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와 21세기 지정학

2024.05.28 20:41 입력 2024.05.28 20:43 수정

2020년대 한국 자본주의는 대외 요인의 규정력이 커진 상태다. 오늘 한국 경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는 외부로부터의 지정학적 영향이 점증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요청한다. 역사로부터 조금이라도 배우겠다면,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치경제 지형과 그 지형을 형성시킨 국제적 갈등의 구조가 그간에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조건지었는지, 그리고 한국 정부와 자본이 그 지형 변화에 축적 전략을 어떻게 조응시켜 왔는지 규명하는 작업을 미룰 수 없다. 바야흐로 지정학의 정치경제학이 경제 분석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1세기 한국 경제를 규정하는 국제 갈등의 기축 구조는 적어도 동서 냉전이 개시되던 무렵에는 그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법하다. 전선의 한쪽에는 미국과 일본의 연합이 태평양전쟁 후 미국 주도의 강화된 동일체로 재구성되었고 반대쪽에는 소련과 중국의 동맹이 들어섰다. 한국의 경제개발이 미국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출발하게 된 배경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병영적 노동통제와 저임금-저곡가 수탈구조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후발국이 갖추기 가장 어려운 요소로 알렉산더 거셴크론이 지목한 생산적인 산업 노동력의 창출에 성공했다. 그것은 고도성장의 문을 연 열쇠였다.

소련 붕괴는 유럽에서 냉전을 종식시켰으나 한국을 둘러싼 국제 지형은 사정이 달랐다. 이삼성의 지론처럼 동아시아 역내 갈등의 기축 구조는 유럽에서 냉전이 끝난 뒤로도 중국의 존재로 인해 여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기억할 점은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1990년대 체제 이완과 그에 따른 미국의 전략 변경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그 선택의 결과가 한국 경제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지배력 확대로 귀결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국 효과와 함께 맞은 21세기 첫 10년은 한국 제조업에 분명 축복의 시간이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저임금 노동과 완제품의 판로를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한국 대기업들도 해외 직접투자를 개시하며 ‘수직적 언번들링’(공정을 분해해 해외에 배치)에 나섰고 개방형 부분장치와 완제품 수준에서 단기간에 고도화를 달성했다. 다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벌어지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본격화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자동화 설비투자를 늘린 자본이 노동 유연화에 사활을 걸자 ‘민주’정부가 기간제법과 파견법으로 화답하며 비정규직 사용이 양산된 탓이었다.

2010년대는 세계경제가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로 접어드는 가운데 중국의 군사력 현대화와 경제적 팽창을 경계한 미국이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시동을 걸며 활로를 모색한 시기였다. 중국이 과거 중저위 영역에 머물렀던 기술력을 끌어올리면서 중간재 조달의 자국 내 비중을 확대한 효과는 괄목할 만했다. 2010년대 한국 제조업은 그 대목에서 경쟁력의 한계를 노정했다.

지정학적 갈등의 불길은 경제 영역으로 옮겨붙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쌓은 관세장벽은 2020년대 바이든 행정부에 의해 더 높아지는 중이다. 미국은 주변국을 동원해 첨단 분야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강대국들이 기술 지배력을 놓고 벌이는 대결이다. ‘기술제국’의 확립이 보장할 막대한 독점이윤이 목적이다. 그것은 또한 제국주의적이기도 하다. 공급망을 자국 내부로 집중시키는 미국의 기도는 한국 등 ‘가치동맹’ 참여국의 국내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킨다. 장차 일자리도 앗아갈 것이다. 중국 배제와 블록화, 고금리 지속으로 주변국들은 고비용과 고환율에 수반된 고물가 부담을 떠안게 되기 쉽다. 오랜만에 하나가 됐다는 ‘네오콘’과 자유주의적 관여 노선의 공통 목표도 결국 전 세계 어디든 미국에 맞설 도전자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일 터이다.

한국 경제는 이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미국 뜻을 따라야 하는 운명인가. 그렇게 지정학적 비전을 과거의 이분법에 가두고 미·일연합의 첨병 노릇을 하며 과거사는 덮고 이웃한 중국과 적대하는 길이 과연 최선인가. 아니면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평화, 공동 번영, 기후위기 공동 대응을 위한 협력 공간을 자기 결정으로 능동적으로 창출해가는 편이 바람직할까. 우리는 동독과의 미니 데탕트로 통일과 냉전 해소를 예비했던 과거 서독이나,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에 참여하는 최근 인도의 균형 외교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 구조의 불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부터 주체적인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음을 스스로 믿어야 한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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