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뜨거운 가마 앞 겸손한 기다림…그렇게 그의 그릇에 삶이 담긴다

2016.05.13 19:48 입력 2016.05.13 20:03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사기장 신한균의 양산 ‘신정희요’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아래 사하촌에는 유명한 ‘신정희요’가 있다. 맥이 끊겼던 조선 사발을 처음 재현한 고 신정희 선생(1930~2007)이 1975년 터를 잡고 가마를 지어 작품을 빚었다. 지금 주인은 그의 장남인 신한균 사기장(56)이다.

경영학도로 서울에서 대학강사를 하던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1985년 이곳으로 다시 내려왔다. 어렸을 때 그릇에 미쳐 전국을 떠도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보던 아버지, 지금은 자신과 한몸이라고 느낀다. 훌륭한 그릇을 빚겠다는 목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레에서 형태가 완성된 그릇들이 장작 가마 앞에 놓여 있다.

물레에서 형태가 완성된 그릇들이 장작 가마 앞에 놓여 있다.

“먼저 저희 아버지 묘소부터 가 보이소.” 살림집 바로 뒤 양지바른 땅이다. 9년 전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5일장에다 통도사 다비장까지 합쳐 7일장을 지냈다. 지금은 책과 찻사발이 조각된 돌 안에 모셨다. 인생은 한 권의 자서전을 쓰는 일이라는 뜻으로 책을 새겼다. 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사발에는 빗물이 찻물처럼 찰랑찰랑 고여 있다.

그가 다음으로 데려간 곳은 가마다. 화기가 잘 통하도록 계단식으로 만든 가마의 옆면에 그릇과 불을 들이는 입구가 있다. 맨 아래 정면으로 난 봉통에다 14시간 이상 장작을 때서 예열한 뒤 8칸에 차례로 장작불을 피워 1200~1350도까지 올린다. 1년에 서너 번, 사나흘간 가마를 덥혀 그릇을 굽는다. 가마 뒤에서는 한 번 때는 분량의 국산 소나무들을 켜켜이 쌓아 말린다. 소나무는 타고 나면 숯의 부피가 확연히 작아진다. 그만큼 많은 공기구멍으로 불과 바람을 통과시킨다.

신정희요 앞의 하얀 연꽃밭은 통도사에서 만들어 주었다.

신정희요 앞의 하얀 연꽃밭은 통도사에서 만들어 주었다.

“도자기는 지옥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누구 말인지 압니까? 폴 고갱입니다. 화가이기도 했지만 도예가였거든예. 우리는 천지인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천은 가마의 여신, 지는 흙, 그리고 인은 사기장입니다.” 온도와 습도, 바람이라는 변수에다 흙과 유약 성분, 사기장의 불 지피는 실력까지 합쳐 도자기의 때깔을 만들어내는 장작가마는 변덕스럽다고 해서 여신으로 여긴다.

태토라고 불리는 흙은 도자기의 몸이다. 그만큼 중요한데 신씨는 “좋은 흙이란 따로 없다”고 했다. 지방마다 흙이 다르기에 각각 흙의 본질을 찾아내 그에 맞게 유약과 불을 조절하는 게 그릇 만드는 이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보통 비 올 때 생긴 발자국 모양이 날씨가 갠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으면 좋은 흙으로 친다. 그만큼 찰기가 있다는 증거다. 신씨는 양산에서 나는 흙과 함께 전국에서 찾아낸 좋은 흙을 뒷산에 묻어두었다. 이 밖에 도자기의 피부인 유약이 있다. 돌가루와 수목재 이외에 나뭇잎이 썩어서 생긴 시커먼 흙인 약토도 사용된다.

“기능을 익히면 모양은 누구나 비슷하게 빚을 수 있어요. 문제는 때깔인데요. 어떤 유약을 쓰느냐, 어떤 불과 온도에서 굽느냐에 따라 때깔이 달라집니다.” 사기장은 장작을 붓 삼아 불을 조절하면서 도자기의 색상과 문양을 만들어낸다. 전기나 가스 가마를 쓰면 매끈하게 구워지는 데 비해 전통 장작가마는 실패 확률이 높지만 자연의 오묘한 조화로 뜻밖의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가 전통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다.

책과 사발이 조각된 아버지 신정희의 묘소.

책과 사발이 조각된 아버지 신정희의 묘소.

부자가 40년간 가꾼 ‘신정희요’ 입구에는 연꽃밭이 있다. 땅 주인인 통도사에서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 연잎과 개구리밥이 그득한 연못 너머로 왼쪽에 굴뚝이 높은 가마와 전시장이 보이고, 전시장 뒤가 작업장과 창고, 오른쪽이 한옥으로 지은 살림집이다. 신씨와 두 명의 제자가 일하는 작업장에서는 물레를 돌려 그릇을 빚는다. 작업장 한쪽에는 인문서 <우리 사발 이야기>, 장편소설 <신의 그릇> 등 도자사 연구와 대중화를 위한 글쓰기를 계속해온 그의 서재가 있다.

“아버지가 전통 조선사발을 재현했는데 우리는 일본 사람을 따라 그걸 막사발이라고 불러왔어요. 우리 사발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 찻사발로 쓰이고 국보가 됐는지, 왜 그것이 ‘이도다완(井戶茶碗)’으로 불리게 됐는지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이 끊어진 조선사발을 400년 만에 재현하기까지 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경남 사천이 고향인 신정희는 어릴 때 가마터에서 주운 사금파리 조각에 관심을 가지면서 골동세계에 입문했다. 6·25 전쟁 이후 골동행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가마터의 사금파리 조각을 수집했다. 어느 날 부산 골동상에서 만난 일본인이 조선사발에 관한 책을 내밀며 ‘왜 지금 조선에서는 이런 사발을 만드는 사람이 없느냐’고 한 데 충격을 받고 직접 사발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당시 남아 있던 가마는 질 낮은 사기그릇과 장독, 요강을 굽는 정도였다. 안목은 있으나 기술자는 아니었던 그는 경북 청송에서 옛 가마를 고쳐 도자기 빚는 일을 시작했고 충북 단양을 거쳐 1969년 경북 문경으로 간 뒤 1970년대 초반 전통사발 복원에 성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열광시키며 임진왜란 이후 대거 일본으로 넘어가 ‘고려다완’으로 불리면서 국보, 중요 문화재(보물)로 지정된 전통사발에 가까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조차 이를 막사발이라고 불렀다. 그 근거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에 근거한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그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들의 심미안은 위대하다.” 고려다완 가운데서도 국보에 오른 ‘대(大)이도다완’에 대해 야나기가 쓴 글이다. 상인 출신으로 다도의 원조가 된 센노리큐가 조선 밥사발을 가져다 찻사발로 쓴 이후 다인과 상류계층이 조선사발을 선호했는데, 이는 일본인 특유의 미의식 덕분이라는 것이다.

신씨는 1994년 찻사발의 황제로 불리는 대이도다완을 교토 대덕사의 암자인 고봉암에서 처음 본 뒤 자료 수집과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발이 보통 쓰는 밥사발이 아니라 진주부에서 만든 민가의 제기용 멧사발(메는 밥의 제사 용어)이며, 고급스럽게 만든 제기는 신줏단지처럼 여겨지다 폐기되기 때문에 그만큼 구하기 어려웠다는 이론적 연결고리도 찾아냈다.

나아가 국보 사발과 같은 종류로 가장 귀하게 여겨온 ‘이도다완’에서 ‘이도’란 말의 유래도 밝혔다. 일본 대화국 영주였던 이도 와카사노카미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사발을 구해 상급자인 쓰쓰이 준케에게, 그가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납했고, 그 아들이 임진왜란 때 같은 종류의 사발 10개를 구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5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5개 상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성이 사발의 분류명이 된 것이다.

“이도다완도, 고려다완도 아니고 조선다완 혹은 황도(黃陶)다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이 사발은 백자이지만 제기인 유기와 비슷한 노란색을 띠고 있지요.” 조선 그릇이 백자로 통일되기 이전인 16~17세기 각 지방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 만들었던 전통사발은 임진왜란 이후 맥이 끊겼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왜(倭)사기가 오지 마을에서 싸게 만든 상(常)사기(막사발)와 공존하다 근대화 이후 사라졌다.

신씨는 이런 사발의 왜곡된 역사와 함께 조선 사기장을 납치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호 칙령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의 활약을 연구해 인문서 <우리 사발 이야기>, 장편소설 <신의 그릇>을 펴냈다. 일본에서도 <고려다완> <이도다완의 수수께끼> 등의 책이 나왔으며 <신의 그릇>이 번역되기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인의 도자미학으로 우리 도자기를 본다”면서 ‘도자기로 책을 빚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전시장에는 사발을 비롯해 다기, 접시와 보시기, 대발, 항아리 등 각종 그릇이 쌓여 있다. 사발에 대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 마음을 뺏긴 것은 달항아리다.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선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 여인의 풍성한 치마를 닮은 유려한 곡선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하게 만들지요.” 달항아리에서도 중요한 것은 느낌을 전달하는 은근하면서 매력적인 때깔이다. 부피가 큰 달항아리는 한번 가마에 구울 때 36개를 넣어서 5개만 건져도 대성공이다.

신씨의 작품은 따로 판로가 없다. 큰 작품은 대개 전시회에서 팔리고 식기나 찻잔 등 생활용기는 고객들이 양산까지 직접 찾아와서 구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1989년 일본 도큐백화점 미술화랑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후 거의 매년 초대전을 열었는데 80% 이상이 일본 전시였다. 미쓰코시백화점, 마쓰야백화점, NHK TV, 니혼TV, 신세계 갤러리, 롯데 갤러리 등이 전시를 주최했다. 그가 1997년 함경도 회령도자기를 재현했을 때는 NHK가 작업의 전 과정을 중계할 정도였다. “일본은 백화점과 언론사가 생활문화를 주도한다”고 전했다.

우리 전통사발이 일본에서 다도와 결합해 인기를 얻고 다시 한국에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예술 그릇=다기’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나 다도가 종주국 일본에서조차 입식문화와 커피에 밀려 쇠퇴하는 요즘, 신씨는 도자기를 음식문화의 질적 향상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림이 보는 예술이라면 도자기는 쓰는 예술입니다. 저는 도자기를 신비화하는 데 반대합니다. 쓰지 않고 모셔두려면 뭐하려고 비싼 그릇을 삽니까. 사발과 보시기에 밥과 반찬을 담고, 달항아리에 꽃도 꽂아야지요.”

그가 작가 박영봉씨와 함께 지난해 <로산진 평전>을 펴낸 데는 이런 뜻도 있다. 기타오지 로산진(1883~1959)은 ‘그릇은 요리의 기모노’라고 주장하면서 요리와 그릇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현대 일본요리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여년 전 교토의 고급 요정에 갔다가 로산진의 그릇을 만난 뒤 그의 요리와 도예, 삶에 대한 자료를 모아온 신씨는 “ ‘먹방’에 그칠 게 아니라 요리의 종착역인 차림멋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 쪽으로는 도예백과사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도자기 관련 용어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에 머물러 있다. 사기장이 일본식 표현인 도공이 됐고 사기그릇은 자기로, 사금파리는 도편으로, 가마는 요로 불러야 유식하게 보인다. 동이, 귀때동이, 보시기, 옴파리, 멍텅구리 등 정겨운 이름들을 되찾는 게 그의 꿈이다.

그의 가마 뒤에는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영축산이 있다. 통도사라는 이름도 인도와 통한다는 뜻이다. 서둘러서도, 교만해서도 빚을 수 없다는 도자기의 산실로는 천하 명당이다.

■신한균


[집이 사람이다] (18) 뜨거운 가마 앞 겸손한 기다림…그렇게 그의 그릇에 삶이 담긴다


1960년 경남 사천에서 조선사발을 최초로 재현한 고 신정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4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일본 도큐백화점 미술화랑에서의 첫 전시 이후 매년 한·일 양국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다. 1997년 함경도 회령도자기를 국내 최초로 재현했으며, 경남 양산 신정희요에서 작품을 만들면서 도자사 연구와 강연,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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