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 생사고비 넘긴 건 ‘10할이 기도’

2009.08.19 17:42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일미사를 빠뜨리지 않고 늘 기도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은 1957년 세례를 받은 이후 50년 넘게 의지한 신앙의 대상이었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거나 옥고를 치를 때 그를 지탱케 한 버팀목이었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살았던 그의 일생은 가톨릭적 사회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1987년 고 김수환 추기경과 악수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고 김수환 추기경과 악수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 전 대통령은 1957년 김철규 신부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에서 “세례명을 주신 김 신부님은 ‘토머스 모어는 가톨릭교회에서 분리 독립해 나온 헨리 8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그와 같은 정치인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밝혔다. 신도는 세례명의 성인 운명과 비슷해진다는 속설처럼 김 전 대통령의 험난한 정치 역정을 예고하는 이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실천은 곧 하느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하느님이 주신 세상의 행복을 평등하게 누리는 나라를 만들자”(<행동하는 양심으로> 中), “인류의 공통 염원은 자유·정의·평화이며, 인종·종교·지역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교리의 진수”(81년 5월22일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 中), “인권은 하느님이 주신 초국가적 권리”(76년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 이유 보충서 中) 등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순교의 과정’으로 여겼다. 87년 출간한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에서 “참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고등종교들은 민중 구원의 차원에서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악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많은 순교자를 낳게 했다”며 각오를 다지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여러 가톨릭 지도자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재야 시절 시국 논의 대상은 주로 가톨릭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고 김수환 추기경은 김 전 대통령이 투옥됐을 때 차입금을 넣어줄 정도로 각별했다. 퇴임 이후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놓지 않았다. 윤일선 현 서교동 성당 주임신부는 “신앙생활을 무척 열심히 하셨다. 몸이 불편해 본당에 오기 힘들면 사저 도서관에서 기도하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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