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명승 10곳 그린 19세기 미공개 실경산수화 발굴·공개

2024.05.07 14:48 입력 2024.05.07 19:59 수정

‘관북십경도(關北十景圖)’ 12폭 병풍…현존 관북명승도 중 최대 작품

전문가들 “조선후기 회화사·실경산수 연구 귀중 자료…작품 수준 높아”

전윤수 대표 “개인 소장품이며, 학계·미술애호가에 알리고자 첫 공개”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자 함경도 명승·명소 10곳을 그린 실경산수화와 해설로 구성된 19세기 후반 12폭 병풍 ‘관북십경도’가 7일 공개됐다. 작품 전체 크기는 가로 519.6㎝, 높이 230㎝, 각 폭 화면은 가로 31㎝ 안팎, 세로 169㎝-다. 전윤수 더프리포트 대표 제공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자 함경도 명승·명소 10곳을 그린 실경산수화와 해설로 구성된 19세기 후반 12폭 병풍 ‘관북십경도’가 7일 공개됐다. 작품 전체 크기는 가로 519.6㎝, 높이 230㎝, 각 폭 화면은 가로 31㎝ 안팎, 세로 169㎝-다. 전윤수 더프리포트 대표 제공

인문지리적으로 관북(關北) 지방이라 불리는 함경도의 명승·명소 10곳을 그린 19세기 미공개 실경산수화 ‘관북십경도(關北十景圖)’가 처음 공개됐다.

‘관북십경도’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작인데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관북 10경도 가운데 최대 규모의 작품이다. 12폭 병풍으로, 짜임새 있는 구도와 정교한 세부 필치 등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조선시대 실경산수화는 물론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경산수화는 제작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적 정황을 시각적으로 담아내 역사적·학술적 의미도 크다. ‘관북십경도’는 명승 10곳을 그린 10폭과 명승의 역사적·인문지리적 해설을 기록한 화기(畵記)이자 기문(記文) 2폭으로 구성됐다. 제작 연대·화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기문과 화면 내용, 표구형식 등을 통해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제작 당시 최북단 국경지역에 대한 정보,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있다.

‘관북십경도’는 미술품 수장고 전문업체인 더프리포트(The Free Port) 전윤수 대표(전 중국미술연구소 소장)가 7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전 대표는 “‘관북십경도’는 개인소장품으로, 최근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학술적으로 소중한 미공개 작품’이라는 감정·분석 평가를 받아 널리 알리고 공유하기 위해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 대표는 미술사를 공부한 중국미술 전문가로, 일본에 유출된 조선시대 지석(誌石·죽은 이의 이름·이력 등을 새겨 무덤 앞에 묻는 돌판) 등을 환수해 국립고궁박물관·국립광주박물관·한국국학진흥원 등에 기증해 주목받기도 했다.

‘관북십경도’ 제1폭에서 제6폭. 함경도의 유명 자연·문화 경관을 기문(1폭)을 시작으로 학포, 국도, 석왕사, 도안사, 성진진 순서로 담아냈다.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제1폭에서 제6폭. 함경도의 유명 자연·문화 경관을 기문(1폭)을 시작으로 학포, 국도, 석왕사, 도안사, 성진진 순서로 담아냈다.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제7폭에서 제12폭. 칠보산과 창렬사, 무이보, 용당, 괘궁정을 차례로 그리고 마직막 제12폭은 기문을 실었다.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제7폭에서 제12폭. 칠보산과 창렬사, 무이보, 용당, 괘궁정을 차례로 그리고 마직막 제12폭은 기문을 실었다. 전윤수 제공

이번에 공개된 ‘관북십경도’는 비단 위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19세기 말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체 크기는 너비 519.6㎝, 높이 230㎝의 대작이다. 각 폭 화면은 가로 31㎝ 안팎, 세로 169㎝다. 화면의 폭이 좁고 세로로 긴 것은 이 시기 병풍그림의 특징 중 하나다. 워낙 대작이라 공공 건물 등 규모 있는 공간에 배치돼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북십경도’에 그려진 관북(북관)지방의 명승은 저마다 빼어난 경치와 유적 등 자연·문화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안변의 학포(鶴浦)와 국도(國島)·석왕사(釋王寺), 정평의 도안사(道安寺), 길주의 성진진(城津鎭), 명천의 칠보산(七寶山),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경흥의 무이보(撫夷堡), 경원의 용당(龍堂), 갑산의 괘궁정(掛弓亭)이다.

‘관북십경도’ 가운제 제11폭(왼쪽)은 ‘괘궁정’을 그렸다. 화면 세부를 보면, 상단의 높은 산봉우리는 백두산을, 그 아래 푸른 색의 연못은 천지를 표현하고 있다.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가운제 제11폭(왼쪽)은 ‘괘궁정’을 그렸다. 화면 세부를 보면, 상단의 높은 산봉우리는 백두산을, 그 아래 푸른 색의 연못은 천지를 표현하고 있다. 전윤수 제공

제1폭은 학포 등 5곳의 기문이며, 제2폭은 ‘학포’란 제목 아래 수려한 자연경관의 학포를, 제3폭은 ‘국도’란 이름으로 바다의 섬이자 해당화·대나무·기이한 바위들로 유명한 국도 일대 풍광을 그렸다. 제4폭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꾸고 세웠다는 설봉산 석왕사 주변을 담았다. 기문을 보면, 태조가 잠룡 시절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꿨고, 토굴의 승려에게 의미를 물으니 ‘서까래 세 개는 王(왕)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승려가 바로 무학대사다.

제5폭은 정평의 도안사, 제6폭은 길주의 군사진지 유적인 성진진이다. 기문은 ‘3면이 바다이며 옛날에는 토성이 있었지만 1606년(선조39) 진을 설치했고 1615년(광해군 7)에는 석성을 쌓았다’고 설명한다. 제7폭은 지금도 유명한 명천의 칠보산을 개심사와 금강굴·연적봉 등과 함께 담아냈다. 기문에는 칠보산의 유래, 산 정상에 쌓인 조개·소라 껍데기로 이 산이 바다에 잠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혔다.

‘관북십경도’ 가운데 군사 유적지 ‘무이보’를 담아낸 제9폭(왼쪽 사진의 오른쪽)과 용당을 그린 제10폭. ‘무이보’ 화면 하단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두만강 너머의 8개 연못이 있는 지역(지금은 중국 영토)을 자세하게 그려 놓았다.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가운데 군사 유적지 ‘무이보’를 담아낸 제9폭(왼쪽 사진의 오른쪽)과 용당을 그린 제10폭. ‘무이보’ 화면 하단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두만강 너머의 8개 연못이 있는 지역(지금은 중국 영토)을 자세하게 그려 놓았다. 전윤수 제공

제8폭은 임진왜란 때 북관대첩을 이끈 의병장 정문부(1565~1624)를 기리는 사당인 창렬사 일대다. 정문부는 북한의 국보인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북관대첩비’는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남북한 협력으로 서울로 환수한 뒤 북한에 인계해 함경도 원래 자리에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9폭은 두만강변의 군사시설 ‘무이보’가 소재다. 기문에서는 두만강 너머와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활동한 지역으로 8개의 연못이 있는 팔지(八池) 일대 등을 설명한다.

제10폭은 조선 태종 때 쌓은 동림산성 동쪽의 사당인 용당을 그렸다. 기문에는 ‘두만강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도 있다. 제11폭은 갑산의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진 괘궁정 일대를 담아냈다. 기문은 ‘아! 이곳은 백두산의 뿌리요 압록강의 근원이니 천하의 외진 곳’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제12폭은 칠보산 등 5곳 명승에 관한 기문이다.

‘관북십경도’ 가운데 제7폭인 칠보산(왼쪽 사진 오른쪽)과 제8폭인 창렬사. 오른쪽 사진은 칠보산을 그린 화면의 세부 모습. 전윤수 제공

‘관북십경도’ 가운데 제7폭인 칠보산(왼쪽 사진 오른쪽)과 제8폭인 창렬사. 오른쪽 사진은 칠보산을 그린 화면의 세부 모습. 전윤수 제공

미술사학자인 박정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라 조선 후기 회화, 특히 실경산수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며 “관북 10경도 중 최대 대작이자 작품의 수준도 높다. 명승 화면에 기문을 쓴 기존 작품들과 달리 기문을 별도 폭에 모아 적은 것도 특징”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 실경산수화를 연구하는 박 교수는 ‘조선후기 명승과 명승도 향유양상-한중명승도첩을 중심으로’ ‘조선 후반기 관북명승도 연구’ 등의 논문, 서북지역 실경산수화의 시기별 흐름과 제작배경·전래 현황·회화적 특징을 분석한 연구서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등을 저술했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의 명승·명소를 8경 혹은 10경 등으로 선정해 문학·회화의 제재로 삼는 문화가 성행했는데, ‘관북십경도’도 그 선상에 있다”며 “다만 관북지방은 한반도 최북단, 변방으로 소외되면서 타지역보다 화가들의 관심을 덜 받았고, 수량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에 따르면, 관북 명승의 시각화는 1664년 길주에서 치러진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된 김수항(1629~1689)을 수행한 화원 한시각이 그린 ‘북관수창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후 관북 명승도는 약천 남구만(1629~1711)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제작이 본격화됐고, 1674년에 남구만의 기문이 적힌 ‘함흥십경도’ ‘북관십경도’가 완성됐다. 당시의 ‘남구만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본을 짐작할 수 있는 ‘함흥내외십경도’(1731년경)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박 교수는 “현존하는 관북명승도는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남구만본’의 형식·내용을 따른 지역 화가들의 임모작과 조중묵의 ‘관북십승도’(1890)처럼 중앙의 화원들이 남종화풍으로 그린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초 ‘남구만본’ 계열에 비해 중앙 화단 작가들의 작품에 한층 세련되고 안정된 필묵법이 구사돼 있다”며 “공개된 ‘북관십경도’는 중앙 화원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처음 공개되는 미공개 작품 ‘북관십경도’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선후기 실경산수화 전문가인 박정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연구교수(왼쪽)와 전윤수 더프리포트 대표. 도재기 선임기자

처음 공개되는 미공개 작품 ‘북관십경도’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선후기 실경산수화 전문가인 박정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연구교수(왼쪽)와 전윤수 더프리포트 대표. 도재기 선임기자

박 교수는 18~19세기 관북 명승도 제작이 당시 북방 영토에의 관심, 특히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논란이나 간도 영유권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선과 청나라는 1712년 백두산에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하지만 고종대인 1885년을 전후해 동쪽 경계인 ‘토문’을 놓고 청나라는 두만강, 조선은 만주 송화강 일대라고 주장하며 큰 갈등을 빚자 두만강 너머 간도 일대에 대한 국내 관심이 높아졌다. 실제 이같은 관심은 ‘북관십경도’에 간도 일대를 강조해 담거나(무이보), 현장에선 보이지 않는 백두산과 천지를 표현한 장면(괘궁정) 등에서 엿보인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명승도 연구가 활발하지만 관북지방은 소외돼 연구가 미진하다”며 “‘관북십경도’ 발굴을 계기로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전윤수 대표는 “‘관북십경도’가 학계에는 좋은 학술 자료로, 미술애호가들에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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