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셰프 최미경의 ‘8 스텝스’

2016.05.20 21:01 입력 2016.05.20 22:49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공들여 요리한 공간, 음식…손님은 그 맛에 길들여진다

최미경씨(55)는 평범한 주부에서 시작해 요리 코디네이터, 쿠킹클래스 강사, 셰프, 사업가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20년 전 펴낸 <프로주부 최미경의 이탈리아 요리>로 이름을 알린 그는 2005년 ‘비스트로 8 스텝스’라는 이탈리아 식당을 열어 서울 삼청동에서 8년, 성북동에서 3년간 운영했다. 미식가와 호사가들 사이에 세련된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로 잘 알려졌던 이 식당은 얼마 전부터 사전 주문으로만 손님을 받는다.

[집이 사람이다] (19) 셰프 최미경의 ‘8 스텝스’

“이 요리를 누구에게 먹일까 생각하면 안됩니다. 누구에게 주든지 내 자식을 먹이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셰프로서 삶은 20대에 유럽 여행을 하다가 고성을 개조한 이탈리아의 한 고급 식당에서 현지 요리를 먹어보면서 시작됐다. 주요리가 나오기 전에 뷔페식으로 제공하는 전채요리만 이쪽에서 저쪽 테이블까지 한가득이었다. 그걸 다 먹어보느라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 후 이탈리아인 피에로 할아버지에게 투스카니 요리를 배웠다. 지금은 이탈리아 요리가 흔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서양요리 하면 스테이크 정도였던 시절이다. ‘최미경의 요리책을 통해 이탈리아 요리를 처음 접했다’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집이 사람이다] (19) 셰프 최미경의 ‘8 스텝스’

그의 요리 레시피는 70세트가 넘는다. 가짓수로는 수백가지인데 그의 원칙은 전채, 샐러드, 주요리, 후식이 어울리도록 세트를 구성하는 것이다. 직접 요리해 보고 재료량과 조리법을 깨알처럼 적어 파일에 꽂아놓은 레시피는 그의 재산목록 1호다. 그가 요즘 손님들에게 선보이는 요리 가운데 좋아하는 메뉴는 셰리와인 비네거에 절인 비트와 구운 호두, 루콜라·프로슈토·수제 리코타치즈를 넣은 샐러드, 새우·호박·샤프란향의 오일 소스 파스타, 오븐구이 영계·샴페인 크림 리조토와 아티초크 크림소스 등이다.

삼청동 시절 8 스텝스는 직원이 7명이나 될 만큼 번성한 식당이었지만 3년 전 성북동으로 오면서 3명으로 규모를 줄였다. 이제 셰프는 최씨 혼자다. “겉으로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일은 고되기 짝이 없어요. 마침 함께 일하던 셰프가 당분간 쉬고 싶다고 하기에 매일 여는 식당은 접었습니다. 고단한 식당에서 즐거운 식당으로 바꾸고 싶어서요.” 손님이 없는 빈 식당은 연극이 끝난 무대와 비슷하다. 테이블은 그대로 놓여 있으나 촛불은 꺼졌다. 주방의 각종 집기는 깨끗이 정리돼 다음 요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0년째 자신의 집에서 열어온 쿠킹클래스는 지금도 계속한다. 성북동으로 식당을 옮기면서 살림집도 식당 2층으로 옮겼다. 그의 요리를 제대로 전수받으려면 70세트를 다 해봐야 하는데 여러 팀이라서 한 달에 한 번 한 세트씩 실습한다. 오래 배울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정든 사람들과 10여년 전부터 한 탈북자 학교에서 급식봉사를 해왔다. 아이들은 처음에 못 먹는 음식이 많지만 차츰 봉사자들이 준비해오는 다양한 요리에 길들여진다.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요리를 해줘야 한다는 마음을 배운 것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다.

성북동 8 스텝스는 요리의 맛뿐 아니라 건축으로도 유명하다. 간송미술관 들어가는 골목의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이 집은 덩치가 크면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서울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붉은 벽돌집이다. 식당인 1층 전면은 통창이고 집 앞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다. 어쩐지 세련돼 보인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은 창틀이 흔히 쓰는 시스템 창호가 아니라 벽이나 화분 색깔과 비슷한 붉은 나무(나왕)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느 날 성북동을 지나가는데 평소 보이지 않던 허름한 집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인근 부동산을 찾았죠. 다섯 가구가 사는 다세대주택인데 소유권이 얽혀 쉽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한참 시간이 흘러 어떤 분이 ‘성북동 재미있으니 이사 오라’고 그래요. 뭔가 홀린 듯 다시 성북동을 찾았는데 부동산에서 이 집을 또 보여주는 거예요.”

2011년 이렇게 인연을 맺은 집은 밖에서 보면 한 집 같지만 실제로는 세 채가 붙어 있는 형태로 2층에 4가구, 옥상에 1가구가 칸을 나눠 살고 있었다. 1층은 LPG 영업소였다. 마당 없이 40평인 집을 계약한 뒤 필지를 정리해 세 집을 하나로 묶는 데만 10개월이 걸렸다. 옛날 동네에 녹아든 자연스러운 느낌이 좋아서 신축이 아닌 개조를 택했다.

[집이 사람이다] (19) 셰프 최미경의 ‘8 스텝스’

당초 목적대로 1층은 식당, 2층은 살림집 겸 쿠킹클래스로 만들기 위해 외벽은 놔둔 채 내부를 모두 철거하면서 H빔으로 보강공사를 했다. 그런데 경사진 땅에 덧대어 지어진 집이다 보니 바닥 높이가 서로 달랐다. 1층 식당의 경우 전면에서 볼 때 앞보다 뒤의 바닥이 높았다. 높은 쪽 땅을 파서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높이 차이가 있는 오른쪽 뒤편은 아예 단을 높여 피아노를 놓고 영사기를 설치한 뒤 슬라이딩 도어를 달아 별도 공간으로 만들었다. 거리로 창을 낸 주방은 지하실과 계단으로 이어져 지하를 보조주방으로 쓰도록 했다. 2층 역시 옛날 네 가구를 나누던 벽을 대부분 철거하고 보강공사를 거쳐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슬라이딩 도어로 만든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침실이 있고 나머지는 책상과 의자, 책꽂이가 있는 사무공간이다.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커다란 계단이 있다. 다시 벽으로 양쪽을 막고 가운데만 트인 안쪽으로 들어가자 6인용 테이블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쿠킹클래스가 열리는 큼직한 주방, 왼쪽은 소파와 벽난로, 책장과 오디오 시스템이 있는 거실이다.

일과 생활이 합쳐진 이 공간의 콘셉트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이나 철제로 된 싱크대와 내부계단이 차가운 느낌을 주면서도 원목 가구와 다양한 조명이 이를 보완해준다. 그는 스웨덴 고급 가구 브랜드인 쉘레모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을 오랫동안 겸해왔다. 전시장도, 유통망도 없이 자신이 직접 가구를 사용하면서 원하는 고객에게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주문을 받아 1년에 한 번쯤 들여오는 방식이다. 오래 써온 욘 칸델의 징크 책장이나 마츠 테셀리우스의 엘도라도 암체어는 한정판만 만들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오른다.

그의 집은 과거와 현재, 세련됨과 소박함이 공존한다. 서민들이 모여 살던 다세대 주택의 흔적은 특별한 개성이 됐다. 가든파티 테이블이 있는 옥상으로 나가기 위해 내부계단을 올라가면 한쪽에 장독대가 있다. 오랫동안 써온 책상과 책꽂이에는 옛날 사진액자와 추억이 담긴 물건이 올려져 있다. 주인이 좋아하는 꽃과 촛불도 빠지지 않는다. 새로 산 명품이 풍기는 돈 냄새가 아닌, 오래 써온 명품이 갖는 품격이라고 할까.

최씨는 일찌감치 강북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사람 중 하나다. “원래 골목 구경하는 걸 좋아했어요. 서울시내 여기저기 다니다가 북촌 한옥마을을 보고, 아 이런 곳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감탄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 가회동은 골목에 연탄재가 쌓여 있는 허름한 곳이었어요.”

그는 2000년 가회동 31번지 낡은 한옥을 구입했다. 김홍남 전 국립민속박물관장, 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 등이 중심이 돼 ‘여자들이 한옥마을을 지키자’며 ‘한옥아낌이모임’을 만든 게 이 무렵이다. 그러나 대문만 보고 마음에 들어 덜컥 계약한 집은 안에 들어가보니 영 딴판이었다. 56평 대지에 네 가구가 콘크리트로 방을 붙여 살았고, 지붕과 대문만 한옥이지 고택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목재가 썩어 보수는 어렵고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한국가구박물관이 한옥 건물을 지으면서 인력과 자재를 대주었다. 건축 양식과 마감재는 전통 방식을 따르면서 가구와 편의시설은 한옥의 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서양식을 채택한 2층 한옥을 짓기까지 5년이 걸렸다. 미닫이 유리창을 달아 사방으로 뚫린 대청에서는 인근 한옥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최씨는 북촌의 재생(regeneration)에 기여한 공로로 2009년 유네스코로부터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 보존상을 받았다.

한옥 신축에 이어 삼청동 8 스텝스를 열 때 한옥을 보수했고 성북동 다세대주택 개조로 이어졌다. “새로 짓는 것보다 오래된 집을 고치는 일이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것 같아요. 신축은 백지에다 줄 긋고 그대로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보수는 많은 변수가 있는 대신 뜻하지 않게 개성있는 공간이 나오죠.” 성북동 집의 변화를 지켜본 건축가 승효상씨는 “천지개벽했네”라며 최씨를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성북동 8 스텝스의 1층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건너편 서울성곽을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한다. 집 고치느라 한참 고생하는데 성곽 주변 정비공사가 시작되더니 밤이 되자 가로등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모든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문화는 시간의 축적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뭐든지 천천히 쌓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요즘 셰프가 많아지고 요리문화도 발전했는데 미세하게 살펴보면 어색한 부분이 있어요. 급하게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기 삶도 여유있게 꾸리고 싶다는 그는 고향 부산의 명소인 해운대 달맞이고개에 쿠킹클래스를 새로 열었다. 20대 초반에 부산의 한 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강의를 하는 동안 연극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최선을 다하게 된다고 한다. ‘8 스텝스’는 삼청동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10개인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10 스텝스에 이르기 위해 늘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 ‘8 스텝스’라고 믿고 있다.

■최미경

[집이 사람이다] (19) 셰프 최미경의 ‘8 스텝스’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5년간 극단 레파토리시스템 소속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등 월간지에 요리칼럼을 게재했으며 현대카드 하우스 오브 더 퍼플, 브래댄코 등의 자문으로 활동했다.숙명여대 코르동블루 과정을 마친 뒤 ‘8 스텝스’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어 11년간 운영했다. 서울 성북동과 부산 해운대에서 쿠킹클래스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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