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길에서 탄광에서…지배집단에 짓밟힌 이들의 피맺힌 절규 “단결하라”

2019.10.03 21:18 입력 2019.10.03 21:22 수정
김시덕 | 문헌학자

고이케 기코 ‘쇠사슬 무덤’ - 자유민권과 죄수노동의 기록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구마모토현 미쓰이 미이케 광산에서 일어난 노사 충돌 과정에서 회사 고용 깡패들에게 살해된 탄광노동자 구보 기요시를 추모하는 ‘고구보기요시군순난지비(故久保淸君殉難の碑)’. 비에는 굳건하게 악수하는 노동자들의 손이 그려져 있다. 어느 국가든 지배층의 압박에 맞서 피지배민이 생존권을 주장할 방법은 단결뿐임을 보여준다.  김시덕 제공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구마모토현 미쓰이 미이케 광산에서 일어난 노사 충돌 과정에서 회사 고용 깡패들에게 살해된 탄광노동자 구보 기요시를 추모하는 ‘고구보기요시군순난지비(故久保淸君殉難の碑)’. 비에는 굳건하게 악수하는 노동자들의 손이 그려져 있다. 어느 국가든 지배층의 압박에 맞서 피지배민이 생존권을 주장할 방법은 단결뿐임을 보여준다. 김시덕 제공

근대 일본 정부의 홋카이도 개척에 동원돼 길을 닦다 죽어간 죄수들…그들의 아픈 역사를 추적한 책
‘죄수도로’라 불린 지옥 같은 곳에서 굶어죽거나 탈출하다 살해돼 ‘쇠사슬 무덤’에 잠든 사람들

일본 백정계급의 신분 해방 운동에 호응해 일어난 조선의 ‘형평사 운동’…연대의 뿌리는 깊다
탄광 노동자 추모비에 새겨진 ‘악수하는 손’은 말한다…지배층의 압박에 맞설 무기는 ‘단결’뿐이라고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국토건설단을 조직, 전국 곳곳의 도로·철도 공사 현장으로 내몬 박정희 세력
제주 ‘5·16도로’는 ‘죄수도로’의 판박이…일본은 ‘그들’을 추모하는데 우리는 왜 지우려고만 할까

이 연재에서는 일본의 명저(名著)를 골라, 그 책에 담긴 일본의 중요 사건과 쟁점을 소개하려 한다.

연재 첫 회에 다룰 책은 고이케 기코(小池喜孝)의 <쇠사슬 무덤 - 자유민권과 죄수노동의 기록(鎖塚 - 自由民權と囚人勞動の記錄)>(岩波書店, 2018)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근대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일본인 죄수를 동원해 길을 닦고, 이들 죄수 가운데 수백명이 사망한 참사 전말을 수십년에 걸쳐 추적했다.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1)길에서 탄광에서…지배집단에 짓밟힌 이들의 피맺힌 절규 “단결하라”

근대 일본 정부가 자본주의화·제국주의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는 수많은 낙오자가 생겨났다. 정부는 이들을 국가에 헌신하지 못했으므로 처벌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남의 감자를 한 개 훔치거나 강의 물고기 한 마리를 몰래 낚고, 산속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는 가벼운 죄를 짓고도 엄벌주의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1885년 일본의 법무부 장관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가 “이러다가는 일본 국민의 절반이 감옥에 갇히겠다”는 우려를 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대 일본 지배집단의 가혹함은 홋카이도섬의 아이누, 타이완섬의 원주민과 한인, 한반도의 조선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국의 피지배민에 대해서도 가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9년에 내무부 장관 이토 히로부미는 죄수를 홋카이도로 보내 개척 사업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장기수를 홋카이도로 보내면 홋카이도 개발이 빨라지고, 일본 본토의 재정 부담과 치안 위험이 줄어들며, 이들이 출옥한 뒤에는 인구가 적은 홋카이도에서 정착·자립할 수 있으리라는 일석삼조론이었다. 그의 제안은 죄수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주자는 최소한의 인권적인 명분은 갖추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근대 일본 헌법을 집필하기도 한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는 홋카이도 행정에 대한 제안서인 <3현 순시 복명서(三縣巡視復命書)>에서, 이토 히로부미 제안에 담긴 최소한의 인권적 명분마저 폐기한 주장을 펼친다.

“그들은 원래 폭도들이므로 고통스러운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일반 노동자가 처자를 세상에 남기고 산과 들판에 묻히는 비참함과는 같지 않다. 또한 현재 중범죄인이 많아서 헛되이 국고를 지출하여 감옥 운영비를 늘리고 있는 실정이므로, 필요한 공사에 죄수들을 복무시켰다가 만약 그들이 견디지 못해 죽어서 감옥 수용 인원이 감소하는 것은, 정부 예산에서 감옥지출비가 부담이 된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는 실정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또한 일반 노동자를 부리는 것과 죄수를 부리는 것을 비교해보면, 홋카이도에서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대개 40전 이상인 데 반해 죄수는 겨우 하루 18전이다. 따라서 죄수를 사역시키면 도로 공사 비용 가운데 임금 부문을 절반 이상 삭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일거양득의 방책이다.”(<쇠사슬 무덤> 122~123쪽)

<일본근세행형사> 속 쇠사슬에 묶인 채 노역하는 죄수들 모습.

<일본근세행형사> 속 쇠사슬에 묶인 채 노역하는 죄수들 모습.

경남 진주의 ‘형평사 운동’ 기념비. 일본 백정계급의 수평사 운동에 호응해 일어난 신분해방 운동이다.

경남 진주의 ‘형평사 운동’ 기념비. 일본 백정계급의 수평사 운동에 호응해 일어난 신분해방 운동이다.

그리하여 홋카이도에는 개척에 동원될 죄수들을 수감할 아바시리 형무소가 만들어졌다. 이곳 죄수들은 서쪽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기타미를 지나 동쪽 아바시리까지 홋카이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도로를 비롯한 홋카이도 전역의 도로 공사에 동원되었다. ‘죄수도로(囚人道路)’라 불리는 이들 도로 공사에서는 수많은 죄수들이 영양부족과 중노동으로 사망했고,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던 죄수들은 대부분 간수들에게 살해됐다. 1891년에 천여명의 죄수가 동원된 기타미-아바시리 도로 공사에서는 2백~3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망치다가 살해당한 죄수는 쇠사슬과 밧줄이 묶인 채로 길가에 묻혔고, 이것이 훗날 지상에 노출되면서 ‘쇠사슬 무덤’이라는 이름을 낳았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가 무리해 홋카이도 관통 도로를 건설한 이유는,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는 것을 일본의 안보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계의 많은 인사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일본 안보에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응하여 홋카이도에 일본인 둔전병(屯田兵)을 정착시키기 위해 도로 건설을 서둘렀다.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자기 나라 죄수들을 동원해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고, 그들이 죽으면 철로변·도로변에 묻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부국강병이라는 국가 목표에 이바지해야 하며, 국가의 목표에서 낙오된 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논리. 이러한 국가의 논리는 현대 한국으로 이어져 선감학원, 국토건설단, 서산개척단, 형제복지원 등에서 재현된다. 대부분의 한국 시민은 “일반인”의 인권이 유린되는 데 대해서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자의적·타의적으로 일반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입장을 취했다. 현대 한국 정부와 일반 시민이 보여온 이러한 태도야말로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이어받은 식민 잔재다.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세력은, 군 미필자와 불량배를 소탕해 사회 발전에 공헌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민국 국토건설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1962년 일년 사이에 1만4000여명의 단원들은 전국 곳곳의 도로·철도 공사에 동원됐다. 이들이 변변한 건설장비도 없이 삽과 곡괭이만으로 건설한 강원도 정선의 운탄고도(運炭高道) 주변에는 지금도 이들이 묵던 숙소가 남아 있어 현대 한국 정부의 냉혹함을 증언한다.

국토건설단이 개통한 가장 유명한 길이자, 홋카이도의 죄수도로와 가장 비슷한 성격을 띤 것이 제주 5·16도로다. 범죄 혐의자 또는 형이 확정된 죄수를 동원해 난공사를 진행했다는 탄생 배경, 그리고 두 개의 섬에서 차지하는 두 도로의 지리적 중요성에서 홋카이도 죄수도로와 제주 5·16도로는 그 성격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홋카이도 죄수도로가 지나는 여러 마을에서는 자기 마을의 기틀을 닦아준 죄수들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반면, 제주에서는 5·16도로를 범죄자들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를 부정한다는 점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저거 5·16도로 이름 정말 빨리 바꿔야 돼. (중략) 저 도로를 누가 만들었는데? 깡패들이 만든 거 아니야”라는 택시기사의 발언을 전하는 기자의 글이 무겁게 읽히는 이유다(‘비마이너’ 2017년 8월24일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⑨] 국가가 버리고 짓밟은 삶, 그들의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

제주도를 남북으로 잇는 5·16 도로.

제주도를 남북으로 잇는 5·16 도로.

억울한 사람들이 숱하게 국토개척단에 끌려간 것처럼, 홋카이도 죄수도로 공사에 동원된 죄수들 가운데에도 비극적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쇠사슬 무덤>의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치부 사건(秩父事件)” 주모자들이다.

지치부 사건이란 1884년 11월, 1만명의 농민이 일본 정부의 학정에 반대해 동일본 지치부 지역에서 일으킨 무장봉기를 말한다. 지치부 사건은 근대 일본에서 일어난 최대의 무장봉기 투쟁이었다. 일본 정부는 1877년에 일본 서남쪽 끝 가고시마에서 옛 무사들이 일으킨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 준하는 수준으로 지치부 지역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농민군의 희생을 추모하여 세워진 ‘지치부 곤민당 무명전사 묘(秩父困民黨無名戰士の碑)’에는 “우리들 지치부 곤민당은 폭도·폭동이라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치부 사건으로부터 10년 뒤인 1894년에는 조선에서도 농민의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그러자 조선의 지배집단은 외국군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백성을 진압했다. 일본에서는 자국 지배집단의 명령을 받은 자국 군대가, 조선에서는 자국 지배집단의 의뢰를 받은 외국군이 자국 피지배민을 진압한 것이다. 이 시기의 일본과 조선에서 갈등의 최전선은 민족들 사이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시기의 진정한 위기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유사시에는 협력하는 청·조선·일본의 지배집단과 세 나라의 피지배집단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미쓰이 미이케의 탄광 만다갱. 이곳에서도 많은 죄수들이 강제노역을 하다 사망했다.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미쓰이 미이케의 탄광 만다갱. 이곳에서도 많은 죄수들이 강제노역을 하다 사망했다.

일본의 서쪽 끝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미쓰이 미이케 탄광(三井三池炭鑛)에서 동쪽 끝인 홋카이도 아바시리로 옮겨져 ‘죄수도로’ 건설에 투입된 죄수들 역시, 근대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위기가 어느 지점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라는 타이틀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미쓰이 미이케 탄광에서도 수많은 죄수들이 강제노역에 종사하다가 사망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아바시리로 옮겨진 것이다.

이 지역 감옥인 미이케 집치감(集治監)에서는 감옥 내부에서 곧바로 탄광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나 있었다. 미이케 탄광에서 사망한 무수한 죄수들은 이름도 없이 번호만 돌조각에 새겨져 ‘오무타 죄수 무덤’에 묻혔다.

1889년 미이케 탄광이 국가로부터 미쓰이 재벌로 민간 불하되고 갱도에 투입할 죄수들이 떨어지자, 회사는 일본인 하층 남성들에 대해 고용 사기를 쳐서 이곳에 데려왔다. 이윽고 중국·미국 등과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탄광에서 일할 일본인 남성이 모두 징병되자, 식민지 조선과 피점령지 중국 남성들이 대신 탄광으로 끌려왔다.

1891년 일본 홋카이도 ‘죄수도로’ 건설에 동원돼 쇠사슬에 묶인 채 노역하다 숨진 죄수들을 추모하는 공양비.  이승연씨  제공

1891년 일본 홋카이도 ‘죄수도로’ 건설에 동원돼 쇠사슬에 묶인 채 노역하다 숨진 죄수들을 추모하는 공양비. 이승연씨 제공

한국에서는 미이케 탄광을 비롯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설명을 애매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이들 시설에서 한국인 징용자들이 사망하기 전후로 일본인 죄수와 하층민들, 그리고 중국인 징용자들도 죽어갔음을 잘 말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곳 미쓰이 미이케 탄광에서 한·중·일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이 충돌하는 모습을 본다.

1945년의 패전 후, 미쓰이 미이케 광산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의 자치구”라 불릴 정도로 의식화된 노동자들과 회사·정부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1980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의 탄광 지대에서 일어난 ‘사북 사건’보다 20년 전인 1960년 3월29일에는, 탄광 노동자 구보 기요시(久保淸)가 회사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고 구보 기요시군 순난지비(故久保淸君殉難の碑)’ 아래에는 악수하는 손이 새겨져 있다. 피지배민이 살아남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단결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홋카이도의 소수민족 아이누인과 일본인 죄수, 식민지 타이완·조선의 하층민, 그리고 피점령지의 중국인은 모두 근대 일본 지배집단에 시달렸다. 식민지 조선과 피점령지 중국에서도 상층 집단은 상대적으로 일본 지배집단의 피해를 덜 입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적극적으로 일본 지배층과 협력했다. 20세기 전기에 일본의 백정계급이 신분 해방을 요구하며 수평사(水平社) 운동을 일으키자 조선의 백정계급이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피지배집단은 국제적 연대가 기본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과 일본의 진보적 시민들은 국제적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민족주의를 앞세우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한·일 양국 지배집단의 분열 전략에 놀아나지 않고, 한국과 일본 사회의 진짜 최전선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필자 김시덕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1)길에서 탄광에서…지배집단에 짓밟힌 이들의 피맺힌 절규 “단결하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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