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재앙 너머 미래를찾아서

2020.03.16 21:51 입력 2020.03.17 09:52 수정

신유물론과 흙의 상상력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30)재앙 너머 미래를찾아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묘책이 전혀 없는 문제로 ‘한 가닥 실로 달팽이집 꿰기’가 출제됐다. ‘밀랍 날개’로 탈출한 다이달로스가 이 난제를 풀었다. 실을 개미에 묶어 달팽이집을 돌아 나오게 했다. 단순한 생명체가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보다 나은 법. 개미는 군집을 할 때 더욱 놀라운 지혜를 번뜩인다. 분업으로 집을 짓고 먹잇감을 구하는가 하면 어느 곳에서든 도구도 없이 귀갓길을 절대 잃는 법이 없다. 심지어 뇌가 없는 아메바나 짚신벌레도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능만 굳게 믿어 자연 파괴와 생명 경시를 일삼았다. 물질을 과소평가하고 자원 남용을 부추겼다. 이제 우리는 자연의 신뢰를 잃은 듯 계속된 재앙을 맛본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로 눈을 돌려보자

1990년대 신유물론
인간중심 ‘유물론’ 비판
물질주의로 사고 전환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30)재앙 너머 미래를찾아서

무생물인 자연은 뇌 없이도 대단한 일들을 벌인다. 예를 들어, 지구의 대기권과 해양, 호수, 하천 같은 수권의 결합체계(coupled system)는 특정한 바람의 흐름을 만든다. 때때로 그 진행 방향이 예측을 벗어난 변덕쟁이 태풍과 허리케인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런 자연재해는 뇌와는 전혀 무관한 물질 자체의 작용으로 발생한다.

물질에 대한 사고의 전환은 이른바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는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유물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68혁명으로 197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지고,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언어에 관심을 두는 후기구조주의가 호평을 받았다. 그러면서 이전 사상들이 현실을 등한시한다는 비판과 함께 현실에 바탕을 둔 사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윽고 언어적 패러다임 대신 사회현상을 물질의 관계로 이해하는 신유물론이 등장했다.

‘신유물론’이라는 용어를 1990년대 중반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누엘 데란다(1952~)와 로시 브라이도티(1954~)였다. 영화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건축가, 철학자였던 데란다와 페미니즘 철학자인 브라이도티에 의해 이 용어는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모두 포함한 ‘물질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일깨웠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빗대어 다시 부각된 물질론이기 때문에 ‘새로운(new)’이라는 말을 유물론에 붙여 ‘신유물론’이라 했다. 하지만 패러다임에 있어 ‘신유물론’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은 유물론을 철저히 다시 읽도록 이끌며, 그것의 엄격한 마르크스적 규정으로부터 분리된다. (…) 푸코의 신유물론, 즉 들뢰즈에 의해 제안된 새로운 물질성은 (…) 페미니즘 이론을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시 브라이도티, <불일치의 패턴: 현대 철학에서 여성 연구>)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인간중심적이었다. 서구 휴머니즘의 전통 속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발전했던 증기기관이나 연료, 기계 등에 대해선 다루지도 않고 인간의 노동 분석에만 집중했다. 당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이성과 자유를 지닌 인간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사물과 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이 야생의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물질과 무관하게 전개되고 발전한다고 전제했다. 반면 신유물론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한 자연물과 장소뿐만 아니라, 인공물과 과학기술 등 인간 자체가 아닌 모든 사물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30)재앙 너머 미래를찾아서

질 들뢰즈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철학자 로시 브라이도티(위 사진)는 1990년 ‘신유물론’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신유물론은 사회현상을 물질의 관계로 이해했다. 들뢰즈보다 한 세대 앞선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아래)는 ‘흙’(무기질)에서 모든 물질들이 올바른 생태계(생명성)를 구성한다고 봤다.

질 들뢰즈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철학자 로시 브라이도티(위 사진)는 1990년 ‘신유물론’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신유물론은 사회현상을 물질의 관계로 이해했다. 들뢰즈보다 한 세대 앞선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아래)는 ‘흙’(무기질)에서 모든 물질들이 올바른 생태계(생명성)를 구성한다고 봤다.

인용문에는 브라이도티와 데란다에게 영향을 끼친 선대의 학자로 미셸 푸코(1926~1984)와 질 들뢰즈(1925~1995)가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들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을 주창한 브뤼노 라투르(1947~), 유물론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인 도나 해러웨이(1944~)와 행위자적 물질론을 전개한 철학자 카렌 바라드(1956~)를 비롯한 일군의 신유물론자들 저서에서 심심찮게 거론된다. 푸코와 들뢰즈는 대표적인 68혁명 학자로서 공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신유물론으로 표명되기 전에 30여년간 줄곧 시도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물질성은 현대 과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 아래 재규정되었고, 발전된 자본주의의 상호작용 안에서 비판적으로 탐구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대표작 <차이와 반복> 국내 번역판 표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대표작 <차이와 반복> 국내 번역판 표지.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이원론 처단·일원론 주장
일원론 가능케 한 공진화
‘인간·물질은 함께 변화’
생물·무생물 간 상호작용

신유물론의 가장 놀라운 용기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인간, 객체와 주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을 뜯어내고 그것을 인간중심주의의 원흉으로 지명한 점이다. 이원론은 자연 파괴와 자원 낭비의 죄목으로 몽타주를 만들어 수배됐지만, 그 범죄의 심연에는 그릇된 물질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으로만 구성된 집단이라 해도 거기엔 일말의 물질이 있기 마련이다. 삶은 상호관계 속에 있는 사물의 매개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도 물질 자체인 세계를 물질과 따로 떼어 사고하도록 북돋운 것은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었다.

신유물론은 근대적 이원론을 처단하고 일원론을 주장했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 없이 일체가 되는 경험을 간혹 한다. 예를 들어 명연주자가 악기를 다루거나 레이싱 드라이버가 경주용 코스를 달릴 때, 명필가가 일필휘지로 한시를 써 내려갈 때 각 신체와 물체는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저들이 이런 행동을 할 때 몸에 배인 습관처럼 움직이는 것이 관찰된다. 우리도 가끔씩 입고 있는 옷이나 안경, 컴퓨터 자판이나 마우스 등이 살갗이나 눈, 손가락 등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일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신유물론은 일원론의 핵심을 인간도 물질이라는 사실에 두고, 인간이 물질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한다고 했다.

인간과 물질은 한쪽만 일방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해 가는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거친다. 물질의 특성은 분자들의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데, 분자 배치를 바꾸면 목재도 딱딱하게, 금속도 물렁하게 할 수 있다. 인간도 분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10억분의 1m인 ‘나노’ 차원에서 배치만 살짝 바꾸면 물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동일한 법칙이 적용된다. 정통 진화론에서는 서로 다른 종의 개체가 ‘공진화’를 한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종들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른 생물 종의 상호작용을 받아들인다. 공진화는 생물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이 기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도 일어난다. ‘공진화’에서 비로소 인간과 물질의 일원론이 가능해졌다.

물질 간의 공진화에 있어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영향을 끼치는 ‘행위자(agency)’는 인간 행위자에서 비-인간 및 무생물에까지 확장된다. 그러므로 신유물론은 인간만이 우월한 주체라는 아집에서 벗어나 생물과 무생물의 배치와 배치물의 이해에 초점을 둔다. 공진화, 행위자, 배치를 통한 일원론이 과학, 철학, 지리학 및 페미니즘까지 포함하는 원리로 한창 전개되고 있다. 물질론적 일원론이 늘 변화하는 세계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질 들뢰즈·바슐라르는
‘무기질’서 생명성 발견
영혼도 흙도 단지 ‘물질’
우월함 없이 ‘상호 공명’

이 세계의 변화를 물질들의 상호작용과 공진화로 본다면 생명현상은 거기에 어떻게 관여할까? 이 물음은 생명이 있는 생물과 무생물의 공진화는 진정 가능할지에 대한 물음에 닿아 있다. 신유물론의 효시쯤 되는 질 들뢰즈는 우리 몸의 생명현상도 물질들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종의 습관이라 말한다.

심장, 근육, 신경, 세포 등에는 영혼이 있다고 해야 한다. (…) 이 영혼의 모든 역할은 습관을 붙이는 데 있다. (…) 물, 질소, 탄소, 염소, 황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을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인용문에 따르면 영혼은 심장을 비롯한 생물의 각 장기와 신경, 세포에 깃들어 있다. 분명 생물이 살아서 숨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뭔가 작용하는 행위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영혼이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에서 영혼은 분자로 구성되었으며 생명체에 습관들을 조여 매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습관이란, 이 책의 제목 ‘차이와 반복’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반복’을 말한다. 그렇다면 영혼이란 물질 분자로 구성되어 장기와 세포, 신경으로 하여금 계속 변하여 ‘차이’를 일으키며 ‘반복’하도록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영혼은 생명(물질)들에게 분자(물질)들이 상호작용해 공진화를 반복하게 한다. 거기엔 영혼이 더 우월하다는 이유로 내장과 신경, 세포에게 ‘갑질’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혼도 역시 물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에서 물질세계의 내용은 지속적인 공진화 과정이다. 물질이란 물질성의 연관을 맺는 연속 부분들로서 항상 변화하는 세계에서 상호 영향을 끼친다. 생명현상도 그 안에서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는 질소가 ‘행위자’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탄소가 또 그렇게 되어 번갈아 작동한다. 무기질에서 생명성을 발견한 또 한 사람을 든다면 들뢰즈보다 한 세대 앞선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일 것이다. 그는 ‘흙’에서 모든 물질들이 “올바른 생태계”를 구성한다고 했다. ‘흙’을 통해 암석, 퇴비, 광물 같은 무기질이 유기질과 서로 작용해 ‘상호 공명’되는 배치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기계와 공진화 앞둔 지금
신유물론이 절실한 이유

이쯤에서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 아담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언명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히브리어로 ‘흙’을 뜻하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장 19절)라는 명이 주어졌다. ‘흙 인간’은 채소와 과실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채소와 과실은 원래 신이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땅이 그 열매를 맺도록 위임한 것이었다. 이후 식물을 ‘흙 인간’이 땅과 공진화해 경작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아담의 후손 아브라함은 이런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흙과 같은 나”(‘창세기’ 18장 27절)라고 고백한다. 그 점에서 바슐라르가 말한 ‘흙(땅)의 상상력’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물질과의 울림인 ‘상호 공명’은 나는 ‘흙’이라는 겸허한 자각 속에서 사회와 국가, 세계와의 어울림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다른 존재와 달리 특별하다는 순진한 자존심만으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은 진화하는 존재이고, 특히 현대에는 기계와 함께 진화한다.(브루스 매즐리시, <네 번째 불연속: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기계와의 공진화를 목전에 둔 우리에게 신유물론은 절실하다. 이 세상이 딱딱하게 굳어진 흙덩이가 아닌 탱탱하고 보들보들한 살결로 공진화되기를 꿈꿔 본다. 30회의 연재를 마칠 시간이다. 파국 이후,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그 의미를 곱씹어 보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필자 김동훈

서울대 서양고전학협동과정에서 희랍과 로마 문학 및 로마 수사학을 공부했고, 현재 고려대 대학원에서 플라톤과 키케로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 철학아카데미, 푸른역사아카데미 등에서 라틴어 원전 강독 및 그리스어·라틴어를 강의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인문 분야 화제의 방송이었던 ‘별별명언’을 진행했으며, <별별명언: 서양 고전을 관통하는 21개 핵심 사유> <브랜드 인문학> 등을 출간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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