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소득주도성장이다

2018.06.20 21:05 입력 2018.06.20 21:15 수정

소득주도성장을 핵심 경제정책으로 처음 제시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최경환 경제팀이다. 당시 ‘친박실세’로 통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2014년 7월 취임하면서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며 소득주도성장을 꺼내 들었다. 취임 전부터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가계소득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비정규직 임금이 올라야 한다”는 발언을 했지만 소득주도성장을 경제정책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경환 경제팀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노동자의 임금과 가계소득을 늘리겠다는 공언과 달리 부동산 규제를 풀며 “빚내서 집 사라”는 ‘부채주도 성장’에 올인한 것이다. 규제완화와 감세 등을 바탕으로 수출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 기조도 바꾸지 않았다. 서민들을 가계부채의 늪에 빠뜨리고, 경제성장의 동력만 갉아먹은 최경환 경제팀의 소득주도성장이 무늬만 그럴듯한 ‘짝퉁’으로 판명나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향의 눈]그래도 소득주도성장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소득주도성장을 둘러싼 논쟁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소득주도성장을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갈 ‘몹쓸 정책’으로 간주한다. 지지율 70%대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냈다는 듯이 파상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보수언론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축으로 하는 문재인 정부의 ‘세 바퀴 성장론’에서 소득주도성장 폐기를 선언하고, 최저임금 인상 실험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 배급정책과 비슷한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 기반을 허물고 있다”(자유한국당),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에는 소득주도성장이란 환상, 허구, 거짓말이 자리하고 있다”(바른미래당)는 보수야당의 비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소득주도성장을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뜨린 것은 통계청의 ‘1분기 가계동향 조사결과’다. 소득 하위 20% 가계의 명목소득이 1년 전보다 8.0% 줄고,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통계지표는 보수진영의 소득주도성장 폐기론에 힘을 실어줬다. 게다가 문 대통령의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발언은 ‘통계조작’ ‘꿰맞추기식 통계 해석’이란 비판을 불렀다. 지난달 취업자수 증가폭이 7만명대로 떨어진 것을 놓고도 보수진영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참사’라고 주장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 제조업 구조조정 여파, 내수경기 침체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도 최저임금 인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은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직원을 줄이거나 아르바이트로 대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저소득층의 소득 감소와 고용사정 악화를 최저임금 인상 탓으로 돌리면서 소득주도성장에 파산선고를 내리라고 주문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일 내놓은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향을 판단하긴 이르지만 가계소득과 민간소비 증대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의 ‘임금주도 성장론’에 뿌리를 대고 있다. 가계소득을 늘리면 소비 증가와 투자 확대로 이어져 경제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보수진영과 주류 경제학자들은 정치적 구호나 가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제정책으로 폄훼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국 포드사의 창업주 헨리 포드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시조로 꼽힌다. 포드는 1914년 노동자의 최저 일당을 2.35달러에서 5달러로 2배 넘게 올렸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면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포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자동차 판매량은 2배 이상 증가했고, 영업이익도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일본은 2016년부터 노동자의 명목임금을 5~10% 올리는 소득 확대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도 최저임금을 매년 13% 이상 인상하고, 노동자 평균 임금을 2배 올리는 ‘임금 배증 계획’을 시행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처럼 명시적으로 소득주도성장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와 가계의 소득을 높이는 쪽으로 경제정책 기조를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제주체를 만족시키거나 추진 과정에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은 경제정책은 없다. 소득주도성장도 마찬가지다. 근로장려세제(EITC)와 실업급여 확대, 기초연금 인상 등 보완대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혁신성장과 맞물려 돌아가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 누구도 가지 않을 길에 나섰다가 헤쳐나가기 어렵다고 과거로 퇴행하는 것만큼 우매한 일은 없다. 제대로 된 소득주도성장, 험하고 멀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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