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퇴계 이황···성리학의 큰 산

퇴계 이황(1501~1570)…겸허한 선비의 표상이자 성리학의 큰 산

1000원 지폐 앞면에 실려 있는 퇴계 이황의 초상

1000원 지폐 앞면에 실려 있는 퇴계 이황의 초상

■현실정치 혐오한 유학과 주자학의 적통(嫡統)

다산 정약용은 유학과 주자학의 적통(嫡統)이었던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지 않은 조선의 실학자였다. 그러나 다산은 퇴계를 마음 깊이 존경해 <도산사숙록(陶産私淑錄)>을 남긴다. 다산은 이 저작 말미에 ‘공언(公言)’과 ‘공청(公廳)’을 강조했다.

퇴계가 선학들에 대해 비판을 가했던 것은 모두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마음에서 우러난 ‘공언’이라고 다산은 지적했다. 이 공언은 편견에 치우지지 않고 공정하게 듣는 ‘공청’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 유학자가 “주자의 도통을 이은 학자는 오직 퇴계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퇴계는 동양 성리학의 큰 산이다.

퇴계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植)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작은아버지에게 <논어>를 배운 퇴계는 어린시절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다. 20살 때부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에 빠져들었던 그는 27살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퇴계는 21살 때인 중종 16년 김해 허씨에게 첫 장가를 든다.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후손이었던 허씨는 퇴계와의 사이에 준, 채, 적 등 세 아들을 남겨두고 결혼한 지 6년 만에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3년 뒤 퇴계는 권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퇴계가 재혼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당시 퇴계가 흠모했던 화산(花山) 권주의 맏아들인 권질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예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퇴계는 그런 권질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차에 권질이 “자네가 아니면 집안의 참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딸을 맡길 사람이 없네”라고 유언처럼 부탁하자 퇴계는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고 전해진다.

퇴계는 다소 모자랐던 권씨를 타박하지 않고 극진하게 대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려 모두 종가에 모여 제사상을 차려놓았다. 그런데 권씨 부인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었다. 일가친척들이 퇴계를 힐난하는 눈치를 보이자 퇴계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아녀자가 먼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나는 일이나 조상님들도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여워하시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퇴계가 권씨 부인을 감싼 일화는 또 있다. 퇴계가 상가(喪家)에 조문을 가려다 흰 도포자락이 해진 것을 보고 그곳을 꿰매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은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왔다. 그럼에도 퇴계는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않고 상가에 다녀왔다고 한다.

퇴계는 34살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39살 때 홍문관수찬이 된 그는 중종 말년에 조정이 혼란스러워지자 낙향할 기회만 엿본다. 43살 때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한 그는 을사사화가 나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 고향으로 내려가 세상을 등진 채 독서에 전념한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로 삼았다.

그 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복귀한 퇴계는 부패하고 문란했던 중앙 관직에서 벗어나 줄곧 외직을 지망했다. 48살 때 단양군수를 거쳐 풍기군수로 임명되자 조선조 사액사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을 세운다.

퇴계 이황의 초상화(왼쪽)와 그가 세운 도산서원

퇴계 이황의 초상화(왼쪽)와 그가 세운 도산서원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 조식과의 끝없는 갈등

퇴계는 155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된 뒤 홍문관부제학까지 지내고 58살 때 공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퇴계는 현실정치를 혐오했다. 43살 때부터 관직을 사퇴했거나 고사한 일이 20차례가 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1560년 도산서원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정한 퇴계는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며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제자들에게 올곧은 학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서원 창설운동에 매진한 퇴계를 사사한 인재만 300여명에 이른다.

특히 퇴계와 그의 제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벌어진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퇴계와 고봉은 8년여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심성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으로 흐를 수도 있다고 우려한 퇴계는 한때 논쟁 중단을 제의했다. 그러나 제자는 쉬지 않고 논쟁을 계속했으며, 스승 또한 이를 거절하지 않고 응해주었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 서울에 와서야 처음으로 퇴계를 만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 선조가 “조신(朝臣) 중에 학문에 뛰어난 이가 누구냐”고 묻자 퇴계는 거리낌 없이 “통유(通儒)한 기대승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퇴계가 심성론(心性論)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게 된 데는 고봉과의 논쟁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평가를 내리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퇴계는 26세 연하의 젊은 제자인 고봉의 문제제기를 단 한 번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철저하게 검토하고 수용했다.

당시 영남지방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받드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있었다. 퇴계의 제자 중 김우옹, 정구, 정탁 등은 남명에게서 배우고 다시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들이다. 이는 제자를 붕우(朋友)처럼 공경하게 대하며 넓은 도량으로 감싸안은 퇴계의 인품과 무관치 않다.

퇴계와 같은 해에 태어난 남명 조식은 퇴계의 학문적 라이벌이자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진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퇴계와 남명은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뚜렷하게 대별됐다. 실학자 이익은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퇴계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킨 모범생 유학자라면, 남명은 독특한 성향의 유학자였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지니고 칼을 찬 모습을 했으며,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변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인물이다.

퇴계와 남명은 50여년 간의 사화기를 겪으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지만, 출사(出仕)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명종 이후 현실세계의 모순이 해소됐다고 판단한 퇴계는 출사해 경륜을 펴는 것도 학자의 본분을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남명은 시대의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로 남을 것을 다짐했다. 왜적에 대한 견해도 사뭇 달랐다.

퇴계가 회유책를 견지한 데 비해 남명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했다.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고, 남명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퇴계와 남명은 서로의 명성을 알고 수차례 편지를 통해 안부와 건강을 묻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차례의 만남도 갖지 않았다. 학풍과 현실관이 다른 학파의 수장(首長)으로서, 서로의 자존심이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당대의 거학(巨學)이었던 퇴계와 남명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두 사람이 죽은 뒤 문인들의 정치적 분열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퇴계학파는 남인, 남명학파는 북인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특히 광해군 때는 스승의 존숭(尊崇)사업으로 인해 정치적·사상적으로 극한 대립을 겪게 된다.

■명종·선조 출사를 종용했으나 고사하며 학문에 심취

퇴계와 남명의 입지는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중심인 북인은 철저하게 정치적 숙청을 당한다. 반면 퇴계학파의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서 정치권에 발을 담그는 한편 영남 지역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심지로 굳혀갔다. 남명이 오랜 기간 ‘잊혀진 학자’로 취급되다 최근에야 비로소 그 존재와 위상이 재평가되는 것과 달리 퇴계는 조선 성리학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주역>과 <성리대전>에 심취해 밤잠을 자지 않고 탐독하는 바람에 심화병(일종의 심한 노이로제)에 걸린 퇴계는 평생 쇠약한 몸으로 고생했다. 의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30대에는 중국의학서 <활인심방(活人心方)>을 베껴쓰기도 했던 퇴계는 제자들의 건강에도 신경을 써 틈만 나면 투호(投壺·화살처럼 생긴 막대기를 항아리에 넣는 놀이)를 장려했다. 퇴계도 도산서원 제자들과 투호를 즐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0원권 지폐 앞면 퇴계의 초상 옆에 투호가 그려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퇴계는 산에도 자주 올랐다.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는 소백산에 올라 <유산록>을 지었으며, 단양군수 시절에는 경치 좋은 곳을 두루 다니며 ‘단양팔경’이란 명칭을 지었다.

명종은 퇴계의 출사를 자주 종용했고, 퇴계는 그때마다 고사했다. 명종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어린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한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퇴계는 예조판서에서 사퇴한 뒤 낙향한다. 퇴계는 임금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일념으로 <성학십도(星學十圖)>를 저술해 어린 선조에게 바친다. 퇴계는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됐으나 선조에게 간청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퇴계는 죽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강론을 했고, 사망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4일 제자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가르침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이날 퇴계는 조카 이영을 불러 자신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사양해야 한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간단히 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銘)을 쓰도록 해야 한다”

당시 퇴계는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됐는데도 굳이 유언을 남겨 이를 사양했다. 단지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퇴계는 96자의 한시로 자신의 삶을 압축했다.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장황하게 쓰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세상을 뜨던 날 평소 애지중지했던 매(梅)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뒤 일으켜 달라고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사망했다.

퇴계가 사망하자 율곡 이이는 제문(祭文)에서 ‘물어볼 데를 잃고 부모를 잃었도다! 물에 빠져 엉엉 우는 자식을 뉘라서 구해줄 것인가!’라며 정신적·사상적 거처를 잃게 됐음을 애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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