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시인 김성규

2014.10.10 21:03 입력 2014.10.10 21:37 수정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그는 아주 잘 날아왔다

첫 번째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를 받고서 들었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를 읽기도 전에 표지에 박힌 ‘너는 잘못 날아왔다’라는 문구에서 시간은 멈추었다. 시선은 아주 오래 그곳에 서 있었다. 시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무서운 문지기를 만난 것처럼 시를 들여다보는 게 겁이 났다. 잊고 있었던, 잊으려 애썼던 어떤 절망 같은 게 다시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가 두려웠다. 그와 함께했던 오랜 시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밤을 새우고 얘기 나누던 시간은 이미 망각의 저쪽 편이었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이미 죽은 지 오래전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잘못 날아왔다.

[백(白)형제의 문인보](26) 시인 김성규

그는 두 학번 후배다. 수백 명이 될지 모르는 후배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는 내 유일한 후배다. 어린 날 내 유일한 시 선생이다.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스무 살 때부터 이미 시인이었다.

그와 나는 친해졌다. 우리는 외톨이였기 때문이었다. 문예창작학과에 다니고 있었지만 진짜로 글을 쓰는 친구들은 드물었다. 주워들은 작가이름이나 작품명으로 지식을 채워가고 있었다. 책 읽는 사람도 드물었고 쓰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건 좀 비아냥거려도 될 일이다. 많이 외로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서도 위안이 오지 않았다. 대부분이 문학하는 시늉을 내기 좋은 시절을 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몰래 도서관에 다니고 있었다. 문창과 ‘학우’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도서관 다니는 일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보단 어두컴컴한 주막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이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그를 매일 밤 도서관에서 만났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자학의 밤을 지켜보며 보낸 한철이었다. 문창과 학생을 도서관에서 만난 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밤을 그곳에서 보내곤 했는데 그도 비슷했다. 우리의 공통점은 과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도서관에서 시를 쓰고 있거나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업과 상관없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많은 것을 잊었지만 그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이 있다. 바슐라르와 오규원 시인이 그들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주로 그들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바슐라르도 오규원 시인도 모르는 문맹이었다. 욕심만 가득했지 무엇을 읽고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하던 때였다. 우리는 날이 훤해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150번 종점 근처 반지하 빌라에서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고, 나는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는 남가좌동 언덕배기에서 동생 다흠과 함께 하숙을 하고 있었다. 방에 책상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노트북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매일 밤 두툼한 대학 노트에 굵은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 소설을 썼고-숨기고 싶은 일이지만 주로 시를 썼다- 그는 연필로 시를 썼다. 가끔은 새벽녘부터 늦은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는 좀 대단하기도 했다. 다음 날 누구랄 것 없이 수업에 나오기 힘들어서 내동 자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슬리퍼를 끌고 학교로 향했다.

우리에게 지금은 없지만 친구가 하나 더 있었다. ‘경호’라고 하는 애였는데 신학대학을 나온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김성규와 동기인 후배였다. 경호는 내게 선배라고 불렀고 나는 ‘경호’를 경호라고 불렀다. 셋은 둘러 앉아 주로 시 얘기를 하거나 절망 같은 것을 찬란한 햇빛 속에 묻어놓고는 했다.

볕이 좋은 날에는 운동장 스탠드에 모여앉아서 햇빛을 쬈다. 수줍게 밤새 쓴 시들을 서로 돌려 읽었다. 그의 시는 화려한 햇빛보다도 더 빛났다. 정말, 아름다웠다.

방학이 되면 성규와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갔고 서울이 집인 경호는 서울에 남았는데 그가 개강을 해도 보이지 않았다. 휴학을 했는가보다 했다. 연락이 되지도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형, 경호 형이 죽었대요.’

김성규가 늦은 밤 잠긴 목소리로 그의 죽음을 알려왔다. 슬펐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며 김성규와 죽은 경호가 생각나는 지금이 더 슬프다. 제일 바랐던 경호가 살아있다면 유일하게 결혼하고 아이들도 있고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없는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이 더 슬프다.

경호가 죽고 몇 년이 지나고 김성규가 ‘경호’를 추모하는 시간을 열었다. 그의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낭독의 밤을 열었던 날에도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도 바빠서 그랬겠지, 왜 못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후배 김성규가 내게는 선생같이 느껴지는 여러 이유가 있긴 있는 것이다.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 가는가

(‘절망’ 전문)

[백(白)형제의 문인보](26) 시인 김성규

오래전 그의 고향 옥천에 자주 놀러갔었다. 낚시를 했고 마을 잔치에 슬쩍 끼어 술과 안주를 훔쳐 먹기도 했다. 금강 변에 텐트를 치고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던 시간, 시집을 베고 누워 낮잠을 자던 한낮, 눈 감으면 지금도 볼 옆에 살랑거리는 강바람, 소리 없이 흐르던 막막하기만 했던 밤의 강은 여전하다. 그의 어머니가 차려주던 소박한 밥상이 생각나서, 등 굽은 그의 아버지가 소여물을 쑤던 풍경이 선명해서 괜히 짠하다. 고향집 그의 방을 보곤 나는 조금 화가 났었다. 한쪽 큰 벽을 가득 메운 시집 때문이었다. 그 벽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시집이 있었다. 옥천에는 변변한 서점도 없는데 말이다. 전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읽은 것이라 했다. 나는 그의 부모님이 좀 안쓰러웠다. 차곡차곡 쌓인 시집이 꼭 절망의 높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기차 맨 뒤칸 통로에 앉아 빠르게 멀어지던 풍경과 나선형의 선로, 모든 게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으로만 남던 시간이었다.

김성규는 키가 굉장히 작은 친구다. 책상에 앉은키는 가장 큰 친구다. 그 작은 키로 무겁고 큰 이 세상을 이고 살아가는 시인, 후배 성규가 자랑스럽다.

▲ 시인 김성규

197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독산동 반지하동굴유적지’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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