 눈은 하릴없이 TV를 좇고 있었는데 책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시인이 나왔다. 그의 신작 시집을 다루고 있었다. 그가 아직 노총각일 때 강화도 갯벌에서 일을 하며 아주 조금만 벌어서 시만 쓰고 산다고 할 때였다. 배경은 그의 집인 듯 단출한 세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나운서가 물었다. “혹시 이번 시집을 내면서 시인이 꿈꾸거나 바랐던 것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시인이 눈을 끔벅끔벅 골똘했다. “시집 팔아서 천만원만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만 그의 눈이 촉촉하고 붉었다. “어머니가 근처에 사시는데 천장에서 물이 새요. 기와를 갈아주고 싶은데… 천만원이 필요해요.” 그가 얌전하게 말했다. 쑥스러워했지만 또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덤덤했다. 소박한 욕심이 참으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건너 듣고 그의 상심이 얼마나 클까 싶었다. ‘눈물은 왜 짠가’ 같은 어머니에 관한 글들이 무거운 물빛으로 남았었기에 그 슬픔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시간이 지나고 그가 늦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마음속으로 축복을 빌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를 직접 보거나 지나친 적이 없었으니, 그의 시와 글만을 읽고 생겨난 정말 순수하고 깊은 동지적 유대감(?)이었다.

그를 만나러 강화에 간 적이 있다. 잘 아는 시인과 다흠이 사진을 찍으러 간다기에 운전수를 자처하며 따라 나섰다.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인삼센터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인삼을 팔았다. 그는 오랜만에 술 마실 생각에 즐거워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곤조곤 얘기를 재미나게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구라발’로 따지면 나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소설가 나부랭이였지만 그는 화제가 바뀔 때마다 굉장히 박식하고 유려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장어를 굽고 복분자술을 먹었는데 그는 장어보다는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유독 탐을 냈다. 듣자하니 결혼하기 전까지 근 30여년을 주독에 빠져 살아 엄격하게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갓 결혼한 아내가 끔찍이 그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 먹어, 안 먹어. 내가 앤가. 밥만 먹고 금방 들어갈 거야.” 말은 그랬지만 연신 술을 들이켰다. “아, 나 술 마시면 안되는데.” 그는 즐거워했지만 아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응, 지금 가는 중이야. 술 안 마셨어. 다 왔어, 요 앞이야.” 말은 그랬지만 그는 여전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내의 걱정은 당연했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난감할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0) 시인 함민복

그는 좋은 시인이지만 훌륭한 장사꾼은 못된다고 했다. 그저 아내의 일이나 돕는 거라고 했지만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나오는 것을 한번도 거르지 않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일행 모두 서둘러 아내의 걱정을 덜기 위해 그의 일터로 돌아왔다. 주차장에서 각설이 차림의 엿장수가 뽕짝을 틀어놓고 엿을 팔고 있었다. 평일이어서 손님이 드물었다. 엿장수가 틀어놓은 뽕짝 멜로디가 구슬프게 퍼졌다. 함민복 시인이 엿장수 옆에서 가위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 엿장수 엿가락이 신명났다. “잘 놀았다.” 시인이 엿장수의 깡통에 천원을 넣어주었다. “쟤는 나보다 두 살 어린데 나보다 더 불쌍해요, 착하고요.” 우리는 그의 가게에서 삼을 샀다. 건강에 좋은 것을 파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지금도 인삼을 판다. 자리를 옮겨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있는 ‘강화고려인삼영농조합 16호’에서 인삼을 판다. 시를 팔아서는 천만원도 벌기 힘들 테니 그가 인삼을 많이 팔아서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엿가락에 덩실덩실 매일 춤췄으면 좋겠다.

푸른 나무가 햇빛과 물을 먹고 초록의 빛깔을 품는 게 이치라면 시인의 몸은 세상의 빛과 사회라는 태양을 받고 자기만의 오직 하나의 색깔로 존재하는 나무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빛이며 사물이 발하는 빛을 받고 사는 나무이다. 세상에 빛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시인이라는 나무를 비추고 시인의 몸에서 자라다가 시로 떨어져 나온다. 소설가는 갑옷 같은 비늘을 몸에 두르고 산다. 소설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먹고살기 때문이다. 다시 사람으로 뱉어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걸리고 비늘도 두껍다. 소설은 오래도록 소설가의 몸에서 썩고 발효되고 다른 무엇이 되어 나온다. 소설의 원래 처음이 무엇이었는지 좀체 알기 어려운 것이 시와 다르다. 소설가의 비늘은 사람이 쓰고 있는 가죽 그대로여서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지만 시인의 비늘은 얇고 투명하다.

하나 시절이 뒤숭숭하니 시인도 욕망을 먹고사는 이 드물지 않다. 하나 시에 그것을 담기 어려우니 소설이란 장르가 있는 것, 시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억지로 싸내는 똥같이 냄새나는 것들 드물지 않다. 출세에 돈벌이에 흔하고 흔한 세상사 욕망을 먹고사는 이 심심치 않다. 몸을 둘러싼 비늘이 점점 탁해지고 갑옷처럼 단단하건만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시인들 많다. 그의 더듬이가 이웃이나 사회의 낮은 곳을 향하는 것은 아직 그의 갑옷이 투명하기 때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함민복이란 시, 세월호 추모시를 옮겨본다.

▲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 시인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 근무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 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고, 대학 2학년 때인 1988년에 ‘성선설’ 등을 계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0년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 1993년 <자본주의의 약속>을 펴냈다. 이 시집들에서 의사소통이 막힌 현실, 물질과 욕망에 떠밀리는 개인의 소외 문제를 다룬 데 이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9년)에서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들을 따뜻하고 진솔한 언어로 끌어안는다. 이 경향은 <말랑말랑한 힘>(2005년)과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년)에 이어진다. 199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년 애지문학상·김수영문학상·박용래문학상, 2011년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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