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의 남자, 멈춘 조종사…‘악의 평범함’을 거부한 평범한 영웅들

2018.05.24 20:52 입력 2018.05.24 21:05 수정

톈안먼 사태는 1989년 4월15일에 사망한 민주개혁 성향의 후야오방 당 총서기의 추모집회가 발단이 됐다. 톈안먼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민주화운동의 횃불은 한 달이 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계엄군의 유혈진압은 6월3일 밤 시작돼 다음날 아침까지 지속됐다.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는 없으나 최소 1만명이 넘는다는 영국 외교문서가 지난해 말 공개됐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중국 민주화 시민단체들은 우회검색어로 톈안먼 사태 관련 기록을 공유한다. 검색어는 6월4일을 의미하는 ‘5월35일’이다. 제프 와이드너 제공

톈안먼 사태는 1989년 4월15일에 사망한 민주개혁 성향의 후야오방 당 총서기의 추모집회가 발단이 됐다. 톈안먼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민주화운동의 횃불은 한 달이 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계엄군의 유혈진압은 6월3일 밤 시작돼 다음날 아침까지 지속됐다.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는 없으나 최소 1만명이 넘는다는 영국 외교문서가 지난해 말 공개됐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중국 민주화 시민단체들은 우회검색어로 톈안먼 사태 관련 기록을 공유한다. 검색어는 6월4일을 의미하는 ‘5월35일’이다. 제프 와이드너 제공

세계를 뒤흔든 열흘 동안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군중들(러시아 혁명),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스페인 내전), 이오지마 섬에 성조기를 꽂는 미 해병대원들(2차 세계대전), 사살된 게릴라 체 게바라의 주검(볼리비아 혁명)….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로 불렸던 움베르토 에코는 하나의 신화가 된 보도사진들을 추적한다. 그는 ‘우리 세기의 성쇠와 부침은 획기적인 사건들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사진 몇 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말했다(김우룡 엮음, <이 한 장의 사진>, 눈빛 출판). 중국 현대사도 한 장의 사진으로 정리된다. 톈안먼 광장의 탱크 행렬을 혈혈단신 맨몸으로 막아내는 탱크맨 사진이 그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사진은 영화, 그림, 혹은 포스터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에코의 말처럼 톈안먼 사태를 취재했던 사진기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 편의 전쟁영화였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은 공포와 광기가 가득한 베트남전쟁의 지옥도를 필름에 담았다. 영화에는 해안가에 자리한 민간인 마을 학살 장면이 있다. 헬기 편대를 이끌고 베트남 상공을 누비는 킬고어 중령이 확성기 볼륨을 높인다. 스크린 안과 밖으로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바그너의 오페라 ‘발키리의 기행(The Ride Of The Valkyries)’! 마을은 화염에 휩싸인다. 쑥대밭이 된 마을을 내려다보며 킬고어 중령이 말한다.

“아, 아침에 맡는 네이팜탄 냄새가 좋지!”

발키리는 전사자를 선택하는 북유럽 신화의 저승사자다. 백조의 날개옷 대신 헬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킬고어 중령은 베트남전의 발키리다. 중령이 마을을 초토화시킨 이유는 마을에 잠복해 있는 베트콩 때문이 아니다.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치는 바다가 마을 앞에 있기 때문이다.

톈안먼의 발키리는 인민해방군이었다. 인민을 위한 인민의 군대가 총부리를 인민에게 돌렸다. 1989년 6월3일 어둠 속에서 시작된 총성은 4일 동이 틀 때까지 지속됐다. 현장을 취재하던 AP통신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에게는 공포의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군중들이 몰려왔다. 동료의 죽음을 지켜본 시위대에 제대로 된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광분한 시위대에 둘러싸인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움켜쥐었던 카메라를 놓고 여권을 꺼내 들었다. 아메리칸! 아메리칸! 다행히 사진기자를 알아본 한 시민이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기자에게 말했다.

“사진 찍어라! 세계에 보여줘라!”

세계에 보여줄 만한 사진은 다음날에 찍혔다. 인민을 짓밟은 인민해방군이 광장을 탈환했던 5일이다. 뉴욕 본사에서 전갈이 왔다. 공권력이 장악한 톈안먼을 보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제프 와이드너는 눈앞이 캄캄했다.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안심했다. 전날 밤 쓰던 카메라는 산산조각 났고, 돌에 맞은 머리는 계속 지끈지끈거렸다. 하지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기자의 육감은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일단 사무실을 나섰다. 톈안먼을 조망할 수 있는 베이징호텔이 목적지라는 것은 둔탁한 머리도 알 수 있는 밴티지 포인트였다. 휴대가 편한 카메라 장비를 가방에 넣었다. 자전거에 올라탔다.

호텔 입구는 공안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보도금지령을 내린 경찰이 외신 기자들의 노트북과 카메라를 빼앗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공안의 눈을 피해야 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람보가 나타났다. 호텔 입구의 공안 뒤로 람보 티셔츠를 입은 한 백인 청년이 그의 눈에 포착됐다.

“야, 조!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제프 와이드너는 호텔 투숙객 행세를 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가 조라 부른 청년은 커크라는 이름의 미국인 대학생이었다. 호텔 현관을 통과한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커크는 제프 와이드너의 조력자가 됐다. 청년은 사진기자를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으로 안내하고, 6층 자신의 방을 휴식처로 제공했다. 필름이 다 떨어지자 네거티브 후지필름 한 통을 구해준 이도 커크였다. 호텔 투숙객이 갖고 있던 그 필름에 탱크맨 사진이 담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스팔트를 긁어대는 육중한 무한궤도의 쇳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계엄군의 탱크 행렬이 호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찍었어요? 찍었냐고요?”

입이 딱 벌어졌다. 한 사나이가 혈혈단신으로 탱크 행렬을 막고 있었다. 대로 한복판에서 펼쳐진 탱크와 사나이의 대결은 서너 차례 반복됐다. 선두 탱크가 방향을 바꾸면 청년은 다시 탱크 정면으로 달려들어 탱크를 막았다. 몸뚱이를 내던진 한 사나이의 기개가 무자비한 살육기계인 탱크를 이겨낸 것이다. 전 세계로 타전된 제프 와이드너의 탱크맨 사진은 대부분의 일간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톈안먼의 영웅이었다.

탱크맨은 누구였을까?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차이메리카(Chimerica)>는 이 한 장의 사진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차이메리카는 기존 패권국가인 미국과 신흥 패권국인 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를 설명하는 합성어다. 극 중 차이메리카는 관찰자와 피사체의 관계로 나타난다. 미국인 사진기자는 20년 전 자기 사진의 피사체였던 톈안먼의 영웅 탱크맨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탱크맨이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진기자는 중국인 친구 장린을 통해 탱크맨의 소재를 소개받았다. 그러나 사진기자가 만난 탱크맨은 그의 사진 속 피사체가 아니었다. 탱크의 조종사였다. 인민을 짓밟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나이의 목숨을 살린 탱크 조종사가 톈안먼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친구가 일러준 것이다.

픽션 차이메리카는 현실이 됐다. 2016년 미국 내 중국 인권단체가 탱크맨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탱크맨과 탱크 조종사 2명 모두를 찾는 캠페인이었다. 장쩌민 주석은 톈안먼 사태 1년 후 CNN과의 인터뷰에서 탱크맨이 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정확한 소재는 알 수 없었다. 이름이 왕웨이린이다, 탱크 파손죄로 사형당했다, 대만으로 망명했다, 감옥에 갇혔다는 등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7월 탱크맨의 실체가 밝혀졌다. 홍콩 주재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는 탱크맨은 중국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고, 자기가 찍힌 사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탱크맨은 사진처럼 유명인사가 되고 싶지 않고, 다만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를 소망할 뿐이었다.

영웅 만들기는 할리우드의 생존전략이다. 나치, 베트콩, 후세인, 오사마 빈라덴 등 실존했던 악의 축이 사라지자 할리우드는 신화 속에서 죽음의 전령을 불러냈다. <어벤져스> 최근작은 그리스 신화 죽음의 신 타나토스로 분장한 타노스를 악의 축으로 설정했다. 블랙팬서,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캡틴아메리카 등 마블 히어로 군단은 떼거리로 타노스에게 달려든다. 온갖 최첨단 무기와 마술, 괴력 등을 총동원하지만 히어로들은 타노스를 대적하기 버겁다. 죽음이란 히어로들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게다가 타노스가 추구하는 죽음은 무차별적이다. 발키리와 달리 타노스는 죽음의 대상을 고르지 않는다. 그래서 평등한 죽음이다. 반면 히어로들은 자기 주변인들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 개인적인 죽음이다. 최근작 <어벤져스>의 히어로들이 무기력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블 히어로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가공할 만한 능력은 개인의 수양이나 고뇌의 산물이 아니다. 우연히 변종 거미에 물리고(스파이더맨), 감마 방사선에 오염되고(헐크), 억만장자의 주체 못할 돈(아이언맨) 때문에 갖는 능력이라면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반면 <차이메리카>의 중국인 장린이 생각하는 영웅은 작은 저항을 실천에 옮기는 작은 영웅들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탱크 조종사는 단지 1명의 생명만 살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 1명이라는 숫자로 매몰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폭정 아래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고 말했다. 만약 탱크 조종사가 그저 상부의 명령만 충실히 수행했다면,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악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폭정을 멈추게 할 방법은 그 평범함에 대해 곱씹어보는 것이었다. 계엄군이었던 탱크 조종사도 한 사내의 평범한 생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렇게 큰 능력도,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저항의 출발점이다. 결과는 대단했다. 그 사소한 행동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저항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평범함을 벗어난 작은 영웅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톈안먼에는 또 다른 작은 영웅이 있었다. 베이징호텔에 있던 대학생 람보도 작은 영웅이었다. 그의 본분은 학업이다. 호텔에 안전하게 머물며 위험한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호텔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기자를 돕기로 결정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필름을 배달한 이는 사진기자가 아니라 대학생 람보였다. 탱크맨이 담긴 필름을 속옷에 숨긴 람보는 호텔 밖으로 뛰쳐나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거리에 포진한 계엄군과 공안, 불타버린 차량들과 잔해들을 헤치고 그는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는 그날 이후 람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중년의 사진기자는 하와이 지역신문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제프, 당신한테 필름을 줬던 사람이에요. 당신은 내 방 화장실을 암실로 사용했었죠. 내 친구가 당신에 대한 소식을 알려줬어요. 난 대만에서 15년 동안 지내다가 최근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곧 내 노래가 담긴 앨범이 나와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네요. 언제 여기로 올 수 있나요?

20년 후 청년 람보는 뮤지션이 됐다. 그의 노래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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