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는 청동기 전기문화 중심지’

2002.01.04 19:16

강원도가 청동기 전기 문화의 꽃을 피운 중심지역이었음을 알리는 유적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최근 춘천 거두리와 화천 용암리·위라리 청동기 유적을 발굴한 강원문화재연구소는 “절대연대 측정을 해봐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이들 유적에서 나온 토기들에 대한 상대연대 측정 결과 BC 14(거두리)~11세기대(용암리·위라리)라는 연대가 나왔다”고 밝혔다.

지현병 연구실장은 “특히 청동기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27평형 대형 주거지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특이한 형태의 무문토기가 확인된 것은 획기적”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두 곳을 돌아본 최몽룡 서울대 교수(문화재위원)는 “BC 17~15세기 청동기 전기 유적인 강릉 교동·춘천 신매리에 이어 이번에 거두리와 용암리·위라리 유적이 발굴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면서 “한반도 남쪽에서 확인된 청동기 전기 유적의 반 이상이 강원지역에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청동기 시대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또하나 이번 발굴은 한반도 남쪽의 청동기 연대가 교과서에 실린 대로 BC 10세기가 아니라 최소한 BC 15세기 전후라는 최근의 잇단 발굴성과를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뜻이 있다. 지현병 실장은 “북한은 청동기 상한연대를 BC 25세기쯤으로 보았고 우리 학계의 정설은 BC 10세기였다”면서 “강원도 유적들은 이렇게 1,500년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거두리 유적=우선 주목되는 점은 원구형의 몸통에 좁은 굽이 달린 목이 긴 마연 항아리와 어깨부분이 급하게 펴졌다가 목부분에서 안으로 오그라드는 무문토기가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것. 이는 청동기 시대의 새로운 토기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문토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전망이다.

또하나 12호 주거지에서 관옥이 발견됐다. 강원지역의 경우 지석묘가 아닌 주거지에서 관옥이 나온 예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대에도 무역이 있고 신분계급이 있었으며 전문직도 있었음을 고려할 때 주거지에서 백색의 옥을 썼다는 것은 그 시대 유력인의 집이라는 걸 시사해준다. 관옥은 외국산일 가능성도 있다.

지실장은 “유명한 춘천옥(玉)의 경우 지하 깊숙한 곳에서 채굴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파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외국산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밝혔다.

5호 주거지에는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 출입구 시설이 처음으로 확인됐으며 1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반월형 석도의 경우는 사용후 다시 가공하여 쓴 흔적이 보인다. 또한 2단 절대(대나무 마디 모양)의 유절식 석검병부(돌칼의 손잡이)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용암리·위라리 유적=27평이 넘는 대형 주거지가 발견됐다는 점이 획기적이다. 9호 주거지는 동서 4.7m, 남북 19.2m(27.3평). 3호는 동서 4.5m, 남북 15.6m(21평)이다. 최몽룡 교수는 “집의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보아 족장 집이거나 공동회의소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한 거두리 유적보다 연대가 떨어지지만 그동안 학계에서 궁금증을 자아냈던 주거지의 상부구조를 밝힐 수 있는 나무구조물(활엽수)이 5호 주거지에서 확인됐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문화전파 경로와 가옥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거지 내부의 조명, 난방, 취사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지가 특이하게도 주거지 중앙 남쪽 부분에 만들어졌다. 특히 서까래, 기둥, 보, 종도리로 쓰였던 나무가 나왔다는 것은 집 구조가 정교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서까래가 주거지 외곽으로 나온 것은 오늘날의 가옥구조와 비슷하다는 점을 일러준다.

이 유적의 경우 화천군이 이 지역을 야외박물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하므로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크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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