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맞바꾼 편리…그르노블의 ‘녹색 독재’는 성공할까

2019.03.15 16:25 입력 2019.03.15 16:36 수정
곽원철

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희뿌연 그르노블 시내레나네 가족은 그르노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의 청정지역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공기의 질이 좋지 못하다. 특유의 지형 조건 때문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시내를 덮고 있는 대기가 뿌옇게 정체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곽원철 제공

희뿌연 그르노블 시내레나네 가족은 그르노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의 청정지역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공기의 질이 좋지 못하다. 특유의 지형 조건 때문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시내를 덮고 있는 대기가 뿌옇게 정체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곽원철 제공

이 칼럼 지면을 빌려 종종 자랑해 오곤 했지만, 레나 가족이 살고 있는 그르노블 지역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첨단 과학기술 산업이 어우러져 프랑스에서도 삶의 질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이런 저런 매체에서 다양한 기준으로 발표하곤 하는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편인데, 주로 장애인·학생·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양질의 일자리, 주거 환경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편이다. 하지만 의외로 공기의 질로만 따지자면 그리 상위권에 들지는 못한다. 특유의 지형 조건 때문이다.

2000~3000m 설산들로 둘러싸인
침식분지 지형 프랑스 그르노블
공기 순환이 잘 안돼 대기질 나빠

대략 4만~5만년 전인 신생대 4기 마지막 빙하기에, 그르노블 지역은 두께 1000m가 넘는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깎으며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해발 2000~3000m를 훌쩍 넘는 설산들로 둘러싸인 움푹하고 평평한 지형이 현재의 그르노블이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기슭의 샤모니에 가면 ‘얼음의 바다(Mer de Glace)’라 불리는 거대한 빙하를 구경할 수가 있는데, 그 계곡이 4만~5만년 정도 지나면 현재의 그르노블처럼 되는 것이다(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의 유실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 어쩌면 그 기간이 훨씬 단축될 수도 있다. 아직도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 미심쩍은 분이 계시다면 더 늦기 전에 몽블랑의 ‘얼음의 바다’에 꼭 가 보시기 바란다).

2014년 당선된 에릭 피욜 시장
환경 관련 정책들 강력 추진
소상공인·저소득층 피해 호소에
“모든 변화엔 낙오자 생기기 마련”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침식분지 지형이다 보니 공기의 순환이 썩 좋지 못한 편이다. 오염물질이 계곡을 빠져 나가지 못해 누적되면 대기의 질이 급격히 저하될 수 있다. 이웃 나라인 독일에 비해 녹색당의 세가 약한 프랑스의 2014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지자체 중 유일하게 그르노블이 녹색당 소속 시장을 선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41세의 나이로 6년 임기의 그르노블 시장에 당선된 에릭 피욜 시장은, 당연하게도 환경 개선을 최우선의 시정 목표로 삼고 강력한 정책들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가령 대기오염 경보 및 이에 따른 비상저감조치도 프랑스의 다른 지자체들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프랑스의 대기오염 기준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오존 농도, 질소산화물, 미세먼지 등을 종합하여 정한다. 타 지역은 우리나라 예보등급 기준과 비교할 때 ‘보통’과 ‘나쁨’의 경계인 미세먼지(PM10) 80㎍/㎥에서 1단계 경보를 내리는 데 비해, 그르노블은 ‘보통’ 구간에서 ‘좋음’에 더 가까운 50㎍/㎥를 임계점으로 삼는다.

1단계 경보 발령 시 취하는 조치는 지자체에 따라 다른데, 그르노블은 이 역시 타 지역에 비해 엄격하다. 평상시 110㎞/h인 외곽순환도로의 제한 속도를 70㎞/h로 낮추고, 그 외의 모든 도로는 20㎞/h를 낮추게 되어 있다. 가령 평시에 제한 속도가 50㎞/h인 도로는 30㎞/h로, 30㎞/h인 도심은 아예 자동차 출입이 통제되는 식이다. 공원에서 바비큐 등이 금지되고 각 가정에서도 벽난로 사용 등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뜨며, 공공기관의 냉난방 온도도 조정된다.

물론 경찰이 스피드건을 들고 길에 좍 깔려 대대적인 단속에 나선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번 미세먼지가 심했을 때 정부가 재난문자를 보내 경고한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던 모양인데, 그르노블에서는 미리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만 문자로 통보를 한다. 대신에 시내 진입로에 설치되어 있는 전광판의 안내나 지역 언론, 동사무소의 게시판이나 관공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채널 등을 통해 각자 알아서 파악해야 한다. 나의 경우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이를 체감했다. 국외 출장을 갔다가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기오염 경보가 뜬 것을 모르고 90㎞/h로 운전하다 단속에 걸린 것이다. 비행기에서 막 내렸는데 경보가 떴는지 알 길이 있나. 전광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평시보다 차들이 천천히 다니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레나를 보고 싶은 마음에 방심한 모양이다. 물론 ‘몰랐어요’ 따위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저 사정을 설명하여 보통은 135유로(약 17만원)인 범칙금을 90유로(11만원)로 감면받을 수 있었을 따름이다. 돌아오자마자 뒤늦게 문자 알림 통보를 신청한 것은 물론이다.

1단계 경보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되거나 그럴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2단계 경보가 발령되는데,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각 차량에 부여된 6단계의 대기 환경 등급(Certificat Qualite de l‘air·CQA)에 따라 운행을 부분 혹은 전면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0등급은 100% 전기차와 수소차, 1등급은 천연가스차와 하이브리드, 2011년 이후 생산된 친환경 차량들이 해당한다. 몇 등급까지 운행을 제한하느냐는 대기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서 사람들을 헷갈리게(짜증나게) 하는데, 대체로 4등급 이하, 즉 2005년 이전에 생산된 노후 경유차량들은 길에 나오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 유럽인들은 차를 스스로 수리해가며 오래도록 사용하는 편인지라 20~30년 이상 된 차들도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상당수의 차량들이 대기오염 저감조치로 운행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이보다 훨씬 강력한 조치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대기질 악화 시의 한시적인 조치가 아닌, 연중 내내 차량의 시내 진입을 억제하는 정책이다. 이미 2017년 1월부터 시범적으로, 시내 중심가 전 구역에 차량 운행 제한구역(Zone a Circulation Res­treinte·ZCR)을 설정하여, 주중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소형 트럭이나 승합차 등 상용차 중에서 CQA 등급이 없는 차량의 진입을 금지해 왔다. 올해부터는 시내뿐 아니라 인근 마을 등 그르노블 생활권(프랑스 행정구역 ‘메트로폴’) 전역에 배기가스 저감구역(Zone a Faibles Emissions·ZFE)을 설정하고, 진입 제한을 CQA 5등급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전체 등록 차량의 5% 정도를 아예 차고에서 꺼내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ZFE는 그르노블뿐 아니라 프랑스 내 15개 지자체들이 실시하는 것이기는 하나 메트로폴 전역에 설정하는 것은 그르노블이 유일하다. 내년부터는 4등급까지, 3년 후인 2022년에는 전체 차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등급까지를 운행 금지할 계획이다. 최종적으로 2025년에는 2등급까지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레나 가족이 타고 있는 디젤 하이브리드를 포함해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의 절반이 교체되거나 차고에 고이 모셔져야 할 판국이다. 사실상 전기차와 수소차를 제외하고는 운행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최근 독일의 한 언론이 그르노블의 대기질 개선 노력을 취재하면서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식당 주인을 인터뷰했다. 1852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영업해온 전통을 자랑하는 이 식당의 매출이 현 시장 취임 이후 20% 이상 줄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식당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식사하러 오던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녹색 독재’가 그르노블시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킬링 필드’의 주역이었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붉은 크메르)와 그 지도자 폴 포트의 이름을 따서, 에릭 피욜 시장을 “폴 피욜”, 그 지지자들을 “크메르 베흐(녹색 크메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환경보호를 위한 이러한 정책들은 낡은 차를 몰고 생업에 종사하는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녹색당의 연정 파트너이기도 한 그르노블 좌파연합의 수장인 투쉐 의원은 “배기가스 저감구역”은 결국 “저소득층 배제구역”이라며, 목적이 좋을 수는 있어도 과녁을 잘못 잡았다고 힐난한다. 저소득층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가 나오지 않는다면 현 시장이 추구하는 환경정책은 “징벌적 환경주의”에 불과하며, 그르노블을 “녹색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급격한 환경 전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르노블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있다. 그르노블의 야당들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프랑스 시민 연대(Federation Francaise des Automobilistes Citoyens·FFAC)’ ‘분노한 이륜차 운전자 연맹(La Federation Francaise des Motards en Colere·FFMC)’ 등 전국 단위 조직들과 함께 반대 여론을 조직하고, 최근에는 마크롱 정부가 환경보호를 위해 추진한 유류세 인상 조치로 인해 촉발된 노란 조끼 시위대와도 연대하여 에릭 피욜 시장의 정책을 저지하려 애쓰고 있다.

그르노블 시장의 도전 성공할까
한국이라면 이런 불편 감수할까

하지만 네 자녀의 아빠이며 항상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현 시장의 의지는 확고한 듯하다. 정치 성향으로 따지면 정통 좌파인 사회당보다 오히려 더 왼쪽에 위치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가 “모든 변화에는 낙오자가 생기게 마련”이라는 발언까지 해가며 스스로의 정치 기반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노후 차량을 도로에서 퇴출시키고 환경친화적인 차량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차량 공유’를 통해 도로 위를 달리는 바퀴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시민들의 이동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지만, 차량을 소유하는 것은 친환경적인 도시 생활에 배치된다. 차량은 공유되었을 때 가장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교통부 장관 엘리자베스 보느에 따르면, 최근의 설문 조사에서 프랑스인의 75%는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일상의 이동(모빌리티) 습관을 바꿀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르노블 시장의 과감한 환경정책은 과연 시민들의 불편함과 야당의 반대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르노블시는 불리한 지형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대기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환경 문제에서만큼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는 이웃 나라를 둔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대기 환경 개선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필자 곽원철

[다른 삶]환경과 맞바꾼 편리…그르노블의 ‘녹색 독재’는 성공할까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했다. 외국계 기업의 국내 사업과 국내 기업의 해외 사업, 재벌 대기업 기획실과 스타트업의 프로젝트 팀장 등 다양한 업무를 오가다 2009년에 아무런 기약없이 훌쩍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늦둥이 어린 딸 레나와 함께 살고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