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고바우만화상 받은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2010.11.08 21:31 입력 2010.11.09 18:47 수정
손동우 | 기획에디터

“권력이 대중을 억압할수록 시사만화는 더욱 강력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의나 연대의식은 무슨 거창한 세계관이나 정치노선의 일치 따위로 인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믿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만화·당구·바둑을 좋아하고, ‘애수의 소야곡’ ‘사랑밖에 난 몰라’ ‘망향’ ‘Five Hundred Miles’ 등 대중가요·가곡·팝송을 가리지 않고 즐겨 부르며, 고향에 정 많은 당숙모가 계신다면 그와 나는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지기가 된 듯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58·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이 바로 그런 대상이다. ‘제10회 고바우만화상’을 받은 박 화백을 인터뷰하기로 결정한 뒤 그에 관한 자료를 읽어내리다가 이 같은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박재동을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만나 고바우만화상 수상에 대한 소회와 만화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았다. 고바우만화상은 신문 네 컷 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한국만화가협회 고문)의 작가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그동안 이홍우·이현세·박수동·김우영·허영만·이두호·신문수 화백 등이 받았다.

‘만화의 사회적 역할을 넓힌’ 공로로 제10회 고바우만화상을 받은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우리 시사만화의 현실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권력이 대중을 억압할수록 시사만화는 더욱 치열해지고 강력해진다”고 말했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만화의 사회적 역할을 넓힌’ 공로로 제10회 고바우만화상을 받은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우리 시사만화의 현실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권력이 대중을 억압할수록 시사만화는 더욱 치열해지고 강력해진다”고 말했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박재동은 “나보다 더 일찍 만화에 투신해서 만화 발전에 공헌한 동료·후배들이 많은데 이 상을 받을 줄 정말 몰랐다”며 “이것은 결코 입에 발린 겸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30대 중반이던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시사만화를 시작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만화에 전력투구한 동료들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는 것이다. 만화상의 상금은 1000만원이다. 이 적지 않은 돈의 용처에 대해 박재동은 “우선은 우리 만화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쓰겠다”며 “구체적인 사항은 동료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말했다. 전액을 만화계를 위해 쓸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아니다”라며 “그동안 감점만 당해 왔는데 이번에는 아내(배우 김선화·53)에게도 점수를 좀 따겠다”고 덧붙였다.

박재동의 수상사유는 ‘한국 시사만평의 새 장을 열었고 만화의 사회적 역할을 넓혀 만화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으로 인해 ‘역할이 넓어지고 위상이 높아진’ 시사만화의 최근 상황에 대해 그는 적잖게 걱정하고 있다. 우선 시사만화가 “외적으로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만화를 싣지 않는 신문이 늘어나고 있고, 시사만화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단된다고 해도 해당 신문사가 그 후속작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재동은 “시사만화의 활동무대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로서는 서운한 일”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비주얼이 넘쳐나서 “비주얼에 대한 갈증이 옛날 같지 않다”는 점도 신문시사만화 위축의 또 다른 요인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그러나 시선을 신문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터넷이나 각종 전시회 등으로 넓혀 시사만화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전보다 더욱 활력이 넘치고 적극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용산참사와 같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사만화가들이 힘을 합쳐 적극 대응하고 전시회를 열면서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박재동은 “우리나라 시사만화가들의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인하다”며 “시사만화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작가들도 놀라운 시선으로 우리 작가들을 다시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만화 100주년대회(그는 100주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행사기간 도중 열린 ‘세계시사만화대회’에서도 구미의 만화가들은 한국 시사만화의 독특한 문화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박재동은 “우리 만화가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연대의식은 민주화운동의 영향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작가들의 이러한 열정과 에너지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시사만화의 중심이 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신문시사만화의 1세대 격인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도 초기에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소재로 하는 ‘생활만화’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고, 권력비판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증가하다보니 이들의 생활만화도 자연스레 ‘정치만화’가 됐다는 것이다. 박재동은 “권력이 대중을 억압하면 할수록 만화가들의 작품은 그만큼 더 치열하고 강력해진다”고 말했다.

8년 동안 그리던 ‘한겨레 만평’을 그만둔 뒤 박재동은 애니메이션 제작과 대학강의 등에 몰두하면서 불가피하게 시사만화와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민주주의 역주행에 대해서도 때때로 ‘확 긁어버릴까’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량 있는 후배만화가들이 중심을 잘 잡고 활동하고 있는 데다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열심히 나서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필치가 때때로 불을 뿜을 때가 있다. 문수 스님이 4대강 반대를 외치며 소신공양했을 때 가부좌를 튼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스님 뒤편에 환하고 따뜻한 후광이 서려 있는 그림을 그렸다. 한때 물러났던 옛 비리재단이 다시 상지대를 삼키기 위해 나타났을 때는 ‘상지오누이’와 ‘상지괴담’을 그렸다. 남매를 잡아먹기 위해 어머니로 변장한 호랑이와, ‘없어진 줄 알았지’라며 음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출몰하는 괴물의 모습을 통해 상지대 사태를 풍자했던 것이다.

박재동은 1952년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범서읍 서사리에서 태어났다. 서사리(西沙里)란 지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곳에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척과천 모래톱이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은 ‘서사리’보다는 ‘모랫골’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 그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송곳으로 장판을 모조리 뚫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단지 “잘 그렸다”는 짧은 ‘심사평’만을 내놓았다. 이것은 그의 그림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였다. 박재동은 “어린아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발현한다”면서 “만약 그때 혼이 났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동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집은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단칸방에 모셔놓고 어머니는 월세집 1층을 빌려 만화가게를 열었다. 당시 만화 앞에는 반드시 ‘불량’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어린이날 같은 때는 아이들의 ‘건전한 정서 함양’을 위해 ‘불량만화 불태우기’와 같은 관제행사가 벌어졌다. 학교에서 ‘만화방 가지 맙시다’ 등의 포스터를 그리고 칭찬받고 온 날 어린 박재동은 과거시험에서 조부를 욕하는 글을 지은 김삿갓의 심정이 들기도 했다.

박재동은 ‘불량문화’에 얽힌 박기정 화백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렸을 적 그가 즐겨 읽었던 만화 <도전자> <레슬러> 등의 저자인 박 화백은 ‘만화가 아이들 버린다’는 주위의 비난에 위축된 나머지 한때 붓을 꺾었다고 한다. 뒷날 박 화백은 경영난에 시달렸던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잡지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게 된다. 그 사장은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다가 훈이(박 화백 만화의 주인공)를 생각하며 그때마다 일어섰다’고 썼다. 어느 모임에서 박 화백은 박재동에게 “내가 나쁜 짓(‘불량만화’를 그린 것)만 한 줄 알았더니 내 만화를 읽고 힘과 용기를 얻은 사람도 있더라”고 말했고, 이에 박재동은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 “멋진 상상과 그림이 가득한” 만화책을 매일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그때가 어린 박재동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산호, 박기정, 박기당, 김종래, 임창 등 당시 그의 예술적 감수성을 들끓게 했던 만화가들은 지금도 ‘영원한 아버지’로 남아 있다.

재수를 거쳐 부산고에 입학한 뒤부터는 만화에 손을 떼야 했다. 무엇보다 대학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학과에 가기를 원했으나 그는 “미대에 가서 그림을 못 그리면 저는 죽습니다”라는 말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학교 미술반에서 술도 마시고, 고입재수 때 배운 담배도 피웠으며, 통기타를 치면서 예술가 흉내를 내기도 했다. 박재동은 “그때 갈고 닦은 기타 실력과 가창력으로 지금도 술자리를 주름잡는다”고 자랑했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79년 휘문고 미술교사가 됐다. 햇병아리 교사의 기행에 가까운 갖가지 ‘창의적인’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인기 짱’이었다. 우선 수업은 정해진 장소가 없었고, 준비물은 달랑 도화지 한 장과 몽당연필 한 자루면 충분했다. 학생들은 학교 잔디밭에서 ‘온갖 노가리를 풀며’ 풍경을 그렸고, 어떨 때는 인근 탄천으로 달려가 맞은편 정신여고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준비해온 종이비행기와 병뚜껑을 날렸다. 시사실에 모여 박재동이 촬영해 온 사진을 감상하거나, 개발되지 않은 학교주변 쓰레기장에서 ‘미(美)’를 찾아 헤매는 수업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심미안을 길러주기 위해 그가 마련한 교육적 장치였지만 ‘과격한’ 수업방식을 못마땅해하던 학교당국은 불과 1년 만에 그의 목을 잘랐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자 시인이던 국어교사는 “박 선생이 얼마나 크게 될 사람인데…”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 학교의 교훈은 ‘큰 사람이 되자’였다.

휘문고를 그만둔 박재동은 1년간 쉬다가 중경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이 무렵 그는 대학동기 강요배 화백을 통해 ‘현실과 발언’ 동인이 됐다. 1980년 창립전을 연 ‘현실과 발언’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모태가 된 화가 집단이다. 박재동은 “광주 민중항쟁의 영향도 있는 데다 사회의식이 남다른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삶과 체제, 개인과 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6년간 고교교사로 일한 데다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만큼 박재동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지방선거를 4개월 앞둔 지난 2월 박재동은 인사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목소리 높여 자신의 교육론을 설파하고 있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일방적 방법은 이젠 안된다, 컴퓨터는 선생이 학생들에게 배울 수 있고, 상급생과 하급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동네 만두집 아줌마와 태권도장 사범도 아이들에게 요리와 무예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등이었다. 요컨대 학교를 쌍방향식 개방형 등으로 운영하자는 얘기였다. 때마침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곽노현 당시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이를 경청했고, 이것을 인연으로 그는 곽노현 교육감 취임준비위원장을 맡게 됐다. 박재동은 “나 혼자만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네덜란드 등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초·중·고교의 미술교육에 대해서도 그는 할 말이 많다. 똑같은 예체능 과목 가운데 음악은 노래방에서, 체육은 조기축구나 등산 등에서라도 활용할 수 있는 데 비해 미술은 그야말로 졸업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시간에는 스케치북, 물감 등 준비물이 많고, 그림은 반드시 색칠해야 하며 주제는 거창해야 한다는 고루한 편견 때문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따라서 작은 엽서에다 볼펜으로 그려도 되고, 비너스상 데생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그릴 수도 있으며, 그림 대신 글을 써 넣어도 될 수 있도록 미술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재동은 “그림은 멋지게 그리는 게 아니라 평생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미술교사들의 임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면 박재동에게 ‘나의 만화 내공도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줄 심산이었다. 나는 박기정 만화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훈이와 그의 라이벌이자 악역인 몬도, 착하고 유머러스한 구마 등이라는 사실을 줄줄이 주워섬겼다. 임창 만화의 경우 주인공 땡이와 그의 여자친구 미라·옥희, 심술궂은 오삼이, 착한 맹구 등을 언급하면서 만화에 관한 박람강기(博覽强記)를 과시했는데 땡이의 얼굴은 직접 그려 보이는 ‘도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눈보라치는 만주에서 함께 항일무장투쟁하던 동지를 해방조국에서 만난 듯 뛸 듯이 기뻐하면서 “어려서 만화를 많이 본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사고를 하게 되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깊다”고 말했다. 음, 이렇게 졸지에 풍부한 상상력과 개방적인 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소유자가 되다니… 또 다른 공통관심사인 바둑과 당구에 대해서도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다마수’는 만년 150이고, 기력(棋力)은 프로기사 서능욱 9단과 네 점 놓고 이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동수(同手)라고 한다. 우리는 조만간 당구장에서 게임비와 자장면값 ‘덮어쓰기’ 대결을 벌이고, 호선(互先)으로 시작해 사생결단의 치수고치기 대국을 하기로 약속했다.

■ 박재동 화백의 작품세계
평범한 이웃·힘 없고 착한 사람들이 만화의 주인공


[손동우가 만난 사람]제10회 고바우만화상 받은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박재동 시사만화의 소재는 ‘시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조만간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고향 모래골, 그 동네에서 열리던 빨간 홍시, 애니메이션회사 사무실 옆 양재천에서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너구리도 그의 그림에서 되살아난다.

그러나 박재동 만화의 궁극적은 관심은 아무래도 사람에게 향한다. 그 가운데서도 주위의 평범한 이웃, 힘 없고 착한 사람들이 주로 등장한다. “사람은 맘이 제일 중요한데 그걸 모르는 놈들 거시기 떼서 개 줘 버리겠다”고 일갈하는 양재동 포장마차 아줌마, 고단한 일상에 지쳐 지하철 타고 가는 내내 입을 크게 벌리고 자는 40대 남자, 한겨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서 추위에 떨며 과자를 파는 소녀, 다문화가정 모자(母子), 학교 공부에 지쳐 지하철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는 여고생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도 자녀의 아버지, 노모의 아들, 친구들의 친구인 만큼 가족과 친척, 벗들도 화폭에 나온다. 아버지를 닮아 중학교 때부터 흡연을 시작한 아들 시현이 방안에서 피운 담배꽁초가 대형 컵라면에 가득이 쌓인 것을 보며 처음에는 당황하다가도 이내 인정하게 된다. 아빠가 없을 때 전화가 오면 “우리 아빠 신문지 만들러 갔어요” 대답하던 어린 딸 솔나리가 어느덧 수능시험을 봤다. 박재동이 “솔나리 수고했지?”라고 묻자 딸은 “수고 안 했어. 대충 찍었어”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속으로 ‘허걱’ 했지만 그는 이내 딸의 앞날을 낙관하며 걱정을 털어낸다. 박재동은 “아들은 만화가 지망생이고 딸은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며 엄마처럼 배우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질(從姪)을 볼 때마다 “아이고 재동아, 재동아, 니는 늙지 마래이, 니는 늙지 마래이” 등으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해서 정답게 말씀하시는 당숙모 ‘유곡 아지매’가 건강하시길 빌기도 한다.

만화에는 등장시키지 않았지만 시사만화를 그리는 후배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도 각별하다. 경향신문의 김용민·박순찬, 한겨레의 장봉군, 프레시안의 손문상 화백 등은 그가 믿음직하게 여기는 우리 시사만화의 기둥들이다. 박재동은 “특히 김용민과 박순찬은 우리 시사만화계의 보배”라고 칭찬하면서 “경향신문에 좋은 인재들이 몰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배 후배들’을 비롯해 고군분투하는 경향신문 구성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향신문 사옥 사진 옆에 ‘파이팅 경향신문 너를 믿는다’라는 만화(사진)를 그려 넣었다.

◇박재동 약력

△1952년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출생
△서울대 미대 회화학과, 동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서울 휘문·중경고 교사 역임
△1988~96년 ‘한겨레 그림판’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저서 <목 긴 사나이> <만화 내사랑> <한국만화의 선구자들>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등 다수


<손동우 | 기획에디터 sd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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