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당대 최고 화가가 최고 재료로 빚어낸 ‘비단 위의 불경’

2019.10.11 16:59 입력 2019.10.13 16:01 수정

고려 불화

고려시대 이 땅에서 제작됐지만 국내보다 해외에 훨씬 많이 남아 있는 걸작 예술품이 있다. 세계적으로 160여점이 전해지는데, 국내엔 공식적으로 단 20여점이 확인된다. 그만큼 외국인들이 소장하고 싶어한 ‘명품’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 불법 유출되거나, 때론 선물로 주면서 대량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젠 희귀하다보니 보존 등을 이유로 특별전이 아니면 원본들을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

고려시대 불화(불교회화)다. 주로 고려 말(13~14세기)에 그려진 고려 불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국내외 미술사가의 상찬도 이어진다. 종교화이지만 종교를 훌쩍 넘어 예술품, 귀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중세·르네상스시대 유럽 기독교 성화들이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대접받는 것과 같다. 700여년 전 고려 불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는 무엇일까. 왜 종교적·회화적 아름다움의 정수로 주목받을까.

고려시대 예술의 잃어버린 고리

고려 불화는 현존하는 당시 회화 유물이 거의 없기에 소중할 수밖에 없다. 재료가 종이나 비단·나무일 경우 특성상 돌·금속보다 쉽게 훼손된다. 수많은 고려 건축물이 있었지만 지금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 극히 일부만 남은 것도 그 이유다. 많은 이들이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럽 건축물 등을 보며 자조까지 하는데 그럴 일은 아니다. 유럽은 주재료가 돌이고, 고려는 흙과 나무라는 문화적·지역적 특성이 반영됐을 뿐이다.

세계적으로 160여점, 국내에는 20여점만이 전해지는 고려 불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은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106×55㎝·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세계적으로 160여점, 국내에는 20여점만이 전해지는 고려 불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은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106×55㎝·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종교를 넘은 예술품 ‘고려 불화’는
세계인이 소장하고 싶어하는 명품
160여점 중 국내엔 20여점만 남았다

고려에도 전문 화가(화원)들의 기구인 도화원이 있었고, 왕이나 공신·귀족의 인물화는 물론 산수·영모화 등 회화가 발달했다. 하지만 문헌으로 전할 뿐 남아 있는 작품은 극히 적다. 불경 필사본이나 목판본·금속활자본이 그나마 전해져 웬만하면 국보·보물 등으로 지정된다. 고려 회화로는 주자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을 그린 ‘안향 초상’(국보 111호)과 일부 작품이 있다. 학자·관료인 익재 이제현을 담은 ‘이제현 초상’(국보 110호)도 있으나 원나라 진감여의 작품이다. 자료가 적다보니 고려시대 회화사를 제대로 정리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불화는 당시 종교문화는 물론 회화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풍성한 문화예술을 꽃피운 고려시대 예술세계의 잃어버린 한 고리를 채움으로써 역사적·학술적 의미가 크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의 세부 모습들. 14세기 초 비단에 그려졌다.

불화는 불교의 교리, 정체성을 회화적으로 시각화, ‘비단에 그린 불경’인 셈이다. 나아가 불교세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예술품이다. 서구의 성화가 성경을 시각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불화는 기원전 3~2세기쯤 인도의 불교사원에서 처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래에 따라 이후 세계 곳곳으로 확산돼 삼국시대에는 이 땅에도 불화가 나타났다. 불화는 재료·용도 등에 따라 벽화나 천장화, 불경 편찬과 곁들인 변상도, 비단이나 종이·삼베 등에 그린 두루마리(족자형), 각종 장엄 등이 포함된다. 통념상 고려 불화는 비단·종이에 그려져 두루마리·족자로 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교일 정도로 고려인의 삶과 가치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중들의 큰 관심 속에 왕실과 귀족관료 등은 불화 조성을 적극 후원했다. 따라서 당대 최고 화가가 최고의 재료로 정성을 들여 빚어내 빼어난 수준을 자랑하는 것이 불화다.

신앙심과 예술성의 절묘한 융합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은 다양하게 서술된다. 무엇보다 신비로운 색채의 조화가 첫손에 꼽힌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군청색의 원색을 사용, 화려하지만 튀지 않고 오히려 우아하고 격조 높은 색감을 자랑한다. 안료나 채색 기법·중간색의 적절한 활용 등으로 가능한 일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밀하고 유려한 선들도 일품이다. 먹선 등으로 윤곽을 잡고 선을 여러 번 겹침으로써 입체감·생동감을 전한다. 붓질에는 힘과 리듬감이 실려 작자의 능력을 엿보게 한다.

또 순금 가루를 천연접착제인 아교에 갠 금니를 적절히 활용, 금니의 특수효과를 살린다. 찬란한 금빛의 금니는 다른 색채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경우 성스럽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독교의 스테인드글라스나 다양한 색의 모자이크 성화도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고대부터 황금, 황금색은 성스러움이나 고귀함·신비로움을 상징하며 최고급 미술품에 사용됐다. 특히 고려 불화의 금니는 금박을 사용하는 일본 등과 달라 불화의 국적 판별에 중요한 단서다.

화려하면서 우아하고 격조 높은 색감
세밀하고 유려한 선, 힘 있는 붓질
순금 가루를 갠 금니·원형 당초무늬는
중국·일본 불화와 다른 중요한 단서

고려 불화 ‘수월관음보살도’(보물 1903호·호림박물관 소장)

고려 불화 ‘수월관음보살도’(보물 1903호·호림박물관 소장)

섬세하게 표현된 무늬들도 중요한 미적 특징이다. 넝쿨무늬(당초문)를 비롯해 연꽃·보상화·모란·국화 등 식물과 봉황·거북등은 물론 구름·파도 같은 자연물을 형상화한 무늬도 있다. 연화당초무늬(연꽃과 당초의 결합)처럼 무늬들의 융합도 눈에 띄는데, 원형의 당초무늬는 고려 불화에서만 나타나 중국·일본 불화와의 차별점이다. 무늬들의 정교한 표현은 불화 속 주인공이 걸친 사라(비단으로 짠 직물)를 더욱 투명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게 만든다. 불화의 구도는 거의 정형화돼 안정적인데, 화면 속 주인공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화법, 완성도 등에서 고려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불화는 재료 준비부터 완성까지 수행자적 예술행위의 결정체다. 선(禪) 수행에서 말하는 ‘쇠 나무에서 꽃을 피우고’(鐵樹開花·철수개화) ‘불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내는’(火中生蓮·화중생련) 수행력에 더해 예술가로서의 빼어난 자질까지 필요하다. 특징적인 채색효과를 내기 위해선 귀한 천연광물에서 안료를 채취해야 한다. 붉은색은 석회암 등에서 나오는 주사, 녹색은 공작석이라고도 불리는 석록, 군청색은 구리광산에서 얻어지는 석청에서 뽑아낸다. 흰색은 연단, 황색은 황토가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 안료가 비단에 잘 붙기 위해선 접착제가 필요하다. 단청 등에 사용되는 전통 천연접착제로 동물가죽 등에서 얻는 아교다. 곱게 간 안료 가루를 아교물에 개어 붓질하는 것이다.

불화의 독특한 채색효과를 위해선 기법도 중요한데, 배채법이다. 화면 뒷면에 안료를 칠해 앞으로 배어나도록 하고 앞면에서 보강하는 기법이다. 배채법은 색깔을 보다 선명하면서 은은하게 만들고, 변색이나 바탕에서 안료가 떨어지는 것을 예방한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가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배채법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른 채색화에도 활용된 배채법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요 기법이었으며, 극소수의 현대 화가들은 지금도 이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 속 주인공은 여래(부처·불), 보살, 나한 등이다. 여래도는 아미타불·비로자나불·약사불·석가모니불 등이, 보살도는 관음보살(수월관음도)·지장보살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아미타불도도 아미타불이 홀로 있으면 아미타독존도지만 두 협시보살과 함께라면 아미타삼존도로 구분된다.

국내 고려 불화 중 유일한 국보가 바로 ‘아미타삼존도’(218호·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다. 관음보살·지장보살이 협시하는 아미타불은 화면 아래 사람을 바라보며 빛을 비추는 모습인데 채색과 표현 기법 등에서 빼어난 수준을 자랑한다.

회화 속 주인공은 여래·보살·나한…
특별한 재료와 독특한 기법으로
저마다의 그 간절한 바람들을 녹여낸
수행자적 예술행위의 결정체다

고려 불화의 빼어난 수준을 드러내는 국보 218호 ‘아미타삼존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고려 불화의 빼어난 수준을 드러내는 국보 218호 ‘아미타삼존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국보 218호 ‘아미타삼존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세부 모습.

국보 218호 ‘아미타삼존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세부 모습.

보물 1426호인 ‘수월관음도’(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는 화사하면서도 품위 있는 색채와 세밀하고도 우아한 선의 인물표현 등 세련된 고려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호림박물관·우학문화재단·개인이 소장한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지장시왕도 등 고려 불화도 ‘보물’로 지정돼 보존·관리 중이다.

이들 불화의 상당수는 일본에 있던 것인데, 소장가들이 갖가지 어려움을 뚫고 국내로 들여온 사연은 감동적이다. 수장가들의 이 같은 노력으로 고려 불화가 그나마 일부라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미국·이탈리아·영국 등에 흩어져 있는 고려 불화는 일본에 가장 많은데 무려 120여점으로 파악된다.

‘수월관음도’(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일본 센소지 소장)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고려 불화는 대형도 있지만 세로 1m, 가로 50㎝ 내외의 소형이 많다. 크기로 볼 때 당시 이 불화들은 사찰보다는 왕족·귀족 집안에 별도로 봉안돼 예배용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불화의 주인공이 다양한 것은 불화 조성의 후원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갖가지 바람 때문으로 해석된다.

불화에 남아 있는 발원문 등 기록을 보면, 여느 종교화처럼 불화도 왕실의 안녕, 부모의 무병장수, 자식의 출세, 가정의 화목과 평안함, 현세의 영화로운 부귀와 죽은 뒤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조성됐다. 실제 아미타불은 고통이 없는 이상세계인 극락정토를 주재하며,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인 불법을 형상화한 부처이고, 약사불은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의 대상이다. 보살도도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며, 관세음(관음)보살은 중생의 온갖 괴로움을 구원해 왕생의 길로 인도하고,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리움 소장).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리움 소장).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간곡한 기원과 헛헛한 마음을 종교에 기댄다. 고려 말 당시 왕족이든 귀족이든 하루를 팍팍하게 살아가던 민중이든 저마다의 그 간절하고 뜨거운 바람들이 불화 속에 녹아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작품으로서의 고려 불화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유 아닐까.

<사진 제공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리움·아모레퍼시픽미술관·호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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