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최대 명절 ‘녀피’엔 하룻동안 업무와 유흥 등 금지

2019.03.08 17:25 입력 2019.03.08 17:36 수정
이숙명

우리 팀은 그 틈을 타 2박3일간 오롯이 ‘불경한 재미’ 만끽

이숙명의 ‘유유자적’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24시간 동안 전기, 조명, 인터넷이 끊긴다고 가정해보자. 집 밖에 나가서도 안되고, 소음이 담장 밖으로 새어 나가서도 안된다. 금기를 어기면 순찰대가 당신을 잡으러 온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환경운동가들의 백일몽 같은 이런 하루가, 발리에서는 매년 현실이 된다. 발리 최대 명절 ‘녀피(Nyepi)’ 얘기다. 녀피는 발리 힌두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며, 주로 양력 3월 중에 돌아온다. 2019년은 발리 힌두력으로 1941년이고, 녀피는 3월7일이었다.

녀피가 되면 거리에서 차량, 사람, 소음, 불빛이 모두 사라진다.  이숙명 제공

녀피가 되면 거리에서 차량, 사람, 소음, 불빛이 모두 사라진다. 이숙명 제공

녀피는 ‘침묵의 날’이라고도 불린다. 묵은해를 보내고 자기반성을 하는 날로, 해당일 오전 6시부터 24시간 동안 불빛, 업무, 여행, 유흥이 금지된다. 일반인들은 집 밖에 나가서도 안된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나 출산이 임박한 산모를 위한 응급차량 외에는 탈것도 금지다. 심지어 발리의 유일한 국제공항조차 문을 닫는다. 엄격한 힌두교인들은 여기에 금식과 명상을 보탠다. 누군가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소음과 불빛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가면 페차랑(Pecalang)이라 불리는 지역 순찰대가 경고를 보낸다. 평소 정체, 매연, 소음으로 관광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꾸따의 번화가도 이날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녀피를 보내고 다시 조명을 밝히는 날, 힌두교인들은 가족, 친구들과 모여 지난날의 과오에 용서를 구한다.

전기·조명·인터넷 끊기고
외출 금지에 소음도 새나가선 안돼
어기면 순찰대가 잡으러 출동
오로지 한 해 반성하는 ‘침묵의 날’

내가 사는 누사프니다서는
36시간 암흑·고요 속에 갇히지만
우리는 수영장 딸린 독채 빌려
반성 대신 술과 유흥의 단합대회

인도의 힌두 마을들도 ‘우가디(Ugadi)’라는 이름으로 같은 날을 기린다. 하지만 연간 600만명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발리 같은 섬에서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하루 동안 도시 기능을 중지시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관광객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대개는 녀피를 피해 여행 일정을 조정하지만 극단적 환호와 불평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있다. 물질문명에 찌들고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기 위해 전 세계가 이런 날을 가지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별을 보며 명상을 하기에 최고라며 오히려 즐기는 사람도 있고, 인터넷 게시판에다 “명상이 필요하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강요하지 말라”고 투덜대다가 핀잔을 듣는 일명 ‘어그로꾼’도 매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거야말로 요즘의 ‘발리다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열혈 환경주의자들과 영성을 갈구하는 요기들,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행복한 여행자들, 정신 나간 ‘파티 피플’이 어우러지고, 그에 발맞춰 빠르게 상업화되는 와중에도 아침마다 신들에게 꽃을 바치고 전통을 고수하는 지역민들이 뒤섞인 풍경 말이다.

녀피가 다가오면 마을마다 힌두 전설의 원숭이 왕 ‘하누만’을 형상화한 ‘오고오고’를 만들어 전시한다.

녀피가 다가오면 마을마다 힌두 전설의 원숭이 왕 ‘하누만’을 형상화한 ‘오고오고’를 만들어 전시한다.

녀피는 인도네시아의 복잡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에는 총 네 번의 ‘새해(Tahun baru, 영어로는 New Year)’ 휴일이 있다. 1월1일인 양력 새해, 우리의 설날과 같은 중국식 음력 새해, 발리 힌두력 새해 전날인 녀피, 9월 이슬람력 새해까지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일 년 내내 초심으로 살 수 있다. 중국식 설날이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인도네시아에도 화교의 세가 강하다. 화교는 이곳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경제 부문의 약 80%를 지배한다. 한편 인도네시아 인구의 87.2%가 무슬림이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 인구 대국이다. 그들의 87%면 2억명이 넘는다. 그러니 이슬람력도 챙긴다. 반면 힌두교인은 인구의 1.7%, 약 400만명에 불과하다. 발리는 인도네시아에서 힌두 문화가 강력하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침묵의 날’ 의식을 대대적으로 수행하는 곳도 발리뿐이다. 하지만 힌두교는 불교와 더불어 기원전 1세기에 유입된 이 땅의 가장 오랜 종교 중 하나고, 한때 이를 기반으로 강력한 왕조를 형성한 만큼 녀피를 국가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한다. 재미있는 것은 석가모니, 무함마드, 예수의 탄생일도 모두 공휴일이라는 거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무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자여서 일단 신이라면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보는 인도네시아인들의 태도에 공감한다. 저축한 돈을 까먹으며 사는지라 매일이 휴일인 지금도 타고난 노동자의 피를 어쩔 수 없어 휴일이라면 덮어놓고 환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처럼 어정쩡한 비힌두인에게 녀피는 또 다른 의미다. 내가 사는 누사프니다는 한적한 섬이므로 발리보다 엄격하게 녀피 의식을 수행한다. 발리는 그나마 전기와 통신을 끊어버리진 않아서 집 안에선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누사프니다는 기업 차원에서 그것들을 막아버린다. 심지어 녀피 당일 오전 6시가 아니라 전날 저녁부터다. 거의 36시간 동안 암흑과 고요 속에 갇히는 거다. 냉장고도 가동할 수 없으므로 상할 것 같은 음식은 미리 먹어 치워야 한다. 누사프니다의 유일한 무슬림 지역인 토야 파크에서는 집 밖에 나갈 수 있다는데 내가 사는 삭티 마을은 다르다. 그 기간에는 배도 다니지 않으므로 관광객도 없다. 그리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일을 쉴 수 있는 다이빙센터 식구들은 몇 주 전부터 신이 나서 이날을 준비했다.

녀피에는 공항도 문을 닫기 때문에 관광객이 적다. 때문에 많은 숙박업소가 파격 세일을 한다.

녀피에는 공항도 문을 닫기 때문에 관광객이 적다. 때문에 많은 숙박업소가 파격 세일을 한다.

작년에는 모두 따로 발리에 가서 각자 호텔에 묵으며 생존했는데, 그건 별로 재미가 없었다. TV를 틀었더니 호텔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제지했다. 그래서 이번엔 돈을 모아 수영장이 딸린 독채 빌라를 빌렸다. 영업이 힘든 녀피 기간에는 호텔과 빌라들이 세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좋은 숙소를 구하기가 쉽다. 총 일곱 명이 단체로 보트 티켓을 예약하고, 음식과 술을 잔뜩 사재고, 함께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로드 받고, 빔프로젝터를 공수하고, 게임 도구들을 구했다. 2박3일간 일종의 단합대회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전자책 단말기와 보조 배터리만 있으면 36시간쯤 집 안에서 버티는 것도 괜찮고 사실 평소 생활도 그런 식인데, 불경한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덩달아 단합대회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 해의 죄를 씻고 반성하여 깨끗한 영혼으로 거듭나는 대신 와인과 위스키에 절어서 ‘오고오고(Ogoh-ogoh)’ 꼴로 귀가할 게 분명하다.

오고오고는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악귀들을 형상화한 조각상이다. 녀피가 다가오면 힌두 마을들은 대나무, 천, 스티로폼 등을 모아 오고오고를 만든다. 녀피 전후로 다채로운 의식들이 이어지지만 그중 하이라이트는 오고오고의 행진과 화염식이다. 올해 삭티 마을의 오고오고는 ‘하누만(Hanuman)’이다. 하누만은 바람의 신과 요정 사이에서 탄생한 흰색 원숭이로, 위대한 라마신을 도와 악귀를 물리친 용맹한 장군이다. 녀피 기간에 발리를 방문하면 페스티벌을 볼 수 있다. 관광객에게 녀피는 피할 게 아니라 즐겨야 하는 날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나와 친구들은 오고오고를 만들고 불태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오고오고가 될 것이고, 거기에도 나름의 신성한 의미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함께 삶을 헤쳐 간다는 의미다. 특히 다른 관계망이 전무한 외딴 섬에서는 지키고 싶은 동료가 있으면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적극 돌봐줄 필요가 있다. 이곳 동료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서로 삐걱대고, 돌아가며 슬럼프에 빠지고, 외로움에 절어 무기력해지고, 난생처음 해보는 사업에 신경쇠약 직전까지 가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주 잊었다. 일은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하며, 함께 일을 한다는 건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임을, 그걸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이 고향과 가족과 빌딩숲을 떠나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동안은 다이빙센터의 파트너 한 명이 여자한테 심하게 차이고 와서 죽네 사네, 다이빙이고 사업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네 하면서 우울과 짜증 사이를 맹렬히 오간 적도 있었다. 그 어둠의 기운이 동료들에게도 퍼져서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인도네시아인 후원자가 소식을 전해 듣고 말했다. “그는 ‘재미’가 없는 게로군.” 막연히 걱정만 하던 친구들은 기습이라도 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렇지, 재미가 필요하지. 누구든, 무엇에 건. 인생의 의미니 뭐니 하는 거창한 말들이 실은 그 한마디로 모두 설명되는 것인지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잘 버텨냈다. 그리고 ‘업무 금지’라는 아름다운 규정 덕에 한 손엔 맥주병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웹사이트를 수리하거나 스마트폰을 힐끔거리거나 회계 업무를 근심하거나 불안에 쫓기는 대신 떳떳하게, 오롯이 ‘재미’만을 추구하며 2박3일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유흥도 녀피의 금기라지만 일단은 비밀로 해두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녀피에 가족 대신 함께 모여 좋은 시간을 보내리라는 점이다. 정원에서 별을 보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하늘엔 인간이 만든 아무런 빛도 별들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당신의 도시에서 하루 동안 ‘침묵의 날’이 강요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닐 때 나는 종종 천재지변을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어느 회사가 도로공사를 하다가 전기망을 건드리는 바람에 강남 한 블록이 정전됐을 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터뜨렸다.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나도 메신저와 e메일로 현실이 날아드는 세상에서, 불가항력에 맞닥뜨려 양심의 가책 없이 쉴 수 있다는 건 그렇게 즐거운 일이었다. 힌두의 3300만 신들 중 누구 덕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녀피 의식을 정한 이들은 수천 년 뒤를 내다본 진정한 선각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들이 이렇게 자기를 돌아볼 시간도,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정신 나간 속도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러니 만일 3월에 발리를 여행하게 된다면, 불편하게만 여기지 말고 녀피를 경험해보기 바란다.

혹시 이 모든 게 따분할 거 같다거나, 낭만과 이상에 심취한 히피의 헛소리처럼 느껴진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정보만 입력하자. ‘오메드 오메단(Omed-omedan).’ 시쳇말로 ‘밀당’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녀피 이튿날 발리 남쪽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키스 의식’을 가리킨다. 스스탄(Sesetan) 마을 젊은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서로를 끌어당기고 키스를 하며, 다른 주민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물을 퍼붓는 의식이다. 관광객들이 잔뜩 몰려들어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키스 의식에 참가할 수 있는 건 마을 소속 젊은이들 중 미리 신청한 사람들뿐이다. 전날의 침묵과 대조되는 활기찬 이벤트다. 힌두는 결코 엄숙하기만 한 종교가 아니다. 영성과 에로티시즘, 자기성찰과 떠들썩한 축제의 조화,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것. ‘발리다움’의 비밀은 결국 힌두의 세계관에 있을 것이다.



[다른 삶]발리 최대 명절 ‘녀피’엔 하룻동안 업무와 유흥 등 금지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페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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