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사진사가 김옥균 암살에 나선 까닭은···개화기 사진 수난사

2018.05.10 10:11 입력 2018.05.10 10:24 수정

8미리 곡사포 6문이 장착된 1,370톤급 미군 모노카시호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강화도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8미리 곡사포 6문이 장착된 1,370톤급 미군 모노카시호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강화도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세계로 열린 바다가 3면으로 둘러싸인 조선 반도에서 제국 열강의 출현을 목격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조선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지만, 백성들의 눈과 귀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조선 연안에 출몰하는 육중한 쇳덩이의 증기선은 조선 백성들이 대면한 첫 제국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하게 태산처럼 큰 배가 아니었다. 조선 반도 너머에 중국이 아닌 더 큰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깨달음과 두려움 혹은 경외감이었다. 그렇게 후기 조선이 맞닥트린 새로운 세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챙긴 미군 퍼비스 일병과 브라운 상병(오른쪽)이 콜로라도 함상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챙긴 미군 퍼비스 일병과 브라운 상병(오른쪽)이 콜로라도 함상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제국의 배에 실려 온 것은 과학 기술의 발명품인 근대(근대의 어원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로마어)의 물건들과 가공할만한 막강한 화력이었다. 제너럴셔먼호 방화 사건을 빌미로 삼아 1871년에 강화도에 쳐들어온 미국 전함에서 빗발치며 뿜어져 나오는 총포와 대포 앞에 조선 병사들은 무릎을 꿇었다. 강화도 침공에 성공한 미군들은 또 다른 침략을 저질렀다. 이미지 침탈이 그것이다. 제국의 병사들은 전리품으로 챙긴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대장군기) 앞에서 승리의 인증 샷을 박았다. 부상당한 조선인 포로들과 시체들마저 사진에 담았다. 신식 무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처절하게 패배한, 초라한 조선의 사진은 또 다른 전리품이었다.

강제로 문이 열린 항구에는 다양한 근대의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피, 카펫, 화장품 등 이백 여개가 넘는 다양한 서양의 물품들 속에는 보고 들을 수 있는 기계도 포함됐다. 축음기, 라디오, 카메라는 간단한 일개 서양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사고관을 지배하는 하나의 매체였다. 사진을 처음 본 후기 조선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부상당한 조선인 포로들과 이들을 데리러 승선한 관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옆으로 선 관리와 포로의 자세는 조선인의 신체를 측정하기 위한 포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부상당한 조선인 포로들과 이들을 데리러 승선한 관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옆으로 선 관리와 포로의 자세는 조선인의 신체를 측정하기 위한 포즈다. / 신미양요 기록사진집(강화군청 제공)

사진은 충격이었다. 사진을 박으면 혼이 나간다는 정도의 풍문은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됐던 반응이다. 조선반도 개화기 사진 이야기는 좀 더 다양하고 섬세함이 살아 있다. ‘세 명이 사진을 찍으면 한 명이 죽는다’, ‘부부가 사진을 찍으면 헤어진다’는 등 초상사진에 대한 주술적인 두려움은 풍경사진에도 묻어갔다. ‘사진 찍힌 건물은 곧 무너질 것’이며 ‘나무를 사진 찍으면 말라 죽을 것’이라는 저주도 사진에 담겨 있었다. 서양 문물에 무지몽매했던 조상들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어야 할까? 하늘에서 떨어진 코카콜라병을 신의 선물로 착각했던 아프리카 부시맨과는 달리 사진에 대한 조선인들의 미신적인 믿음은 그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1888년 6월 한양 일대에 흉측한 소문이 돌았다. 선교사나 서양인들이 어린이들을 잡아먹는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어린이유괴살인 소문을 들은 조선 청년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양인 주거지인 빈댓골(지금의 정동)에 몰려가는 등 서양인에 대한 무차별 폭행의 조짐도 보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서양인들은 본국에 무력을 요청했고 조선 정부에도 공식 항의했다. 이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고시문을 내보냈다.

현재 소문을 들으니 민간 마을에서 어린아이를 많이 잃어버리고 외국인에게 판매하며, 외국인은 심지어 삶아 먹기까지 한다 하며, 거리에서 종종 아이를 훔치는 흉악한 도둑을 체포하여 문초한다고 한다.

-외인(外人) 유아도식(幼兒盜食) 풍문에 대한 정부 고시문, 고종 25년.

달포 가량 지속됐던 서양인 영아유괴살인 소문은 사진 괴담으로 탈바꿈했다. 유괴된 아이들의 사지가 잘려 있었다는 끔찍한 소문이 돌던 터에 미국 대사관 직원의 가방에서 바로 그 아이들의 사진이 발견됐다. 사진이 증거라며 조선 사람들은 범인을 대사관 직원으로 지목했다. 사진은 범죄의 증거물을 넘어서 괴담으로 확대 됐다.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몸을 갈아서 사진 현상 인화 재료로 사용하고, 눈알은 뽑아서 카메라 렌즈로 사용한다는 흉측한 이야기가 도성에 퍼졌다.

좀 끔직한 상상이었지만, 눈알을 뽑아서 카메라 렌즈로 사용한다는 사진 괴담은 곱씹어볼만하다. 과학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조선 사람들이었지만, 카메라 렌즈가 바로 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진술의 기술력을 고려해본다면 ‘사진을 박으면 혼이 나간다’는 생각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초상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은 낮은 감광도 때문에 최소 수초에서 수분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만약 ‘자 찍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라는 사진사의 명령을 거부했다면 피사체의 외양은 흘러버리게 된다. 실패한 초상사진은 심령사진같이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모습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종일가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고종일가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사진사, 사진관에 대한 이야기는 설왕설래가 많다. 1880년 초에 몇몇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과 청국에서 사진술을 배워왔는데 눈여겨볼만한 사연은 1884년 종로에 촬영국을 개설했다는 지운영의 이야기다. 그는 고종황제의 초상 사진을 찍은 일로 장안에 화제가 됐다. 지금에야 사진 한 장 박는 다는 것이 별다른 일이 아니겠지만, 당시에는 일개 서화가 출신 사진사가 황제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주문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대통령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사진기자밖에 없다는 기자들의 우스갯소리도 있다.).

임금님 사진사 지운영은 또 다른 임무도 맡았다. ‘카메라는 총의 승화’라는 후대의 미국 사진 비평가 수잔 손택의 말을 조선 왕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진사 지운영에게 떨어진 임무는 갑신정변(1884년)의 주역 김옥균의 암살이었다. 김옥균은 민씨(명성황후) 세력을 몰아내려는 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피했다. 김옥균의 암살 지령에 지운영의 마음이 움직일 만한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다. 종로에 개설했던 지운영의 촬영국이 다름 아닌 갑신정변 때문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절의 사진에 대한 사연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록에 남아있다. 대한매일신문 1907년 8월 17일자에는 ‘천연당’이라는 이름이 아주 예쁜 사진관의 광고가 실려 있다.

본인 등이 황단하 석정동(지금의 소공동 부근) 김규진가 사랑 후정에 천연당사진관을 건설하고 대 중 소 만세불변색 각양 사진을 염가 수응하겠사오니 촬영하기 원하시는 내외국 첨원은 본관에 내림 면의하시오. 사진관 주인 김규진, 박위진 고백.

고종황제의 용안을 촬영했던 또 한 명의 사진사 김규진이 소공동에 촬영국을 열었다. 색이 변하지 않는(만세불변색) 다양한 크기의(각양) 사진을 싸게(염가) 촬영해주겠다는 광고는 일본 사진사가 운영하는 사진관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천연당 사진관의 다른 광고를 보면 20세기 초 구한말 사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천연당 사진관 주인은 신문을 통해 사진값 외상을 독촉했다. 외상 때문에 ‘장차 영업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렀고(1908년 9월), ‘선금 혹 반 이상을 선입하고 증을 교환한 후에 입장 촬영’(1909년 6월)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최인진 저, 해강 김규진과 천연당사진관, 아라 출판). 외상값이 골칫거리가 될 만큼 사진을 많이 찍었다는 것이다. 한 달 동안 사진 찍은 사람의 수가 천여 명이 넘었다는 ‘사진관 흥왕’이라는 제목의 기사(대한매일신문 1908년 3월4일)도 남아있다.

비록 일본을 통해 사진술을 받아들였지만 구한말의 조선 사진사들은 일본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진관을 운영했다. 김규진은 외간 남자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기 힘든 부인들을 위해 부인 사진사와 여성 전용 촬영장을 마련했다. 여심을 이해하는 사진관 운영 방식은 사진술 수출국이었던 일본 사진사들이 거꾸로 본국으로 수입해 갈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창경원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창경원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나 열강에 둘러싸인 대한제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힘의 균형추가 일본으로 기울자 조선을 기록하는 카메라는 식민화의 도구로 활용됐다. 일본 인류학자들은 카메라로 조선인의 신체 사이즈를 기록했고, 장사치들은 경성의 풍경이 담긴 사진을 팔았다. 한반도 철도망의 중심지였던 경성은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 관광의 경유지였다. ‘경성 유람’을 부추기기 위해 일본 상인들은 관광엽서를 만들었다. 경복궁, 경성역, 창경궁, 종로 등 경성의 풍경 사진은 8장으로 구성된 관광엽서 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진은 ‘경험이나 사물의 축소판’이라는 수잔 손택의 말처럼, 손바닥만하게 작아진 경성은 일본인들의 관광상품으로 팔려 나갔다.

조선 기생 엽서도 잘 팔려 나갔다. 명월관 부근인 종로 서린동의 금광당 사진관은 기생사진관이라 불릴 정도로 기생들은 인기있는 피사체였다. 당시 기생들은 단순히 몸을 파는 여자들은 아니었다. 기예를 갖춘 기생들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며 ‘해어화’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예능인과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기생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다. 기생들이 차려입은 한복이라는 복식도 일본인들에게는 흥밋거리였다. 경성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기생들의 모습도 8장 사진엽서 세트에 담겨 팔려 나갔다.

채색된 기생 사진엽서/ 서울역사박물관제공

채색된 기생 사진엽서/ 서울역사박물관제공

조선 개항의 역사가 타자에 의한 수난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사진의 역사도 상처로 얼룩진 사연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어수선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조선의 사진사(史)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빛을 심기 시작했다. 사진 전문 교육기관들이 생겨났고,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경성사진사협회가 1926년에 결성됐다.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개인 사진전인 정해창의 예술사진전람회가 열려 한국 예술사진의 출발을 예감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모습은 조선의 사진사(師)가 기록해야 했다. 어두운 시대였지만 조선의 사진사들은 여명의 빛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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