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베일 속 한성백제의 비밀 품은…도심 속 ‘고대사 보물창고’

2019.06.15 06:00 입력 2019.06.15 06:02 수정

서울 석촌동·방이동 고분군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사적 243호) 전경. 백제가 서울을 도읍지로 한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의 지배층 무덤군으로 ‘왕릉지구’로 불리기도 한다. 1910년대만 해도 이 일대에는 290여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도시개발 등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복원한 8기 고분을 중심으로 도심 속 공원으로 정비돼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사적 243호) 전경. 백제가 서울을 도읍지로 한 한성백제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의 지배층 무덤군으로 ‘왕릉지구’로 불리기도 한다. 1910년대만 해도 이 일대에는 290여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도시개발 등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복원한 8기 고분을 중심으로 도심 속 공원으로 정비돼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석촌동 3호분은 ‘고구려식’ 계단형 돌무지무덤으로 한성백제의 전성기 이끈 근초고왕 능으로 추정
493년 이어진 한성백제는 백제사의 핵심이지만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백제역사지구’에서 빠져
석촌동 고분 발굴 진행…문헌·고고학 등 통합적 연구로 한성백제 공백 메워 온전한 백제사 되찾아야

옛 무덤인 고분은 고대사 연구에서 ‘보물창고’라 할 만하다. 문헌기록이 귀한 상황에서 무덤 조성 당시의 물질문화는 물론 정신문화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정보를 품고 있어서다. 고분은 조성 주체자의 가치관, 특히 사후관을 보여준다. 혼례와 더불어 보수성이 강한 매장의례는 지속성이 유지되면서 주체세력에 따라 시대별·지역별로 뚜렷한 특성도 드러낸다. 특히 다양한 껴묻거리는 문헌자료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들, 무령왕릉 같은 백제 고분들, 천마총 같은 신라 고분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삼국시대를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거대한 현대도시 서울에도 고분들이 남아 있다. 1600여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역사문화의 생생한 현장이자, 시민들에겐 도심 속 쉼터이기도 하다.

■ 한성백제의 또 다른 상징

지난 11일 찾은 ‘석촌동 고분군’ 내 발굴조사 현장에서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윤정현 학예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백제시대 토기를 살펴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 11일 찾은 ‘석촌동 고분군’ 내 발굴조사 현장에서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윤정현 학예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백제시대 토기를 살펴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백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삼았다. 수도 위치에 따라 백제는 흔히 세 시기로 나누는데, 서울의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와 고구려에 밀려 내려간 공주의 웅진시대(475~538), 부여의 사비시대(538~660)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온조 세력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게 기원전 18년이니 한성시대는 백제사에서 절반을 넘는 493년간 이어졌다. 21명의 왕이 거쳐간 한성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도·강원도 일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고대국가로 자리매김했다. 한성백제는 백제사의 핵심적 시대이지만 고구려·신라와는 달리 역사문화상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문헌자료 부족과 함께 유적들이 훼손돼서다.

현재 서울의 한성백제 유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한강 이남, 주로 송파구 일대에 모여 있다. 왕궁터로 보이는 풍납토성(사적 11호)과 몽촌토성(297호), 석촌동 고분군(243호), 방이동 고분군(270호)이 대표적이다. 한성백제의 수많은 의문점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되는 풍납토성은 도심이라 전면적 발굴조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나마 몽촌토성·석촌동 고분군 일부가 발굴 중이고, 최근 경기도 하남·양평 등에서 새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다행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지배층 무덤이 모인 곳으로 왕릉지구로 불리기도 한다. 풍납·몽촌토성과 3㎞ 내외 떨어진 석촌동 일대에는 1910년대만 해도 290여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의 ‘석촌부근 백제고분군 분포도’에는 흙무덤 23기와 돌무지무덤 66기 등 89기의 고분이 기록돼있다. 경작지, 주택지로 파괴되던 고분군은 1970~80년대 도시정비사업에 따라 발굴도 이뤄졌다. 조사결과 움무덤(토광묘), 돌무지무덤(적석총), 독무덤(옹관묘), 돌로 흙을 덮은 흙무지무덤(즙석봉토분), 굴식돌방무덤(횡형실석실분) 등 다양한 무덤이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조사는 학술발굴이 아니라 도시정비를 위한 발굴이었고, 유적가치보다 개발논리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급하게 진행되는 등 부실했다. 고분군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지하차도가 당시의 의식수준을 잘 보여준다.

석촌동 고분군은 현재 8기가 복원·재현돼 있다. 외형상 돌무지무덤 4기, 움무덤 2기, 즙석봉토분 1기, 돌을 쌓은 석열이 안쪽은 무덤 테두리를 따라 원형이고 바깥은 사각형인 내원외방분 1기 등이다.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고분군에서 가장 북쪽의 고분이 3호분이다. 가장 크고 주목받는 고분으로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4m의 네모난 3단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3단으로 복원됐지만 원래 7단 정도로 추정된다. 주검은 3단이나 5단 정도에 안치됐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사 당시 이미 훼손돼 발견하지 못했다. 무덤 안팎에선 중국 동진시대(317~419) 도자기편과 백제 토기편, 금제 장식류 일부가 나왔다. 4~5세기에 조성된 3호분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3호분 남쪽으로 4호분·2호분이 같은 형식의 돌무지무덤으로 복원됐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이 세 고분의 내부구조는 조금씩 다르다. 3호분은 내부도 돌이지만 4·2호분은 흙이어서 외형만 돌무지무덤 형태였다. 3호분을 고구려식, 4·2호분을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복원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석촌동 고분군’의 고분 안팎에서 그동안 발굴된 금제 장신구(오른쪽)와 토기·와당 등 각종 유물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석촌동 고분군’의 고분 안팎에서 그동안 발굴된 금제 장신구(오른쪽)와 토기·와당 등 각종 유물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이 고분군이 주목받은 것은 백제 지배층 무덤이 고구려의 태왕릉·장군총과 같은 고구려계 묘제여서다. 이는 백제 건국세력이 고구려계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엔 백제 건국세력을 ‘고구려 유민세력’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이른바 ‘고구려 출자설’로 규정하지 않고 고구려처럼 부여와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분군 내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연결된 쌍분이자 남성·여성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1호분 인근의 최근 조사에서 여러 무덤이 연접돼 나타나고 있어 1호분도 연접된 무덤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고분군 가장 남쪽에는 즙석봉토분인 5호분이 있다. 내부조사는 하지 않고 흙 쌓는 방식만 조사한 결과 흙을 다져 봉분을 쌓고 그 위에 돌을 한겹 덮고 다시 흙으로 덮은 독특한 형식이다. 즙석봉토분은 가락동 등에서도 발견됐는데, 한 봉분 속에 여러 개의 나무널 등이 자리했다. 즙석봉토분을 놓고 학계에서는 고구려적 요소가 반영됐다는 학설과 토착민이던 마한의 전통이라는 학설이 엇갈리고 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몽촌토성 쪽으로 더 올라오면 역시 공원으로 조성된 ‘방이동 고분군’이 있다. 능선을 따라 굴식돌방무덤, 돌덧널무덤(석곽묘) 등 수십기의 고분이 존재한 곳이다. 방이동 고분군은 1973년 김모씨의 집 뒷산 언덕이 무너지면서 굴식돌방무덤(현재 복원돼 있는 1호분)이 드러나 발굴 계기가 됐다.

현재 정비된 고분은 8기로, 정문에 들어서서 왼쪽의 서쪽 언덕에 1·2·3·6호분 4기가,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 8·7·9·10호분 4기가 자리한다. 조사가 이뤄진 무덤은 1·4·5·6호분이며, 4·5호분은 복원되지 않았다. 3호분은 2016년 봉분 일부가 흘러내리면서 현재 한성백제박물관이 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성백제의 무덤으로 여겨지던 방이동 고분군은 정작 조사에서 신라 토기들이 나와 화제와 논란을 불렀다.

학계에선 지금도 백제냐, 신라냐를 놓고 견해가 부딪히고 있지만, 최근 3호분 조사결과 등에 따라 백제가 일부를 조성하고 이후 신라가 광범위하게 재활용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백제의 ‘잃어버린 절반’ 되찾아야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사적 270호) 전경.  권도현 기자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사적 270호) 전경. 권도현 기자

고구려·신라도 건국 초기 연구는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한성백제는 ‘지금도 논쟁 중’이라 할 만큼 유독 견해들이 엇갈린다. 고고학적 자료 부족과 더불어 그나마 있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놓고 해석이 달라서다. 교과서 등 대중적으론 주류 학설 중심으로 정리가 됐지만 학술적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상황은 다르다. 지난 2017년에 백제사 쟁점을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살펴보는 ‘한성백제사 다시 보기’란 콘퍼런스가 열렸다. 하루종일 진행된 콘퍼런스의 1주제가 ‘백제, 누가 언제 세웠나’일 정도다. 시조를 놓고 온조라는 견해부터 온조가 가공인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건국세력의 고구려계 여부, 한성백제 왕궁이 어디인가 등이 대표적이다. 앞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석촌동 고분군의 돌무지무덤, 당시 굴식돌방무덤의 전개과정을 둘러싸고 조성 배경과 주체세력, 시기, 순서 등에 대한 주장도 부딪힌다. 한 원로학자의 말처럼 ‘결정적 한 방’이 나오지 않으면 쉽게 끝나지 않을 논쟁이다.

그래서 관련 유적의 장기적·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중요하고, 현재 진행 중인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가 주목받는다. 한성백제박물관은 2015년부터 산하 백제학연구소 학예사들을 중심으로 고분군 내 1호분 옆 지역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 11일 석촌동 고분군을 찾았을 때도 뙤약볕 아래 조사가 이어졌다. 때마침 백제 토기와 중국 자기편이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치영 발굴조사팀장, 최진석·윤정현 학예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발굴조사에서는 한성백제 연구활성화를 자극하는 새 자료들이 속속 나와 학계 안팎의 관심을 받는다. 남북 100m, 동서 40m 규모의 발굴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연접되는 돌무지무덤이 무려 20여기 발견됐고, 더 확장되는 상황이다. 또 금제 귀걸이 등 각종 유물도 출토되고 있다. 정치영 팀장은 “표토를 50㎝ 정도 긁어내면 새 돌무지무덤의 석열과 점토부 등이 노출될 정도여서 향후 더 많은 자료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전문가들은 물론 지역 주민, 서울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낀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지구’에 한성백제 유적을 추가로 등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2015년 등재된 ‘백제역사지구’는 공주·부여·익산의 유적 8곳으로만 구성됐다. 백제사의 절반을 넘는 한성백제시대가 통째로 빠진 ‘반쪽 등재’다. 보다 온전한 백제역사지구를 위해 한성백제 유적의 추가 등재를 추진 중인 문화재청과 서울시, 송파구가 발굴조사 등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체계적인 발굴조사에 더해 전문가들 사이의 학술적 논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생산적 논쟁을 통해 한성백제의 전모를 학술적으로 보다 온전히 파악할 수 있어서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원로와 신진학자, 문헌학자와 고고학자 사이의 치열하고 뜨거운 논쟁은 한성백제 연구의 앞날에 희망을 가지게 하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최근 발굴조사와 기존의 발굴자료 검토에서 새로운 사실과 해석이 나오는 만큼 각 분야 백제 연구자들이 정보와 연구성과를 공유하며 학제를 뛰어넘는 대통합적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지금 석촌동·방이동 고분군은 역사문화 공원으로 정비돼 시민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는 육체적·정신적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학술적 연구성과가 뒷받침되는 역사문화 공간은 시민들의 보다 수준 높은 쉼터이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자원이다. 1600여년이란 장구한 시간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의 쉼은 특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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