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소비되는 ‘극복 서사’

2021.04.16 16:23 입력 2021.04.16 16:24 수정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박수 쳐주면 안될까요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 자주 등장하는 ‘고통의 오락화’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극복’ 서사를 바탕으로 감동을 연출한다. 그 속에서 당사자의 고통이나 취약점은 무시되기 일쑤다. (위쪽부터) Mnet <킹덤: 레전더리 워>, MBC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 편>, SBS <정글의 법칙>의 한 장면.  해당 프로그램 캡처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 자주 등장하는 ‘고통의 오락화’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극복’ 서사를 바탕으로 감동을 연출한다. 그 속에서 당사자의 고통이나 취약점은 무시되기 일쑤다. (위쪽부터) Mnet <킹덤: 레전더리 워>, MBC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 편>, SBS <정글의 법칙>의 한 장면. 해당 프로그램 캡처

4월8일 방영된 <킹덤: 레전더리 워>(Mnet)에서 ‘더보이즈’는 수중 촬영을 진행했다. 일부 멤버는 물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움직이지만, 일부 멤버는 입수와 동시에 두려워하다 눈물을 보인다. 다른 멤버들의 격려나 조언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본인도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연 프로그램의 특성상 시간이 촉박하고, 연차가 낮고 나이가 어린 아이돌이 현장 세팅의 변경을 요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하는 그림을 얻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한몫했으리라. 결국 한 멤버가 자원해 물속에 함께 들어가고, 촬영을 힘겹게 이어간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막상 무대 활용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진보다, 고난을 견디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서사였을 테니까. 배우 염혜란은 상반기에 종영한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2020~2021, OCN)에서 물 공포증을 ‘이겨내고’ 수중 촬영한 일화를 들려준다. 제작진이 정 안 되면 대본을 바꾸겠다고 하자 염혜란의 배우자가 “당신이 배우라면 약을 먹고서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염혜란은 용기를 내 수중 촬영에 성공했다. 염혜란의 ‘프로 의식’이 빛나는 대목이지만, 나는 쉽게 감동에 빠지지 못하고 덜컹거렸다. 이건 ‘아니 근데’니까. 아니 근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죠? 아니 근데… 꼭 극복해야만 하나요…?! ‘극복’의 엔터테인먼트화에는 크게 두 갈래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재미로 소비하는 윤리적 문제, 또 다른 하나는 ‘극복’에 담긴 정상성 및 자기계발 담론이다.

물에 빠지고 높은 곳서 뛰어내리는
출연자들의 공포를 볼거리로 활용
극복이 아니라 그저 견디도록 종용
실재하는 고통은 배려하지 않아

먼저 ‘고통의 오락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때 오락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것뿐 아니라 실재하는 고통에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감동적으로 연출하는 방식, 스펙터클(시각적 쾌락의 요소, 볼거리)로 소비하는 것 또한 포함한다. 예능에서 재미는 다양한 요소의 협업에서 발생한다. 연출, 자막, 웃음소리 및 출연진의 반응, 배경 음악, 컷 편집 등이 합쳐져 어떤 것이 재미있는지, 감동적인지, 혹은 웃긴지 결정한다. 이 프레임 안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취약점은 얼마든지 갖고 놀아도 되는, 웃기는, 감상해도 되는 대상으로 배치된다. 앞서 예로 든 물 공포증과 함께 또 자주 등장하는 것이 고소공포증이다. <정글의 법칙> <진짜 사나이> <런닝맨> <무한도전> 등 숱한 예능에서 출연자들이 물에 빠지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 이성을 잃고 물에서 허우적거리거나 울부짖는 장면이 시청자에게 볼거리로 던져진다. 공포와 웃음의 비율을 잘 맞출수록, 즉 ‘제삼자가 보기에’ 재미있는 반응일수록 시청률은 올라간다. 시청자가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출연자에게 호의적인 아이돌 리얼리티에도, 번지점프를 하거나 놀이기구를 타는 기획이 빠지지 않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멤버는 번지점프대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떨거나, 빌다 못해 절까지 하지만 결국… 뛰어내린다. 허공에서 나부끼는 마음이야 어떻든 감동적인 배경 음악이 깔리고, 내려온 아이돌은 긍정적인 태도로 인터뷰해야 한다. 드물게 포기하고 내려오는 경우 겁쟁이거나, 팬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프로 의식이 없어 예능을 망친 것처럼 몰아가니 별수 없었을 것이다.

알레르기 있는 음식 ‘먹방’ 성공은
두려움을 극복해낸 업적으로 여겨
알레르기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낮은 감수성 보여줘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차근차근 접근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결국 극복하는’ 결말을 정해두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사람을 몰아넣는다. 극복이 아니라 그저 견디도록 종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고통이나 취약함은 배려나 공감의 대상이 아니다. 입맛에 맞게 즐길 수 있고, 원활한 진행과 방송의 재미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된다. <정글의 법칙>은 이러한 안전의 한계선을 시험하며 좀 더 아슬아슬한 영역을 건드려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평소 벌 알레르기가 있는 김병만이 콩가 개미에 물려 식도까지 부어오르며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거나, 벌에 쏘여 근육 경련을 일으킨다. 배우 이필모는 지푸라기를 모으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쓰러진다. 김병만의 부상까지 발생했던 해당 방송분에는 “그들 몸에 새겨진 상처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자랑스러운 생존의 훈장”이라는 해설이 더해져 시청자의 반발을 샀다. 막을 수 있었던 인재와 그로 인한 부상을 감동과 명예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덜 익힌 갑각류에 알레르기가 있는 이기광이 긴장한 채 코코넛 크랩 찜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다행히 이상이 없었고, 이기광은 어렸을 때 먹고 위험해진 후 태어나 두 번째 먹는 것이라며 신기해한다. 이 장면의 클립 제목은 “갑각류 알레르기 극복? 이기광의 코코넛 크랩 찜 먹방 성공 선보여”이고, 크랩을 먹는 장면에는 ‘알레르기도 맛도 괜찮은 듯?’ ‘갑각류 정복’이라는 자막이 뜬다. 실제로 많은 알레르기 질환 보유자가 배려 없는 강요로 위험에 노출되는데, 마치 알레르기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먹어보면 ‘생각보다’ 괜찮아서 극복할 수 있다는 듯이.

러시안룰렛이라도 보는 양 조마조마했다. 신속한 응급처치가 어려울 수 있는 상황에서, 알레르기 반응 이후 처음 먹어보는 갑각류를 꼭 먹어야 했을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출연자의 몸과 상태를 카메라 앞에 다 드러내야 했을까? <정글의 법칙> 속 이러한 장면들은 알레르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감수성과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질적인 반응을 믿지 않고, 가능한 한 괜찮은 선까지 ‘테스트’하려고 하며(먹어봐! 먹어봐!), 얼마나 심한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알레르기 반응을 흥미진진하고 긴장되는 볼거리처럼 다룬다. 이것은 스너프 필름(실제의 잔혹한 살인, 신체 훼손 행위 등을 찍은 영상물)과 얼마나 다를까? 2021년에 방영 중인 <윤스테이>는 손님의 알레르기 정보와 비건 여부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배려하여 음식을 대접한다는 점에서 조금 나아진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손님을 ‘까다로운’ 정도로 보도하는 기사나, 준비하는 처지의 어려움을 부각하는 연출은 역시 알레르기가 없는 상태를 ‘정상적’인 기본값으로 두는 시선을 드러낸다. 다양한 층위의 다름은 특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번거롭고, 유난스러운 것’으로 취급받는다.

특정 조치 필요한 ‘다름’ 인정하고
이들을 위한 서비스 확충하는 대신
관습적으로 극복을 다짐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 영역으로 축소

논의는 이제 알레르기를 거쳐 ‘정상성 및 자기계발 담론’으로 넘어왔다. 한국인은 극복 서사를 너무 좋아한다. 뭐든 극복했다고 하면 냅다 감동할 준비를 하고, 또 무엇이든 극복하라고 등을 떠민다. 인내와 의지라는 도움닫기를 거쳐 프로 의식 또는 부단한 노력이라는 지렛대로 고난을 ‘극복’하는 서사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 차별, 알레르기, 트라우마, 질병, 장애마저도 극복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착각은 훼손과 결핍 없는 어떤 온전한 ‘정상성’ ‘기본값’에 대한 집착과 긴밀하다.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고, 특정한 조치가 필요한 다름을 인정하고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확충하는 대신 개인의 극복을 통해 정상성으로 편입하기를 권유하는 사회. 무섭거나 어렵거나 힘들면 하지 말라는 말보다, 그냥 하라거나, 이겨내니까 별것 아니지 않냐는 말의 볼륨을 더 크게 키우는 미디어.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길보라 감독이 쓴 <반짝이는 박수 소리: 또 다른 언어, 수어로 말하는 사람들>(한겨레출판, 2015)은 청각장애인 부모를 ‘손상과 결여의 의미로서의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수화 언어와 농문화를 지닌 사람’으로 해석한다. 또한 넘쳐나는 장애 극복 서사가 어떻게 장애인과 그 가족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지 이야기한다. 장애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구별 짓기와 차별을 없앨 때 진정한 의미의 해방(극복이 아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관습적으로 극복을 다짐하고 권유할 때, 그것이 무엇을 위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의 취약점, 장애,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점, 하다못해 성격이나 말투까지… 어쩌면 어떤 것은 영영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약점을 일일이 극복하기보다, 곧장 웃음거리가 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도록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과 감수성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일곱 번 넘어져도 왜 여덟 번째 일어나지 않냐고 다그치고, 남이 흘리는 피가 웃기다고 박수 치는 세상에서 이제 서로의 깨진 무릎을 들여다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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