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태 신부 “한센병 환자… 그들 통해 ‘하느님의 은총’ 느껴”

2009.09.01 17:44 입력 2009.09.01 23:06 수정

성라자로마을 떠나 평택대리구장으로 가는 김화태 신부

지난달 31일 오후 경기 의왕시 오전동 모악산 기슭의 천주교 성라자로마을. 김화태 원장 신부(59)는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성라자로마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김 신부는 지난 6월 수원교구 사제 인사에서 평택대리구장으로 발령받아 1일 평택으로 떠난다.

“큰 불상사 없이 할머니·할아버지들과 함께 잘살아온 게 너무 기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뿐입니다.”

김화태 신부가 지난달 31일 경기 의왕시 성라자로마을에서 지난 11년간의 사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화태 신부가 지난달 31일 경기 의왕시 성라자로마을에서 지난 11년간의 사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98년 8월 성라자로마을에 원장으로 부임해 만 11년을 한센병 환자들과 살았던 김 신부는 “행복한 은총의 시간이었다. 라자로마을 가족들로부터 너무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한센병 환자의 대부’로 불렸던 고(故) 이경재 신부가 선종한 뒤 이곳에 부임했다.

“이 신부님 묘지를 찾아가 ‘나는 능력이 부족해 라자로마을에 들어갈 수 없다’며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하소연했어요. 그때 이 신부님이 ‘순명(順命)만 해, 나도 내가 한 것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는 게 하늘로부터 들리는 것 같았어요.”

순명의 마음으로 라자로마을에 들어섰지만 환자들의 냉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환자분들은 내몰리듯 가족을 두고 떠나온 분이 많아요. 그만큼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열고 주기가 힘들어요.” 환자들은 김 신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고 한다.

“눈길도 안 주고 인사를 해도 모른 척 했죠. 처음에 인정을 못받는 외로움이 컸어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화도 났지요.”

김 신부는 소주를 들고 환자들을 찾아가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그게 소문이 나면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신부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해주는구나. 우리를 위해 살 신부구나’ 하고 굳게 닫혔던 마음을 열기 시작했죠.”

그는 한센병환자, 자원봉사자, 후원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느꼈다고 한다. “한 할머니는 손이 없다보니 손목에 묵주를 끼고 입으로 문 채 묵주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거예요.” 김 신부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신앙심을 보고 느낀 게 너무 많았다. 라자로마을에서의 순명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가 부임했던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 3만5000여명 후원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김 신부는 “능력 없는 내가 와서 잘못된 것 같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며 “하지만 하느님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선행이 이어졌다. 김 신부는 “ ‘서울, 인천, 수원의 전철역에서 얻어먹는 사람이다. 나도 기부하고 싶다’며 돈을 보내온 노숙자도 있었다”고 전했다. “정치다 뭐다 위에서야 매일 지지고 볶고 하지만 밑에는 훈훈한 이야기가 많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과 백두산과 제주도로 여행가고, 사물놀이와 점토를 가르쳤던 추억도 떠올렸다. “점토 전시회를 하던 날 ‘신부님 우리도 행복하단 말을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이별의 시간이 쉽지만은 않다.

“우릴 두고 가나요” 환자들 눈에 밟혀 가슴 아픈 이별

인사 발령이 난 뒤 환자들은 “우리에게 11년간 준 사랑은 거짓이냐, 승진 기회가 오니까 우리를 버리고 가는 거냐”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여기서 평생을 살고 싶지만 주교님이 다른 일을 명하셨고, 이 명을 따라야 하니 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김 신부는 “라자로마을 가족들로부터 배운 삶의 진수는 보물과도 같다”며 “평택에 가서도 삶의 보물을 깊이 간직해 순명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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