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군부독재에 억눌린 삶…음악으로 불의에 맞서다

2017.11.19 21:20 입력 2017.11.19 21:34 수정

칠레 예술로 승화시킨 피와 눈물

민중의 열망 담긴 벽화…“폭력시위보다 강한 무기”

칠레 산티아고 바리오 베야비스타 거리에 있는 식당 ‘라 카사 엔 엘 아이레’(La casa en el aire·공중에 있는 집) 전경.

칠레 산티아고 바리오 베야비스타 거리에 있는 식당 ‘라 카사 엔 엘 아이레’(La casa en el aire·공중에 있는 집) 전경.

‘바리오 베야비스타’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가장 활기찬 거리다. 레스토랑과 펍, 카페가 빼곡히 들어찬 거리 곳곳은 젊은이들의 경쾌한 발걸음과 흥겨운 음악소리로 뒤섞여 있다. 도로변에 자리 잡은 카페 ‘라 카사 엔 엘 아이레’(공중에 있는 집)로 들어서자 안쪽 벽에 큼직하게 그려진 남자의 얼굴이 맞는다. 칠레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빅토르 하라다. 음악으로 불평등과 불의를 비판하고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민중가수. 그의 활동 기반은 ‘누에바 칸시온’이었다.

1960~70년대 남미는 혼란스러웠다. 정치적으로는 독재가,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진 열강의 착취가 삶을 옥죄었고 문화적으로도 종속됐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을 찾고자 했던 움직임이 새로운 노래라는 뜻의 누에바 칸시온이다. 안데스 지역의 민속음악에 뿌리를 둔 누에바 칸시온은 음악 장르인 동시에 음악 운동이다. 민족적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열망에서 시작돼 불의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됐다.

스피커를 통해 하라의 대표곡인 ‘아만다, 당신을 기억해요’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라이브 카페가 몰려 있는 바리오 베야비스타에서도 주로 누에바 칸시온을 들려주는 곳이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1973년 콜롬비아로 망명갔던 군인 가족이 1990년 민주화 이후 칠레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매니저 로드리고 라미레스(40)는 “그 시절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중년층들도 있지만 음악과 정서에 공감하는 젊은이들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 시절 이 건물은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밤새 울분을 토하며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독재에 저항할 것을 다짐했다. 그들은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건물 외벽에 벽화를 그려놓곤 했다. 그러면 군부는 밤사이 흰색 스프레이로 벽화를 지워놓기 일쑤였다.

야외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던 크리스티안 비야그렌(32)과 마니엘라 로드다베로(28)는 “팝이나 EDM을 듣기도 하지만 누에바 칸시온에 정서적으로 강하게 이끌려 종종 이곳을 찾는다”면서 “특히 피스코 샤워(포도증류주 피스코에 레몬, 설탕 따위를 섞은 남미식 칵테일)를 마실 때는 이 음악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처음 열린 ‘빅토르 하라를 위한 1000개의 기타’ 행사.  ⓒ헤마 라미레스

2013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처음 열린 ‘빅토르 하라를 위한 1000개의 기타’ 행사. ⓒ헤마 라미레스

■ 1000개의 기타로 다시 태어나는 빅토르 하라

벼룩시장이 열리는 산티아고 지하철 프랭클린역 주변은 주말마다 늘 인파로 붐빈다. 시장 초입에 있는 ‘조니 레코즈’는 음악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음반가게다. 다양한 장르의 음반과 희귀한 중고 LP가 특히 많아서다. 매장 한쪽엔 누에바 칸시온 LP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빅토르 하라를 비롯해 킬라파윤, 인티 이이마니, 비올레타 파라의 음반이 눈에 띄었다.

22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조니 카비에레스(52)는 빅토르 하라의 LP를 들어 보이더니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음악”이라고 말했다. “쿠데타 이후 하라의 음악은 금지곡이 됐고 음반도 대부분 파괴됐지요. 누에바 칸시온이라는 장르도 위축됐고요. 일부 사람들이 그의 음반을 창고에 감춰두기도 했고 음반을 들고 멕시코나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유럽으로 빠져나갔다가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갖고 왔지요.”

카비에레스도 외국을 돌며 하라의 음반을 수집했다. 군부독재 시절 누에바 칸시온은 겉보기엔 칠레인들의 삶에서 잊혀진 듯 보였다. 하지만 누에바 칸시온을 사랑한 이들의 보호 속에 ‘오래된 음반’은 살아남아 다시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카비에레스는 “빅토르 하라 앨범은 구하면 바로 팔린다”면서 “일반 앨범이 한 장에 2000페소(3500원) 정도인데 누에바 칸시온 음악가들의 오리지널 앨범은 3만페소(5만3000원) 정도”라고 말했다. 구매층은 주로 20~30대 젊은이들이다.

칠레 산티아고 프랭클린역 인근 벼룩시장에서 음반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조니 카비에레스가 빅토르 하라의 LP음반을 들고 있다.

칠레 산티아고 프랭클린역 인근 벼룩시장에서 음반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조니 카비에레스가 빅토르 하라의 LP음반을 들고 있다.

산티아고 중심부인 프로비덴시아는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다. 이곳의 음반가게 ‘루가르 신 리미테스’에도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의 LP 음반이 진열돼 있었다. 주인 엑토르 라미레스(60)는 “빅토르 하라 음악을 찾는 이들은 대학 새내기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에서는 주로 힙합이나 팝, K팝 등이 많이 나오는 편”이라면서 “누에바 칸시온은 대중적으로 많이 소비되는 장르는 아니지만 지식인들이나 대학생들 사이에는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몇 년 전부터 빅토르 하라의 음악을 재해석하고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장르는 달라도 동시대를 바라보며 음악으로 소통하려는 뮤지션들에게 하라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영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빅토르 하라를 위한 1000개의 기타’다. 생전에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주장했던 하라는 기타를 운동의 도구로 삼았다. 싱어송라이터 로베르토 게라를 위시한 뜻있는 젊은 칠레 뮤지션들이 2013년 쿠데타 발발 40주년을 맞아 이 행사를 기획했다. 1000명의 뮤지션과 2000명의 청중들이 하라가 묻힌 레콜레타 공동묘지 인근 평화광장에 모였다. 저마다 손에 기타를 든 뮤지션들은 노래를 부른 뒤 일제히 하늘을 향해 기타를 높이 치켜들었다.

“장엄하고 벅찬 순간이었죠.” 첫회 행사부터 매년 참여하고 있는 루카스 라미레스(22)는 “음악은 언제나 시대와 통하는 통로였고 빅토르 하라는 시대와 소통하고 불의에 맞서는 예술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12살 때 기타를 배우면서 누에바 칸시온을 접한 그는 하라의 음악세계를 계승하려는 동료 뮤지션 15명과 ‘콜렉티보 밀 기타라스’(천개의 기타 모임)를 결성해 학교와 커뮤니티 등을 다니며 누에바 칸시온 공연을 펼친다. 올해 ‘1000개의 기타’ 행사는 지난 10월1일 열렸다. 지난 6월 방문 당시 “올해 행사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라미레스는 지난달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메모라르테: 아르피예라스 우르바나스’의 활동가들이 만든 아르피예라스 작품들.

‘메모라르테: 아르피예라스 우르바나스’의 활동가들이 만든 아르피예라스 작품들.

■ 헝겊 조각으로 빚어낸 역사

1950년대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누에바 칸시온은 시대정신을 담아 발전하며 남미 대륙에 폭넓게 확산됐다. 혹자들은 쿠바 혁명 정신의 뿌리도 누에바 칸시온에 두고 있다고 평가한다. 시대정신이 꿈틀대는 이 장르는 독재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고 킬라파윤, 인티 이이마니 등 많은 뮤지션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는 누에바 칸시온이 생명력을 갖고 세계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 또 세계 각국의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도 새롭게 피어올랐다.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당시 키예프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불렀던 ‘삶에 감사해’를 불렀다. 이 곡은 누에바 칸시온의 초석을 다진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1917~1967)가 만든 곡이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불렸던 ‘노농동맹가’는 빅토르 하라가 죽음 직전에 불렀던 ‘우리 승리하리라’를 번안한 곡이다. 이성형 전 서울대 교수는 논문 ‘칠레의 새 노래 운동: 궤적과 그 의미’에서 “누에바 칸시온은 안데스 산맥 전통 음악을 흡수하고 대중음악과 고급음악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양식을 실험한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적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현재도 신자유주의 소비사회에서 과거를 잊고자 하는 지식인을 비판하며 지속적으로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산티아고에 있는 ‘비올레타 파라 재단’을 찾았을 땐 마침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다야나 바레라(42)는 “파라는 칠레인들의 자랑”이라면서 “그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한 노래를 통해 세계 속에 칠레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재단에서 갖고 있는 자료들은 1970년대에 파라의 딸 이사벨이 유럽으로 망명할 때 가져가서 보관했던 것들이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재단이 중심이 되어 여러 예술단체, 시민단체와 함께 기념 공연, 세미나, 전시회 등 다양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아르피예라스’ 전시회다. 아르피예라스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 칠레 여성들이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는 메시지를 자수나 패치워크 등으로 표현했던 수예품이다. 칠레의 참상을 담은 수예품은 비밀리에 해외에 배포됐다. 아르피예라스를 통한 저항운동은 비올레타 파라가 시작했고 점차 칠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또 아르피예라스는 실종과 납치로 남성들이 빈 가정 생계를 위한 여성들의 소득 원천이 되기도 했다. 현재 아르피예라스는 인권운동을 통해 맥을 이어가고 있다.

‘메모라르테: 아르피예라스 우르바나스’는 아르피예라스를 전승하는 모임이다. 산티아고 외곽의 사무실에서 만난 에리카 실바 울바로(42)는 “비올레타 파라는 칠레 역사에서 저항, 정치적인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5년 전 만들어진 이 단체에는 15명의 활동가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회관에 작은 공방을 차려놓고 수시로 만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한다. 비둘기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울바로는 “아르피예라스가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평화와 인권을 지키려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옷”이라고 말했다.

울바로와 함께 활동하는 알레한드라 캄파스(42)는 책상 위에 놓인 작품들을 가져왔다. 알록달록한 색감을 가진, 앙증맞고 귀여운 인형들이었다. 첫눈에 “예쁘다”는 감탄사가 나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와 눈물의 시간을 담아놓은 역사다. 캄파스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엔 프랑스, 영국, 그리스에서 아르피예라스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도 민영연금 제도 반대 집회나 여성폭력 혹은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집회에 아르피예라스 작품을 들고 나선다.

‘거리 예술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알바로 라미레스가 산티아고의 거리 벽화 예술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거리 예술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알바로 라미레스가 산티아고의 거리 벽화 예술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벽화, 저항의 언어가 되다

산티아고 시내를 돌아다니면 건물 외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볼 수 있다. 성찰적 메시지를 담은 진지한 내용도 있고 저항적인 느낌의 강렬한 작품도 만나게 된다. 발랄하고 자유스러운 그라피티도 눈에 띈다. 산티아고를 대표하는 투어 프로그램 중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걸어다니면서 벽화를 감상하는 벽화투어다. 벽화투어 가이드 알바로 라미레스(32)를 ‘공중에 있는 집’ 앞에서 만났다. 일반적으로 투어가 시작되는 곳이다. 독재 시절 저항의 벽화로 유명했던 이 건물 외벽에는 강렬한 원색의 그림들이 빼곡했다. 그림의 소재는 기타, 원주민의 얼굴, 집 등이었다.

라미레스와 길 건너편 골목길을 따라 제법 올라가자 파블로 네루다가 살았던 집이 나왔다. ‘공중에 있는 집’이 있는 곳과는 벽화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화려한 색감에 자유로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이 동네는 ‘라 치암바’로 불리는 예술가들의 성지다. 온갖 종류의 그라피티 작품과 개성 넘치는 카페, 재미있는 숍들 때문에 마치 영화 세트장이나 테마파크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생기가 넘쳐났지만 그 뒤를 이어 불청객이 찾아왔다. 아파트를 짓고 부동산을 개발하려는 업체들이 이곳의 집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과의 갈등이 심해지다 현재는 소강상태가 됐지만 언제 다시 개발 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른다. 라미레스는 “‘나는 이 집을 팔지 않는다’ ‘이 동네에서 안 나간다’는 문구를 예술적으로 그려놓는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폭력적인 시위보다 예술적인 방법을 통한 의사 표시가 오히려 강한 무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벨린 가오나의 집에는 군부독재 시절 사라진 실종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벨린 가오나의 집에는 군부독재 시절 사라진 실종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지난달 1일 산티아고 거리에서 ‘혼자 추는 쿠에카’ 공연 모습.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 페이스북 캡처

지난달 1일 산티아고 거리에서 ‘혼자 추는 쿠에카’ 공연 모습.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 페이스북 캡처

골목을 빠져 나와 대로변에 이르자 역시 벽화가 나타났다. 작은 점을 찍어 전체 형태를 만드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벽화, 아티스트 푸사의 작품이다. 라미레스는 “푸사의 그림이 벽에 그려지면 건물의 가치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건물 주인들이 오히려 더 좋아한다”며 웃었다. 바리오 베야비스타 일대에서 활동하는 벽화 예술가는 200명이 넘는다. 라미레스는 투어 가이드를 하는 동시에 벽화도 그린다.

산티아고의 명물이 된 벽화는 1960년대 후반 등장했다. 좌파연합인 인민연합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민중예술이자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벽화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1970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옌데의 선거 유세에도 벽화가 많이 사용됐다. 벽화를 그리는 예술인들이 많았는데, 특히 BRP가 가장 주도적이었고 유명했다. 칠레 공산청년동맹이 만든 예술운동단체인 BRP는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선 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독재 정권에 맞설 거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벽화를 그렸다. 민중들의 소원과 열망을 담아낸 벽화 중에는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들도 많다.

바리오 베야비스타에서 활동하는 그라피티 예술가 카림 사발(32)은 “초기에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벽화들이 많이 그려졌는데 민주화 이후에는 힙합 등 외부에서 들어온 장르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칠레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의견을 말하려는 욕구가 강하다”면서 “그걸 표출하기에 벽화는 적절한 도구”라고 덧붙였다.

■ 아픔을 기억하는 춤

쿠에카는 칠레의 전통 민속춤이다. 수탉이 암탉의 사랑을 얻기 위한 몸짓을 형상화한 것으로 커플이 함께 추는 경쾌한 춤이다. 하지만 칠레에는 쿠에카를 혼자서 출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일명 ‘쿠에카 솔라’를 추는 사람들이다. 산티아고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람파라에 사는 에벨린 가오나(48)도 수십년째 쿠에카 솔라를 추고 있다.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거실 한쪽에는 여러 사람의 사진과 메모지, 카드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오나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사진 중에 놓인 한 장의 사진을 들고는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버지라고 했다. 가오나가 7살이던 1976년 실종된 아버지는 아직도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가오나의 아버지처럼 군부독재 시절 실종된 이는 1500명이 넘는다.

“어렸을 때 실종자 가족 모임에서 누군가 혼자 추기 시작하면서 퍼졌던 것 같아요. 짝을 이뤄 추는 춤을 혼자서 처연하게 춘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 이상 강렬하고 슬픈 표현은 없는 것 같아요.”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벨린 가오나(왼쪽)와 파울라 고도이.

‘콜렉티보 쿠에카 솔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벨린 가오나(왼쪽)와 파울라 고도이.

쿠에카 솔라로 유명한 이는 비올레타 수니가(84)다. 남편이 실종된 그는 1978년 이후 40년째 쿠에카 솔라로 공연을 하고 있다. 쿠에카 솔라가 운동으로 확산되는 기미가 보이자 정권은 오히려 쿠에카를 ‘국민 춤’으로 지정했다. 학교와 각종 단체 등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짝을 이뤄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추도록 권장하고 유도했다. 쿠에카 솔라 운동의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시도였고 실제로 그게 먹혀드는 듯했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쿠에카 솔라를 멈추지 않았다. 곳곳에서 실종자 가족 중심으로 쿠에카 솔라 모임이 만들어졌다. 가오나는 산티아고 인근에 사는 12명의 실종자 가족들과 4년 전 모임을 만들었다. 가오나의 집에서 함께 만난 파울라 고도이(37)는 “9월18일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마음을 모으게 됐다”고 말했다.

“9월11일 하면 많은 이들은 미국 뉴욕의 테러를 기억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9월11일은 쿠데타가 일어난, 민주주의의 죽음과 아픔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독립기념일을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불과 1주일 차이일 뿐인데 사람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비극을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우린 혼자서 쿠에카를 추되, 함께 모여 추기 시작했어요.”

피노체트 이후 칠레에 민주정권이 계속 들어섰지만 과거사 청산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노체트 역시 형사처벌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 가오나는 “실종자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도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 때문에 여전히 가해자 처벌도, 과거사 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기억의 고통보다 사람들의 기억이 잊혀지는 게 더욱 고통스러운 사람들. 이들은 잊지 않기 위해서 홀로 춤을 춘다. 칠레의 쿠에카 솔라는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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