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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환경 보호를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을까

2024.03.25 22:00 입력 2024.03.25 22:02 수정

‘환경의 소중함’ 마음에 품기

[인스피아]어떻게 하면 환경 보호를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을까

콘크리트 도시가 만들어낸 단절
자연과 교감의 공간은 점차 축소
생태에 제대로 주목할 줄 모르고
존중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없다

죄책감 없이 자행한 자연 파괴 반성
새들의 노랫소리를 악보로 채록
나비에 관심·사랑을 쏟으며 탐미
자신과의 연관성을 깨닫는 순간들

인간과 자연의 연결고리를 복원
통증을 느끼고 경각심을 가질 때
자연은 돌아와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지난 6일 장년층이 중심이 된 ‘60+기후행동’ 등은 “(정부가) 노년층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저버렸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는 주로 저소득층, 노인 등 취약계층에게 가혹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는데요. 인간뿐 아니라, 특히 기후변화에 취약한 동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멸종할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도 최근 발표되었습니다.

기후위기는 실로 중대한 문제고,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문제가 시급한 건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아 별다른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그 소중함을 구체적으로 느껴보지 못한, 사랑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애틋함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 ‘환경’은 어쩌면 교과서나 신문에 찍혀 있는 딱딱한 글씨, 혹은 청정수역과 함께 등장하는 광고 캠페인 문구에 불과하죠.

들판에서 어릴 적 맘껏 뛰놀아본 경험도 없고, 맨발로 물고기와 놀고, 손바닥만 한 곤충에 쫓기고, 수십가지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경험도 없습니다. 설령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귀 기울이고 응시하는 법을 배울 여유가 없었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취급을 받지도 못했죠. 그렇다고 할 때 “환경을 보호하자”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케이크를 먹어본 적도 없이 관념으로만 배운 사람이 상상 속의 케이크를 지키려는 것처럼요.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수많은 것들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잃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연을 가깝게 느끼고 다시 그 소중함을 체감할 수 있게 될까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환경보호를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자연과 나의 연결고리

오늘날 과학은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18~19세기엔 취미가 ‘과학’인 아마추어 자연 탐구가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분류학의 창시자인 칼 린나이우스(1707~1778) 역시 <자연의 체계>를 출간했을 때 20대 아마추어 탐구자였고요. 하지만 오늘날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에 눈과 귀를 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류학자인 캐럴 계숙 윤이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죠.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쓴 캐럴 계숙 윤은 오늘날 자연, 과학과 대중이 멀어진 현실이야말로 환경파괴의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직접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신 모든 것을 전문가에게 맡기면서, 죄책감 없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는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며 “생명의 세계는 우리와 너무 멀어졌고 너무나 무관해 보인다”고 하죠. 애초에 자연을 관찰하고 가깝게 느낄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매년 플로리다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우림이 파괴된다고 해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반응하게 된다는 거죠.

윤은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서 18세기 이후 오늘날까지의 분류학의 역사를 살피며, 처음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자연 분류법이 어떻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사람들의 삶, 직관과 동떨어지게 되었는지를 짚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최신 분기학의 분류에는 심지어 ‘물고기(어류)’라는 종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분기학자들에 따르면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을 또는 시끄러운 모든 포유류를 통합적인 단일 분류군으로 묶을 수 없듯이”, 다양한 진화적 배경을 지닌 수중생물을 하나의 분류로 묶을 수 없다는 거죠.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물고기라는 종류를 인식해온 것에 주목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물고기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물고기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캐럴 계숙 윤은 이런 종류의 본능적인 자연에 대한 감각을 ‘움벨트(Umwelt·환경, 주변세계)’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나와 외부 세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감각이죠. 저자는 이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물고기’가 분류상 사라진 것이 오늘날 무너진 움벨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이 책에서 과학의 최전선 성과와는 별개로, 더 많은 일반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에 관심을 갖고 움벨트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움벨트, 즉 자연과 우리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은 어쩌면 통각이 사라진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요. 아픔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경각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자연을 둘러싼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새의 노래를 악보에 담은 노인

들리나요, 새들의 노랫소리<br /><야생 숲의 노트> 중 노래참새의 노랫소리를 악보로 청음한 것. 프란츠 제공

들리나요, 새들의 노랫소리
<야생 숲의 노트> 중 노래참새의 노랫소리를 악보로 청음한 것. 프란츠 제공

우리가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되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의 무엇에, 어떻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야생 숲의 노트>(1892)는 아마추어가 어떻게 마음을 담아 자연을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흥미로운 기획입니다. 이 책을 쓴 시미언 피즈 체니는 19세기 미국의 시골 마을에 살며 수십년간 성가대 지휘자, 성악 교사를 했던 숲과 새의 아마추어 애호가인데요. 어느 날 그는 문득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엉뚱한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꼭 악기로 연주하는 것만이 음악일까? 새도 음악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요.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부터 죽을 때까지 수년에 걸쳐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악보에 옮겼습니다. 실제 이 조그맣고 단단한 책에는 수십종 새들의 모습과 노랫소리의 묘사, 악보가 재미나게 담겨 있습니다.

그의 채록은 ‘포켓몬 수집’ 같은 간편한 느낌은 아니고요, 낯선 존재를 향해 마음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인상적입니다. 왜냐면 19세기에는, 당연하지만 유튜브도 간편한 녹음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몇년 동안 어떤 새가 우는 것을 기다리기도 하고, 또 오늘은 이렇게 울었는데 또 다른 날엔 리듬이 달라진 새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버전을 적어넣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버전의 악보가 담긴 새는, 그 이름도 명가수다운 ‘노래참새(song-sparrow)’입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노래참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다양한 버전의 악보들을 이 책에 싣습니다. 그리고 노래참새는 사람에게 살가운 편이라 마치 말을 하듯 가까이서 지저귀기도 했는데요. 저자가 이따금 휘파람을 불어 호응하자, 여러 날 동안 오후에 찾아와 같은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또 휘파람 소리를 듣다가 떠났다고 하네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유튜브에서 노래참새의 울음소리를 틀어두고 있었는데요. 노래를 가만히 듣다보니 저도 언젠가, 의식하지 않은 새에게 자주 들은 종류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노래참새 혹은 다른 새들의 속삭임을 일상적으로 그저 흘려보낸 것일까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새의 소리를 단순히 배경음이 아닌 음악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요, 저자는 새 전문가나 과학자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도시의 아마추어 ‘나비 사랑꾼’

대만 작가 우밍이가 쓴 <나비 탐미기> 표지(왼쪽)와 캐럴 계숙 윤이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 표지. 시루·윌북 제공

대만 작가 우밍이가 쓴 <나비 탐미기> 표지(왼쪽)와 캐럴 계숙 윤이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 표지. 시루·윌북 제공

<야생 숲의 노트>만으로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콘크리트 도시에서 무슨 자연을 관찰하라는 거야?’

실은 저도 위의 책을 덮으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시미언 피즈 체니처럼 수십종의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들을 수 있는 19세기의 미국 숲속 오두막에 살지 않고, 대부분이 여백 없이 콘크리트벽에 둘러싸인 대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민으로 살아가며, 자연에 주목하고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작가가 있습니다.

<나비 탐미기>를 쓴 대만 작가 우밍이. 나비 학자도 아니고 화가도 아니지만 나비에 대한 탐미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나비 탐미기>를 쓴 대만 작가 우밍이. 나비 학자도 아니고 화가도 아니지만 나비에 대한 탐미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대만 작가 우밍이가 쓴 <나비 탐미기> 역시 나비 전문가도, 그림 전문가도 아닌 ‘아마추어’ 작가가 나비를 ‘탐미(관찰)’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 그림 에세이입니다. 위에도 간단히 소개했듯, 이 책이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19세기의 고즈넉한 미국 시골 숲에 살았던 시미언 피즈 체니와는 달리 콘크리트숲 속인 대만의 타이베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죠. 대부분의 우리들처럼요.

그는 대도시의 아마추어 나비 사랑꾼으로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우리 주변엔 여전히 생물들이 많지만 대체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모를 뿐이라는 점이고요. 둘째는, 다만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도심 속 공간은 실제로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저자는 도시에 살면서도 나비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험회사 영업사원인 친구가 곤충을 관찰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저자가 도와준 에피소드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친구가 ‘예쁜 나비를 관찰하고 싶어도 기껏해야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곤충이라곤 개미와 바퀴뿐’이라고 한탄하자, 우밍이는 그만한 마음의 준비와 주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죠. 그는 이 책에서 “사실 우리는 사람을 마주하는 데는 익숙해도 다른 생명체를 마주하는 일은 서툴다”며 “그래서 바로 옆에 곤충이 있어도 그들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죠. 이는 마치 도심의 만원 지하철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 친구의 모습을 뒤통수만 보고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진데요.

심지어 주변에 곤충이 있어도 함부로 거칠게 움직이면, 곤충들은 금세 자취를 감춰버리고 맙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나비의 눈높이”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저자는 이 책에서 나무 꼭대기를 좋아하는 대반검은별작은부전나비를 소개하며, “그녀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 우리의 눈높이에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라며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려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면 3~5㎝의 화려한 보석들을 볼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절대적인 나비의 터전’ 자체가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합니다. 산길이 조금이라도 넓은 곳이면 바닥에 시멘트를 바르고 천막을 치고 관광지를 만들기 때문에 나비들의 먹이가 사라지고, 서식지가 빠르게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나비에게 제대로 주목할 줄 모르고, 그들을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의 공존은 실패하고 있고 그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만큼 도시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밍이는 결과적으로 “생태문학은 그저 종이 위에 끼적이는 것으로 끝나는 문학이 아니”며 “심지어 때로는 격정적인 행동이 되기도 한다”면서 ‘나비를 존중하며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급진적인 자연보호의 첫걸음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그들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죠.

맺음말

<야생 숲의 노트>와 <나비 탐미기>엔 어떠한 숫자도 그래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새를 사랑하는 이야기, 나비를 사랑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어떤 캠페인 구호보다도 강렬하게, 주변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고 나서 집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틈틈이 자꾸만 산책의 반경을 넓혀갔고 새로운 새와 곤충의 이야기들을 조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콘크리트 도심 안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친구를 찾기 위해 길을 잃다보면 다른 얼굴과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소가 더 적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그것이, 진심으로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인스피아]어떻게 하면 환경 보호를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왼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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