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아이들이 떠난 폐교엔 화가부부의 ‘그림 아이들’이 산다

2016.06.24 19:46 입력 2016.06.24 19:50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 사진 박기호 사진가

화가 김차섭·김명희 부부의‘폐교 작업실’

김차섭·김명희 부부가 녹음이 우거진 폐교 작업실 야외에서 김명희씨의 칠판 그림 곁에 서 있다.

김차섭·김명희 부부가 녹음이 우거진 폐교 작업실 야외에서 김명희씨의 칠판 그림 곁에 서 있다.

폐교의 첫인상은 무척 아담했다. 보통 폐교라고 하면 일정한 규모가 상상되지만, 화가 김차섭(74)·김명희(65) 부부가 살고 있는 강원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 폐교는 교실 3개짜리 미니 폐교였다.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수몰되자 주민 대부분이 떠났는데 몇몇 남은 아이들을 위해 임시로 지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학교는 옛날 운동장으로 쓰였던 평지로부터 30여개 작은 돌계단을 올라가야 닿는다.

교실을 개조한 김명희 작가의 작업실.

교실을 개조한 김명희 작가의 작업실.

“어서 오세요.” 부부가 현관 앞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이 된 교무실이다. 교장실은 침실이 됐고 거실 한쪽을 부엌과 화장실로 개조했다. 교무실과 일자로 붙은 교실 3개는 부부 각자의 작업실과 작품 보관 창고로 쓰인다. 창고 옆 현관문은 아래 운동장과 경사지고 굽은 길로 이어진다. 산골 아이들이 교실로 오가던 통로다. 건물 뒤에는 작은 관사도 있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온 물을 받은 연못에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김차섭씨가 청소년기에 고향 경주에서 수집한 신라유물들이 거실 세계지도 앞에 진열돼 있다.

김차섭씨가 청소년기에 고향 경주에서 수집한 신라유물들이 거실 세계지도 앞에 진열돼 있다.

이들은 뉴욕 맨해튼에서 내평리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젊은 시절을 뉴욕에서 보낸 뒤 1990년 귀국해 폐교에 정착했지만, 6년이 지난 뒤부터 겨울은 맨해튼 소호의 로프트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내평리로 돌아온다. 귀국할 때 뉴욕 집을 처분하지 못한 게 발단이었으나 첨단 유행이 감각을 자극하는 맨해튼의 삶과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운 내평리의 삶이 주는 변화의 리듬에 몸을 맡긴 결과이기도 하다. 산에서 내려온 노루가 인기척 나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실 벽에는 부부의 작품이 걸려있다. 김명희씨는 칠판을 캔버스로 삼아 사실주의 회화를 그려왔다. 가로 3.6m, 세로 1.2m의 칠판에 오일파스텔로 그린 ‘분수놀이’ 속에서 미소가 해맑은 10여명의 아이들이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며 여름을 만끽하고 있다. 추상화를 주로 해온 김차섭씨의 그림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돌밭이다. 자연의 순환, 문명의 시작을 환기시키는 돌밭은 40년간 동판화, 유화 등으로 제작되면서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여행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다른 한 벽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 놓았다.

거실문을 열자 복도가 나오고 첫번째 교실이 김명희씨 작업실이다. 미대 졸업 무렵에 그린 자화상부터 최근 칠판 그림까지 그의 궤적이 보인다. “젊을 때는 한국화단이 온통 추상화였는데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어요. 폐교로 온 다음 겨울 바람을 막으려고 칠판을 떼어 문을 가렸는데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이곳에 있었을 아이들을 상상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마음껏 그림을 그려보고 싶던 칠판. 그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모습을 드러낸 아이들이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옆 교실은 김차섭씨 작업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의 질서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그림으로 표현해왔다. 경주에서 자라면서 유물과 유적, 문명에 대한 관심을 키운 그는 뉴욕 시절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넘어온 스키타이족의 후예로 자신을 규정했다. 세계지도 위의 자화상, 기마족이 전쟁에 나갈 때 말 위에서 마셨던 술잔인 마상배, 그것을 쥔 모양으로 구부린 손 등이 그런 탐구의 흔적이다.

올해 결혼 40주년을 맞은 부부의 인연이 흥미롭다. 서울대 미대 2학년생이던 김명희씨는 영화 서클에 가입했고 촬영에 필요한 장소를 물색하다 대학 9년 선배인 김차섭씨의 화실로 찾아갔다. 그는 불과 27세에 파리비엔날레(1967) 출품 작가로 선정된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 후 곽훈·김구림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 미술그룹 AG를 창립(1969)하고 상파울루비엔날레(1971)에 출품하는 등 활동이 활발했다. 김차섭씨는 ‘똑똑하고 질문이 많았던 여학생’으로 김명희씨를 기억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김차섭씨가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대학원생이던 김명희씨가 같은 학교 미술강사로 오면서다. 이때 김차섭씨는 유관순기념관의 역사화 ‘The Moment of Action’(1973)을 제작하는데 김명희씨가 이 작업에 참여했다. 투옥된 유관순을 8명의 남자들이 둘러싼 강렬한 그림이다. 작가의 삶을 결심한 김차섭씨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1974년 미국으로 떠나고, 김명희씨도 이듬해 뉴욕행을 택했다.

김명희씨의 도미는 결혼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이 목적이었다. 그는 초대 한국은행 총재와 주영대사, 초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낸 김유택씨의 4남3녀 중 막내딸이다.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일본과 영국에서 4년간 살기도 했다. 김차섭씨의 뒤를 이어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일하던 그에게 주변에서 결혼하라는 권유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불안감이 컸다. “뉴욕에 도착하고는 드디어 자유로워졌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동료 예술가로서 세번째 인연이 이어진 두 사람은 1976년 뉴욕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 다음날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가난한 출발이었다. 김명희씨는 일단 남편이 작업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다가 생활이 안정되면 자신도 다시 작가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무렵 김차섭씨의 돌밭 그림은 프랫 인스티튜트의 윅 카이저 교수로부터 “빛과 그림자만으로 완벽한 질서를 표현했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를 섬세한 선으로 재현한 동판화 ‘Between Infinities’는 1976년 오듀본 아티스트 소사이어티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비슷한 동판화 ‘Triangle Between Infinities’는 2012년 프랫 인스튜티트가 설립 125주년을 맞아 동문 예술가의 세계적 이미지 125점을 선정했을 때 순수미술작품으로는 유일하게 15위에 포함됐다.

“김차섭씨의 작품은 아들이고, 내 작품은 딸이니까 둘 다 사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예술가 부부로서 꾸려온 조화로운 삶에는 김명희씨의 이런 지혜가 담겨있다. 그는 번화가인 메디슨 애비뉴에 ‘피놀라’라는 패션숍을 인수해 이곳을 한국 실크제품과 함께 24번가에서 42번가 사이에 몰려있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쇼룸에서 괜찮은 옷을 주문해 판매하는 편집매장으로 운영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피놀라’를 운영하면서 부부는 경제적 안정을 찾았고 미국과 유럽 여행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김명희씨는 1983년부터 가게일을 하는 틈틈이 드로잉 작업을 했다. 목탄이나 연필이란 재료가 잠깐씩 작업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만난 어머니(박홍득)의 경기여고 동창인 김향안 여사(김환기 화백의 부인)가 작업을 격려하고 화랑과 연결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부부는 1987년 한국에서 나란히 전시회를 열어 도미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지도 위의 말 그림과 자화상(김차섭), 목탄과 연필로 그린 풍경과 인물(김명희)이었다.

부부는 3년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중년인 데다 김차섭씨가 동판화 재료인 황산과 질산의 유독성 때문에 눈에 상이 2개 맺히는 증상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작업실이 필요하고 이삿짐도 많아서 폐교를 물색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폐교가 활용되지 않던 시절이지만 외국 사례를 접했기 때문이다. “독일작가 안셀름 키퍼가 폐교에서 작업한 작품들로 런던에서 전시회를 했는데 우리가 그걸 봤어요. 일본 NHK에서 폐교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내용을 방송하기도 했고요. 마침 이 폐교를 판다는 광고가 나온 걸 보고 구입했지요.”

당시 내평리는 서울에서 차로 7시간 걸리는 오지였다. 이삿짐 트럭이 올라가지 못할 만큼 도로가 좁아서 불도저를 불러 마지막 3㎞를 넓혀야 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뉴욕 신혼시절, 사무용 가구를 팔던 건물에 입주한 두 사람은 근처 공사장에서 나무를 얻어다가 부엌과 화장실을 만든 적이 있다. 유난히 높은 천장 때문에 겨울 추위에 시달렸던 경험도 비슷했다. 그러나 부부의 지리감각은 특별한 데가 있다. “내평리는 한국의 정가운데”라고 하는데, 지도를 보면 진짜 그렇다.

김차섭씨는 오자마자 폐교 주변에 자작나무 60그루를 심었다. 경주 김씨 신라 흥덕왕 36대손인 그의 조상은 흉노족으로, 기원전 1000~2000년 흑해 연안에 살다가 기원전 200년 황하 중류까지 진출했으며 그 후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추정된다. 줄기가 눈부시게 하얀 자작나무는 스키타이족이 살던 중앙아시아 톈산산맥과 시베리아, 강원도를 잇는 문명의 끈이다. 그가 경주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안압지나 황룡사 인근에서 수집해 평생 간직해온 와당과 토기는 거실의 세계지도 아래 전시돼 있다.

“저에게 내평리는 더욱 각별하죠. 칠판이라는 매체를 발견했으니까요.” 김명희씨에게 폐교는 사업을 접고 예술에 몰두하게 해준 고마운 장소다. 이곳에 온 뒤 ‘왜 사는가’라는 의문에 부딪혔던 그는 그리운 얼굴을 하나씩 불러왔다. 폐교 아이들은 조금씩 자랐고 갓난아기가 되기도 했다. 남편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뒤에는 카레이스키의 초상을 그렸다. 하얀 캔버스의 회화가 그림자를 그려 빛을 드러낸다면, 검은 칠판 그림은 빛의 존재를 표현한다.

인물과 함께 내평리 주변 풍경도 칠판 그림의 중요한 소재다. 칠판을 길게 세워 폐교의 연못을 그린 그림에는 실제 나무보다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더 강조돼 있다. 뉴욕에 머무느라 직접 보지 못하는 겨울과 봄 풍경인 점도 특이하다. “삶의 실체는 기억이니까요. 그래서 그림에서도 ‘reflection’(거울에 비친 상 또는 반사)을 강조합니다.” 노마드로 살아온 그에게 집이 갖는 의미 역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집을 그리워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곳이 집이라고 하고, 깨달은 사람은 어느 곳도 집이 아니라고 한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집은 각자 마음에 있는 게 아닐까요.”

■김차섭·김명희

[집이 사람이다] (24) 아이들이 떠난 폐교엔 화가부부의 ‘그림 아이들’이 산다


김차섭(1940년생)과 김명희(1949년생)는 서울대 회화과 선후배이며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나란히 근무했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로 유학을 떠나 1976년 결혼한 뒤 김차섭은 작업을 계속하고 김명희는 패션숍을 운영하다 생활이 안정되자 작가로 돌아왔다. 1990년 강원 내평리 폐교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양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공동 인터뷰집 <구비치며 합류하다>(청강문화산업대학교)를 펴냈다.



<연재 끝>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