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이한열, ‘한 장’이 촉발한 기억의 증식

2019.06.05 15:36 입력 2019.06.05 22:10 수정

조제프 브누아 쉬베, ‘회화 예술의 발명(The Invention of the Art fo Drawing), 1791.      / 벨기에 그뢰닝 미술관 소장

조제프 브누아 쉬베, ‘회화 예술의 발명(The Invention of the Art fo Drawing), 1791. / 벨기에 그뢰닝 미술관 소장

그림의 기원에 대한 기원전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에 ‘부타데스’라는 옹기장이가 살았다. 그의 딸은 한 청년을 사랑했다. 하지만 청년은 곧 전쟁터로 떠나야만 했다. 딸은 등잔불을 밝혔다. 벽에는 등잔불빛이 만든 청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부타데스의 딸은 그림자 윤곽선을 따라 연인의 실루엣을 그렸다. 옹기장이 부타데스는 딸이 그린 실루엣 그림을 점토로 본떠 기와를 빚었다. 그리고 청년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기와를 지붕 위에 얹어 놓고 빌었다.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부타데스의 이야기는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조제프 브누아 쉬베, 장 밥티스트 르노 등 여러 화가들이 그린 부타데스의 이야기는 회화의 기원을 사랑에서 찾는 듯하다. 떠나는 연인의 그림자라도 붙들어보고자 하는 애틋한 욕망이 그림으로 형상화됐다. 부타데스의 그림을 바라보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시선은 좀 더 세밀하다. 데리다는 옹기장이 딸의 시선에 집중했다. 연인의 그림자를 그리는 부타데스의 딸은 청년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은 단지 청년의 그림자와 자기 손끝의 붓놀림일 뿐이다. 그녀(화가)는 붓질을 하는 순간에는 청년(대상)을 보고 있지 않는 장님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림에 대한 존 버거의 글에서도 데리다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존 버거는 “모든 예술가들은 그림 그리기가 (시선의) 왕복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이미지 비평집 <랑데부>(동문선)에 썼다. 철학자 데리다와 달리 직접 그림을 그렸던 존 버거는 장님이 될 수밖에 없는 화가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시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바라볼 것. 대상을 바라보는 강도가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면 동일한 정도의 에너지를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라봄의 절실함은 수도자의 고행을 떠올리게 한다. 강렬한 바라봄을 통해 인식된 기억에 대해 존 버거가 쓴 글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구원의 행위임을 함축하고 있다. 기억이 되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부터 구제되어 온 것이다. 잊혀지고 있는 것은 버림을 받아온 것이다. 만약 모든 사건들이 그것이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순간에 초자연적인 눈에 의해 시간을 벗어나 목격된다면, 기억하는 것과 잊혀지는 것 사이의 구분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억되는 것에 가까운 것이 되고, 그리고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잊혀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 되는 심판하는 행위로, 정의의 판결을 언도하는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열화당. 82쪽)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동료 학생인 이종창씨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 정태원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동료 학생인 이종창씨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 정태원

1987년은 구원받았다. 3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1987년 6월항쟁은 한 장의 사진으로 계속 목격되고, 기억된다. 외신 로이터통신 정태원 기자가 6월9일에 찍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다.

최루탄 가스로 시야는 혼탁했다. 시위 사수대의 진퇴에 맞추어 사진기자는 몸을 움직였다. 하늘로 향해야 할 통조림 모양의 최루탄 SY44가 장전된 경찰의 산탄총은 수평으로 조준됐다. 살상이 가능한 사격자세였던 것이다. 타타탁! 타타탁! 시위대 선두의 한 학생이 머리를 만지며 쓰러졌다. 답답한 방독면 안경 너머로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기자는 육감을 동원해야 했다. 저 정도 거리라면 이 정도로 초점 링을 돌리면 되겠구나 하는 수천, 수만 컷을 찍어본 노하우에서 체득된 육감이다.

모교 티셔츠를 입은 이한열의 축 처진 몸을 마스크를 쓴 동료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열사의 머리는 힘없이 땅을 향해 낙하하고 있다. 기자의 카메라 셔터 속도는 250분의 1초. 눈 깜짝할 사이보다 빠르다고 진부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짧은 순간, 뒷머리에서 흐르기 시작한 피는 열사의 뺨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정한 땅은 열사의 몸을 끌어당기고 있다. 동료는 추락하는 열사의 몸을 수직으로 일으켜 세운다. 전투경찰을 주시하는 마스크 위의 두 눈빛은 혼란스럽다. 원통함과 울분이 두려움과 뒤섞여 있다.

미켈란제로, ‘피에타’                                                                                                                                                               ⓒ  Stanislav Traykov

미켈란제로, ‘피에타’ ⓒ Stanislav Traykov

피에타(pieta).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말한다. 많은 예술가들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러한 미술 양식 또한 피에타로 불린다. 13세기 독일 수도원의 목조상에서 기원했다.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가 15세기 말에 완성한 피에타가 보존돼 있다.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고개를 떨군 상앗빛 마리아의 표정은 신비하다. 마리아는 한없이 슬프지만, 그렇게 한없이 슬퍼할 수만은 없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아들의 어머니는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기쁨과 인간 어미로서의 슬픔을 동시에 겪을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땅에 내려놓을 수 없었다.

쓰러지는 이한열의 사진 속에서 나는 피에타의 형상을 본다. 이한열과 예수는 수평의 구도로 땅으로 내려앉고 있다. 모든 죽음은 수평의 이미지다. 그리고 마리아와 이한열의 동료는 수직의 구도로 예수와 이한열을 붙들고 있다. 모든 생명은 수직의 이미지다. 시인 김광규는 생명과 죽음을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로 노래했다.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김광규의 시 ‘오래된 물음’이다.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흐르는 것, 떨어지는 것, 땅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죽음이다. 반면 생명은 솟아오른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땅으로 추락하는 이한열의 머리는 피에타의 예수 모습 그대로이다. 이한열의 동료 역시 마리아처럼 고꾸라지는 육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다만 피에타는 사건이 일어난 뒤의 상황이고, 정태원 기자의 사진은 심각하고 긴박한 순간을 보여준다. 수직과 수평의 힘이 대립하고 있는, 아직은 생사가 불확실해 보이는 상황인 것이다.

정태원 전 로이터 한국지사 사진부장(80)이 사진 다섯 장을 꺼내 보여주며 1987년을 회상했다. 이한열이 포착된 석 장의 사진과 하늘이 아닌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전투경찰, 나머지 한 장은 그가 사진 찍은 이한열의 모습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을 배경으로 시위하는 학생들의 사진이었다.

“박종철 열사도 고문 받아 죽었는데, 그때는 사진이 없었다. 그러나 이한열의 죽음은 사진에 포착됐다. 어느 누가 이 사진을 부정하겠는가? 외신기자가 찍었다는 것도 중요했다. 당시 정권은 언론을 검열했다. 하지만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라도 외신은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다음날 한 국내 일간지가 내 사진을 내밀었다. 그다음 날은 나머지 신문사들도 이한열 사진을 발행했다. (사진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의 허망한 죽음…. 나는 먼저 세상을 떠난 박종철 열사가 이한열 열사의 사진 속에서 부활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땅으로 추락하는 이한열 열사의 몸을 붙들고 있는 동료는 아마도 또 다른 이름의 박종철 열사가 아니었을까? 박종철 열사가 축 처진 이한열 열사의 몸을 붙들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한열아! 너는 나처럼 허망하게 죽을 수 없어!’

1987년 7월9일 최병수 작가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린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 김석구

1987년 7월9일 최병수 작가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린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 김석구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이는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에 다니던 이종창이라는 학생이었다. 이종창씨도 그날 시위 현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실려 간 곳은 그가 부축했던 이한열이 누워 있는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이종창씨는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졸업 후 그는 모교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그는 매해 5월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6월이 돌아오면 도서관에 걸리는 이한열의 대형 걸개그림 때문이다.

현장미술가 최병수 작가는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비통함, 분노, 애절함, 그 모든 것이 담긴 진정한 사진이었다. 최 작가는 사진을 판화로 만들어 유족과 학생들의 가슴에 새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밤새워 판화를 찍었다. 이한열 판화를 본 한 학생이 제안했다. 크게 만들자고. 그렇게 열사는 거인이 됐다. 가로 7.5m, 세로 10m의 광목에 새겨진 열사는 연세대 교정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동료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0년이 지나 연세대 이한열동산에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3m 높이의 이한열 동상은 역시 정태원 기자가 찍은 장면이다. 기념 동상을 만든 이 역시 ‘한열이를 살려내라!’ 대형 걸개그림을 그린 최병수 작가다. 땅으로 추락하는 이한열, 그리고 그를 붙들고 있는 동료의 모습은 그대로다. 다만 열사는 이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듯, 그의 머리와 몸에 별들이 총총히 아로새겨져 있다.

최병수 작가의 조각작품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최병수 작가의 조각작품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같은 해, 이한열의 모습은 영화에도 등장했다. 장준환 감독의 <1987>이다. 이한열을 연기했던 강동원은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찾아 위로했다. 아니 어쩌면 위로받은 것은 강동원이었을 것이다. 강동원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이유를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이한열기념사업회에 2억원을 남몰래 기부한 사실은 나중에 알려졌다. 이한열 열사를 기억하는 일을 돕고 싶었던 것이다.

공유된 기억은 증식한다. 옹기장이 부타데스의 일화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려는 욕망은 그림으로, 조각품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 이한열 열사에 대한 기억의 증식은 더 풍요롭다. 1987년 6월에 찍힌 이한열의 사진은 판화를 시작으로, 대형 걸개그림, 조각상, 그리고 영화로 부활했다. 존 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이한열은 구원받은 것이다.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려는 ‘사진은 史역사다’ 사진전이 열린다. 정태원, 황종건, 권주훈, 고명진…. 은퇴한 사진기자들이 옛 필름들을 다시 인화했다. 오는 10일부터 16일까지 강원도 영월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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