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돈 없어 반지 팔고, 굶으며 촬영해도 “영화는…그냥 공기 같은 것”

2017.10.15 22:27 입력 2017.11.10 16:21 수정
트빌리시(조지아) | 글·사진 김형규 기자

조지아 - 캅카스산맥을 지켜온 예술혼

전국에 영화관 10개·관객 100만뿐…그래도 미래 꿈꾸는 ‘시네키즈’

화려한 그라피티와 거대한 부조작품이 외관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빌리시의 복합문화공간 파브리카. 매일 밤 관광객과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어울려 파티를 벌이는 이곳은 조지아 청년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화려한 그라피티와 거대한 부조작품이 외관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빌리시의 복합문화공간 파브리카. 매일 밤 관광객과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어울려 파티를 벌이는 이곳은 조지아 청년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티나틴 구르치아니를 만나기로 한 곳은 ‘파브리카’였다. 조지아(옛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올드타운에서 10분간 버스를 타고 달리자 나타나는 낡은 주택가. 이런 곳에 뭐가 있을까 의아스럽던 순간 뭔가가 눈앞에 와락 들어왔다. 마치 흑백사진 틈에 컬러사진이 끼워진 듯, 화려한 그라피티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3층 건물. 입구에 다가서자 요절한 팝 아티스트 장 미셸 바스키아의 꿰뚫는 듯 도발적 눈빛이 방문객을 맞는다. 건물에선 강한 비트의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왔다. 1층에는 카페와 바, 에스닉 스타일 공예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벽에 붙은 게시판엔 요가와 필라테스 수업, 사진전, 영화 상영회를 알리는 일정들이 적혀 있었다. 널찍한 홀 곳곳엔 낡은 소파와 의자, 해먹 따위가 널려 있었고 그 위에 걸터앉거나 기댄 이들의 경쾌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런웨이에 서도 손색이 없을 듯한 멋진 차림의 남녀부터 타투와 피어싱으로 단장한 이들,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집시를 연상케 하는 젊은이까지 뒤섞여 연출하는 초현실적인 풍경. 오래된 봉제공장을 개조한 이곳은 요즘 트빌리시 힙스터들의 성지로 통한다.

‘코카서스 인종’이라는 말이 유래했을 정도로 장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 조지아. 구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이자 스탈린의 고향인 이곳은 독립 후 겪은 영토 분쟁과 내전, 오랜 경제불황으로 고통받아왔다. 이 같은 이미지만 품은 채 찾아간 트빌리시의 호스텔 겸 복합문화공간 ‘파브리카’는 뉴욕이나 베를린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감독 구르치아니(44)는 “댄서, 화가, 음악가, 영화인 등 다양한 예술 분야 종사자들이 교류하는 아지트이자 세계 각국에서 온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라며 “조지아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느끼려면 이곳에 와야 한다”고 말했다.

므타츠민다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티나틴 구르치아니 감독이 트빌리시 시내 곳곳을 가리키며 영화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므타츠민다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티나틴 구르치아니 감독이 트빌리시 시내 곳곳을 가리키며 영화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 캅카스의 숨은 영화강국 조지아

최근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 중 하나는 조지아다. 2010년 이후 거의 매년 굵직한 국제 영화제에 작품이 소개되고 상을 받는다. 연간 영화 제작편수라야 고작 20여편, 인구 400만명에 불과한 변방의 소국은 어떻게 이 같은 성과를 이뤄냈을까.

구르치아니 감독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계>로 2013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대상을 받았다. 프로듀서인 여동생 타무나와 함께 활동하는 자매 영화인으로도 유명하다.

파브리카에서 만난 그가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며 자동차를 몰고 향한 곳은 므타츠민다산이었다. 산기슭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푸니쿨라’라 불리는 산악열차에 올랐다. 정상엔 1930년대에 만들어진 므타츠민다 공원이 펼쳐져 있다. 구소련 시절부터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로 인기를 모았던 곳이다. 한쪽엔 고급스럽고 세련된 2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2층은 트빌리시 시내의 야경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영업을 시작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지만 구르치아니 감독과 몇 마디를 주고받던 매니저는 출입문을 열어줬다. “조지아에선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어디서나 좀 먹히는 게 있어요.”

그와 함께 발코니에 놓인 테이블에 앉고서야 이곳까지 올라온 이유가 이해됐다. 금빛 지붕이 선명하게 반짝거리는 사메바 대성당(성 삼위일체 교회), 그 앞으로 트빌리시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므트크바리강, 붉은 지붕과 흰색 벽 사이로 푸른 나무와 잿빛 골목들이 빚어내는 풍광들. 유럽과 아시아, 기독교와 이슬람교.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세력의 대치선이 됐던 이 도시는 1500년 동안 점령과 파괴, 재건을 40여차례 반복한 아프고 굴곡진 역사를 넉넉한 표정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1960~1970년대 구소련을 대표하는 유명한 영화 중 상당수가 이 공원과 건물을 배경으로 찍혔다”면서 “지금도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8세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독일 유학을 거쳐 감독이 됐다. 조지아 감독 중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해 감독이 된 사례가 많다. 유학파 출신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감독 중 유독 여성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조지아 여성감독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조지아 영화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여성’ 감독. 그 배경에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뒤 이어진 전쟁이 있다. 전쟁에 나가 수많은 남자들이 죽고 다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현재도 많은 조지아 여성들은 해외에 나가 일하며 고국의 가족 여럿을 먹여살리고 있다. 유럽에 나가 있는 조지아 출신 이주노동자는 100만명으로, 이 중 여성은 60%를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새로운 일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도 여자들이었어요. 다들 일도, 공부도 악착같이 했지요. 유학시절 교수가 ‘불행한 사람이 더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했는데, 전쟁이라는 드라마틱한 경험을 했다는 것은 불행인 동시에 예술인으로서 특권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 ‘조지아 뉴웨이브’의 주인공들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갇혀 있었던 바위산을 품은 조지아의 아름다운 자연은 일찍이 서구세계에 정평이 났다.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는 “캅카스 산맥의 장엄함과 그곳 사람들의 낭만적인 기질이 방황하던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레르몬토프의 문학적 성취 역시 조지아의 풍광이 자양분이 됐다. 톨스토이와 푸시킨도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남길 정도로 조지아의 자연은 예술인들에게 영감의 젖줄이었다. 조지아 영화인들은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자연을 꼽는다. 2014년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기오르기 오바슈빌리 감독의 <옥수수 섬>은 시작 후 20여분 동안 대사 없이 주인공과 함께 조지아의 하늘과 강, 섬을 묵묵히 비춘다.

실크로드의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면서도 문명 발달사를 이끈 주도세력의 각축장이 됐던 땅을 지켜낸 사람들의 열정은 뜨거운 예술혼으로 표출됐다. 4세기 초 일찌감치 기독교(조지아 정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화려한 전통 춤과 음악, 독창적인 음식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의 예술혼이 19세기 말에 이르러 가닿은 곳이 영화다. 1895년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탄생한 해다. 이듬해인 1896년 조지아에서는 최초로 영화 상영이 이뤄졌다. 1900년대 초반에 이미 수도 트빌리시에 영화관이 여럿 들어서 사람들을 모았고 1912년엔 최초로 장편 다큐멘터리, 1916년엔 최초의 장편 극영화가 제작·상영됐다. 영화 대국 미국이 최초의 장편영화 <국가의 탄생>을 제작한 것이 1915년이었다.

소련 합병은 조지아 영화에 축복이면서 동시에 시련이었다. 소련은 정치·문화적 선전도구로 영화를 장려했고 조지아는 예술적 역량을 드러내며 더 많은 지원을 통해 창작혼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볼셰비키 정권의 ‘토착화’ 정책 덕에 연방 안에서도 고유의 언어와 문화 유산을 지킬 수 있었고, 기존의 문학작품을 각색하면서 나름의 영화 양식을 만들어갔다. 많은 인재들이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흥행영화를 제작했고 조지아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소련 전역에서 인기를 누렸다. 가뜩이나 문화적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조지아인들에게 영화는 더더욱 특별한 자랑거리가 됐다. 그들은 서슬퍼런 정권의 검열조차 은유와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서구에 구소련의 영화 거장으로 알려진 파라자노프, 이오셀리아니 등이 모두 조지아 출신이다.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지닌 신진 감독들이 독립 후 펼친 새로운 실험과 도전은 오늘날 국제 영화계에 ‘조지아 뉴웨이브’라는 용어를 통용시켰다.

쇼타 루스타벨리 국립연극·영화대학교에서 만난 영화학과 학생들은 외모부터 관심사까지 개성이 제각각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만은 한결같았다.

쇼타 루스타벨리 국립연극·영화대학교에서 만난 영화학과 학생들은 외모부터 관심사까지 개성이 제각각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만은 한결같았다.

조지아 뉴웨이브 대표주자의 하나인 오바슈빌리 감독(54)이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찾아갔을 때 그는 와인과 포도즙으로 만든 전통과자 추추첼라를 권했다. “조지아 사람들은 손님을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 신을 소홀히 여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는 쇼타 루스타벨리 국립 연극·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려 10여년을 기다렸다. 돈이 없어 영화학교 졸업작품인 18분짜리 단편을 찍는 데 3년이 걸렸다. “집에 있는 금반지를 팔아서 일주일 찍고 한 달 넘게 쉬었다가 또 돈 생기면 사흘 작업하고 그랬어요. 먹을 빵도 없을 때였죠. 스태프 중 한 명이 새벽 5시부터 빵공장에 줄 서서 받아온 빵을 촬영장에서 다 같이 나눠 먹으며 종일 일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영화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죠.”

졸업 후 정식 감독으로 데뷔해 첫 장편을 찍기까지 다시 10년이 걸렸다. 제작비가 문제였다. 그러나 영화가 성공하고 이름이 알려져도 경제적 보상은 따르지 않았다.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는 동시에 3년 전부터 레스토랑 일을 병행하는 건 영화감독 수입만으로 네 아이와 아내를 먹여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바슈빌리 감독은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택시를 잡았다. 15분을 달려 닿은 시 외곽엔 1930년대에 처음 문을 연 조지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 단지가 있었다. 그가 영화학교 시절 이론 수업을 듣고 실습도 하던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시설이 가구공장, 인쇄소, 사무실 등으로 바뀌었다. 수중 촬영을 하던 수영장은 아예 쓰레기장으로 방치됐다. 상념에 잠긴 듯한 그는 “영화는 내 삶 자체이자 그냥 공기 같은 것”이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시절의 흔적을 갖고 있는 것은 지금도 간간이 연극공연을 하는 작은 극장뿐이다. 그와 함께 방문했던 날에는 <리어왕> 무대세트를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 필름에 새겨진 현대사의 굴곡

조지아 초대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다룬 오바슈빌리의 최근작 <키불라>는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를 향해 묻는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러시아가 내놓지 않고 있어요. 답을 듣지 못하면 조지아 사회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리칼라 요새에서 내려다본 트빌리시 야경. 멀리 사메바 대성당의 빛나는 자태가 돋보인다.

나리칼라 요새에서 내려다본 트빌리시 야경. 멀리 사메바 대성당의 빛나는 자태가 돋보인다.

구소련 시절 일방적 체제 선전을 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수였던 조지아 영화는 독립 후 고단한 민중의 삶과 다층적인 갈등, 각종 문제의식을 꾸준히 영화로 표현하고 있다.

원로 영화감독 라나 고고베리제(89)는 영화와 현대사의 길항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의 어머니 누차 고고베리제는 조지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었고 딸 살로메 알렉시도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3대 모녀 영화감독은 각기 당대를 반영하는 독특한 영화미학, 여성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개성적 시선으로 세계 영화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자택을 찾았을 때 고고베리제는 손수 문을 열어줬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일주일에 두 번씩 테니스를 친다”고 했다. 5층 아파트 꼭대기층의 집은 거실이 널찍하고 전망이 시원했다.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책상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새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참이라고 했다. “<와일드 플라워>라는 작품이에요. 내 또래의 주인공이 나오는 자전적 얘기죠. 노인의 사랑도 충분히 긴장감 넘치고 매력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는 소련 시절인 1958년 모스크바의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조지아로 돌아와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만들었다. 여성 감독이 극히 드물 때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은 자연스레 그를 영화로 이끌었지만, 정작 그의 성장기는 ‘어머니의 부재’ 상태였다. 독일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뒤 영화에 뛰어든 누차 고고베리제는 1930년대 말 당국의 탄압을 받아 10년을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냈다. “7세 때 헤어졌다가 17세에야 다시 엄마를 만났어요. 낯설고 남처럼 어색했던 기억이 나요.”

그는 영화에서 손을 뗀 어머니 대신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7년에 발표한 <사생활에 관한 인터뷰>는 산레모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고 냉전이 한창인 1982년 미국에서도 상영될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 소련 독립 직후엔 정치에도 참여해 국회의원을 지냈고 2004년부터 6년 동안은 프랑스 주재 대사로 일했다.

그의 집은 가족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진, 실내장식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책장에는 조지아어로 번역된 월트 휘트먼과 타고르의 시집이 꽂혀 있었다. 영문학과 불문학을 공부한 그가 직접 조지아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책장 한쪽에 놓인 커다란 액자를 집어들었다. “1925년 엄마가 일하던 영화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흑백 화면엔 스튜디오 안에서 연기 지도를 하는 누차 고고베리제의 뒷모습이 담겨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 쟁반에 가득한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동물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이건 엄마가 굴락(강제수용소)에 있을 때 만들던 건데 저한테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빵을 조그맣게 뭉쳐서 모양을 만들고 굳은 뒤에 다시 색칠하는 거예요. 뭔가를 만드는 데 집중하다 보면 현실의 고난과 시련도 보다 수월하게 잊을 수 있지요.”

어머니 누차 고고베리제 감독의 사진을 보여주는 라나 고고베리제 감독.

어머니 누차 고고베리제 감독의 사진을 보여주는 라나 고고베리제 감독.

■ 여전히 높은 현실의 벽

그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바심 섞인 어조로 몇 차례나 했다. 그 정도 명성을 가진 사람이 뭐가 문제일까 싶었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조지아에서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조지아국립영화센터(GNFC) 외에는 제작비를 지원하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고고베리제 같은 원로부터 갓 데뷔를 준비하는 신인까지 모두 자신의 시나리오를 들고 GNFC의 제작지원 공모 경쟁에 뛰어든다. 매번 20~25편이 도전하지만 그중 선택되는 것은 2~3편뿐이다. 그나마도 전체 제작비의 20~30% 정도만 지원받을 수 있다. GNFC의 연간 예산도 200만달러(약 22억7000만원)에 불과하다. 결국 모자라는 금액은 해외의 투자자를 찾아 각자 조달해야 한다. 국내에선 영화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감독들은 자금 지원이 용이한 서유럽 쪽에 인맥을 만드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올드타운의 한 카페에서 만난 라도 가체칠라제(25)는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 차세대 영화비평가다. 국립 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지아 영화계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GNFC는 프랑스 제도를 본떠 만들었지만 프랑스와 달리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지 않고 상업영화에 대한 지원도 없어요. 대중과 동떨어진 영화만 지원하죠. 감독들도 명성을 쌓기 위해 해외영화제에 먼저 영화를 알리다 보니 정작 조지아 개봉은 제작 1~2년 뒤인 경우가 많아요. 이러니 누가 조지아 영화를 보려고 하겠어요.”

조지아 전국의 영화관 수는 10개가 채 안된다. 그중 절반은 수도 트빌리시에 있다. 실제로 트빌리시 시내 영화관 3곳의 상영 목록은 <원더우먼> 등 할리우드 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지아어로 된 변변한 책이 없어서 늘 영어나 러시아어로 영화 공부를 해야 했어요. 교수들도 소련 시절의 영화만 줄줄 읊지 현대영화의 흐름에 대해 너무 몰라요. 조지아에선 더 이상 체계적인 공부가 어려울 거 같아서 유학을 가려고 하는 거예요.”

조지아 영화가 세계에서 각광받는 이면엔 생존을 위해 서유럽 평단의 취향에 어울리는 작품을 맞춤형으로 만들어내려는 기형적 구조가 숨어있었다. 국내시장에서 산업적인 선순환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장기적 전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국립연극·영화대학교의 영화학과장인 오타르 리타니슈빌리 교수(65)는 규모의 한계를 거론했다. “소련 시절엔 전국의 인구가 2억5000만명이었죠. 감독도 그 정도의 상상력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어요. 반면 지금 조지아의 영화관객은 100만명 정도입니다. 작년에 가장 성공한 조지아 영화 수익이 20만달러밖에 안돼요. 산업으로 크기 힘든 구조인 거죠. 해외영화제에서 상 받는 것도 좋지만 조지아 영화계 전체로 보면 국내에서 흥행하는 영화가 나오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봅니다.”

■ 그래도 영화에서 미래를 본다

트빌리시 구도심 한쪽에 ‘자유광장’이 있다. 광장 가운데 서 있는 황금빛의 ‘성 조지’상은 대표적인 관광지다. 광장 근처엔 근사한 쇼핑몰과 고급 호텔이 즐비하다. 그런데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부서진 채 방치된 건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대로를 벗어나면 비포장 도로 위로 고물 자동차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광경이 흔하다.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라는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이곳 젊은이들에게 영화는 매력적인 탈출구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망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므트크바리 강변에 있는 국립연극·영화대학에서 만난 아나 바르자제(19)는 올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아직 영화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소통하는 데 영화만 한 수단이 없는 것 같아요. 내 문제, 우리 세대의 목소리를 밖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죠. 당장 영화를 만든다면 내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아나의 동급생인 그반차 사라슈빌리(20)는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조지아에서도 젊은 세대는 기존 질서나 사회, 구세대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불합리함을 발견하고 불만을 느낀다”면서 “그런 문제와 해결책들을 영화에서 찾고 싶다”고 설명했다.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미란다 나미셰슈빌리(24)는 “조지아는 무에서 유를 만든 나라”라며 “이곳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조지아 영화가 성취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영화감독 지망생 테아 바사제(25)는 4대째 영화인 집안에서 자란 시네키드다. 할아버지는 수석 촬영감독이었고 할머니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아버지 역시 촬영감독이었다. 덕분에 열살 무렵부터 그의 놀이터는 영화작업 현장이었다. 촬영, 편집, 필름 인화 같은 제작 과정을 코앞에서 봤을 뿐 아니라 타르코프스키, 파졸리니, 펠리니, 안토니오니 등 거장의 작품들을 보며 자랐다.

영화학교에서 만난 학생들 중에는 바사제처럼 예술인 집안의 자녀들이 많았다. 바사제의 친구 이리나 겔라슈빌리(25)는 약대를 그만두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학교를 옮겼다. 겔라슈빌리의 할머니는 유명한 가수였고 어머니는 작곡가, 아버지는 건축가다. 이리나의 여동생 카토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를 목표로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춤, 음악, 사진, 격투기 등에 두루 능했던 바사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영화는 고민의 여지가 없이 선택한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말한다.

“조지아에서 예술인은 정말 배고픈 직업이에요. 어릴 때부터 보아왔는데도 그걸 계속 이어가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남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처한 문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도 영화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선 아직도 어른들이 여자가 스무살이 넘으면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닦달해요. 그만큼 보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우리 세대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죠. 서구 세계와 자유롭게 연결될 기회가 담긴 영화에 젊은이들이 더 많이 빠져드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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