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열풍’ 송창식

2011.02.28 21:03
이종탁 사회에디터

“음악은 평생의 공부거리… 노래할 땐 명상상태 들어가죠”

‘천재 뮤지션’ 송창식이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늘 웃음을 짓는 깊은 뜻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울예고에서 여학생 가득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쑥스러워서 웃다보니 생겨난 버릇일 뿐”이라고 말했다. | 박민규 기자

‘천재 뮤지션’ 송창식이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늘 웃음을 짓는 깊은 뜻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울예고에서 여학생 가득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쑥스러워서 웃다보니 생겨난 버릇일 뿐”이라고 말했다. | 박민규 기자

가히 세시봉 열풍이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세시봉 가수들의 노래와 이야기가 지난 설 연휴 TV에 나와 폭발적 반응을 얻고 난 뒤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TV에선 재방송에 스페셜 방송까지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세시봉 친구들’의 전국 순회공연은 가는 곳마다 매진행렬이다.

세시봉이 뜨면서 새삼 주목받는 인물이 송창식이다. 그는 노래에서부터 외모와 화법,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세시봉의 다른 가수들과 완연히 구분된다. 언제나 한결같은 알 듯 말 듯한 미소, 어쩌다 던지는 예사롭지 않은 한마디, 청중의 가슴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독특한 창법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송창식에게는 ‘천재 뮤지션’ ‘자유영혼의 문화예술인’이라는 수식어 외에 ‘노래하는 기인(奇人)’ 또는 ‘도사(道士)’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밤낮을 거꾸로 살고, 남들은 하지 않는 혼자만의 운동을 매일 하면서 때때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주문외듯 술술 털어놓기 때문이다. 세시봉의 맏형이라는 조영남은 송창식을 ‘외계인’이라고 표현하며 “우리가 몇 년을 붙어다녔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아직도 송창식과의 대화는 불통”이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40년 우정을 나누는 사이에 대화 불통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경기 구리에 있는 그의 연습실로 찾아가 그의 노래와 인생에 대해 물어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21일 오후 8시부터 시작됐다.

- 세시봉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최근 지방 공연 다니느라 바쁘시죠.

“그것 때문에 평소보다 2시간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그 외에는 다 똑같죠. 오후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1시간쯤 책이든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운동을 1~2시간, 많이 할 때는 6시간까지 합니다. 그리고 연습실로 가 연습하다 집으로 가는 일정이죠.”

- 오늘도 돌았나요?

“물론이죠. 1만일 동안 하기로 했는데 이제 6000일쯤 했거든요.”

- 그것 때문에 해외 공연도 안간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죠. 미국 갈 때는 하루를 벌지만 올 때는 하루가 없어지거든요. 그렇게 하루라도 빼먹으면 1만일 작품이 안되니까 갈 수가 없죠.”

- 세시봉 공연을 보면서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송창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음악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는 거겠죠. 다른 사람은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저는 음악이 평생의 공부거리입니다. 연예거리가 아니에요. 접근방법이 다르니까 음악의 성질 자체가 다르죠.”

이 또한 뜻밖에도 깊이 있는 대답이다. 평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 노래할 때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무대에 설 때는 평범한 연예인으로 섭니다. 그러다 노래할 때는 완전한 명상상태에 들어갑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연예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명상상태로 들어갔다 하는 겁니다. 연예인으로서 만족감을 찾자면 청중이 나와 함께 호흡을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입니다. 그걸 느끼는 게 노래 부르는 목적이지요. 그래서 내 호흡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내가 무리수를 하면 저들도 무리를 한다, 생각하며 늘 조심합니다. 그게 기본 원칙이죠. 나머지 방법은 다 같아요. 신날 때 같이 신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이번 세시봉은 나로서는 실패작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모욕을 당했어요. 그 사람들이 지난 추석에 이어 또 하자고 하기에 제가 물어봤어요. <놀러와>를 또 하고 싶은 거냐, 그건 나에게 의미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세시봉 우정특집 콘서트’를 하겠다고 해요. 그런데 가 보니 또 <놀러와>를 합디다. 콘서트를 하면 3시간이면 끝나거든요. 우리 노래에 NG는 없으니까. 그런데 토크 프로를 하다 보니 녹화하는 데 7시간이 걸렸어요. 약속된 노래도 못하고 진행하는 대로 끌려갔어요. 나중에 노래 부를 땐 지쳤죠.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TV를 보니 프로그램은 무지 잘 만들었더군요.”

- 항의를 하지 않았나요.

“할까도 생각했지요. 그렇게 하려면 방송금지 가처분신청 같은 것을 내서 방송이 못나가게 해야 하잖아요. 아니면 녹화 도중에 집으로 그냥 와 버리던가. 옛날 같으면 그랬을지 모르는데, 제가 그걸 안한 거죠.”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마냥 행복했다는데, 카메라 앞에 선 가수는 화를 참느라 무진 애를 썼다는 얘기다. TV에선 보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

- 그 옛날 세시봉은 대학생들이 드나들던 곳이잖아요. 가짜 대학생이 어떻게 그곳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나요.

“나는 그때 공사장 야방(경비)을 하고 있었어요. 낮에는 시간이 있으니까 홍익대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놀러가곤 했는데 그때 기타를 처음 배웠어요. 이론을 아니까 금방 배우겠더라고요. 홍대 잔디밭에서 기타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세시봉에서 사회를 보던 이상벽씨가 세시봉 주인 아들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더니 나보고 홍대 대표로 나와 보라는 겁니다. 그게 세시봉의 시작이었죠.”

- 사람들이 홍대생으로 알았단 말이네요.

“처음에는 그랬죠. 그러나 얼마 못가 다 들통 났어요. 내가 아니라고 그랬으니까요.”

- 다른 사람은 진짜 명문대생이었는데,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았나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때도 무게는 늘 나에게 있었으니까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배우는 게 2년치 공부거리밖에 안된다고 생각해요. 서울 음대에서 4년 배운 거, 내가 공부한 것보다 반도 안되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자신감이다. 대학 문턱은커녕 고교를 정상적으로 마치지도 못한 그가 어떻게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노숙자 생활을 3년 하면서 명상테크닉을 터득한 덕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송창식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사람이 추운 날 밖에서 자려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숨을 작고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추우니까요. 그런데 그걸 한참 하다 보니 상상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컴퓨터에 8이라고 치면 숫자 8이 그대로 입력되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로 기억되는데 컴퓨터 운영체계가 8이라 보여주잖아요. 우리 영육(靈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고 말하면 두뇌에 찍 금 하나 그어지는 건데, 몸의 운영체계에 의해 ‘아버지’라 나오는 거죠. 영육이 같은 체계가 아니면 언어가 안통합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 그 소통법이 생겨요. 어느 순간 지식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세시봉 시절 송창식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어있었으니 명문대 학생이라고 해서 선망의 눈초리로 볼 턱이 없다. 이렇게 보면 조영남이 송창식을 가리켜 “정체불명의 대화 불통 상대”였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이때 익혔다는 명상테크닉은 송창식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트윈 폴리오 때의 팝송을 버리고 전혀 다른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게 이 명상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 노래가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두 번 있었죠. 한 번은 군대에서 주한미군방송(AFKN)을 보는데 아마추어 노래자랑이 나와요. 그런데 그들 노래를 듣다 보니까 내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가 트윈 폴리오를 하면서 세상 어디를 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 있나 싶어 펑펑 울었죠. 또 한 번은 TV에서 전주대사습놀이가 나오는데 가야금과 대금을 하는 여자가 무지하게 잘하는 거예요. 그때까지 국악을 깔보고 있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죠. 그때 새로 시작했습니다. 음악에 대한 명상상태로 들어가 동서양 음악의 차이점부터 밝혀냈죠. 그래서 나만의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건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겁니다. 베토벤도 모르고, 바흐도 모르고, 국악하는 사람들도 모르죠.”

- 어떤 이론인데요.

“서양에선 피타고라스라는 수학자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만들었어요. 수학적으로 음계를 풀다보니까 3분의 1, 2분의 3 같은 분수관계에 의해 음정이 정해진다는 것을 발견해 발표를 했어요. 이게 오늘날 서양음계가 됐습니다. 동양은 어떠냐, 음의 정도가 음정이니까 이것은 이런 정도의 음이다, 저것은 저런 정도의 음이다, 하며 관념적으로 음계를 만들었어요. 음양오행에 의한 채널로 음계를 본 겁니다.”

- 점점 어려워지네요.

“그럴 거예요. 이건 발표할 수도 없는 거예요. 왜냐. 기존의 음악이론에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우리가 베토벤을 가리켜 악성(樂聖)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베토벤은 음악의 본질을 몰랐어요. 그저 솜씨만 왕창 뛰어났을 뿐이죠. 우리가 작곡이라고 하는 것을 서양에선 콤퍼지션이라고 하잖아요. 음계의 포지션(position)을 컴(com) 하는 겁니다. 있는 자리를 가지고 구성을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구성이 변화무쌍하고 황홀합니다. 우리는 흐름을 창조하는 게 작곡이에요. 곡만 만들면 되니까 황홀할 필요가 없죠. 왔다갔다 하지 않으니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게 매료되면 저쪽 것은 음악도 아니에요. 그럼 음악의 본질이란 무엇이냐, 우주와 같습니다. 자연과 완전히 똑같이 되지 않으면 음악의 본질을 모르는 겁니다.”

동서양 음악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과거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1992년 12월3일자 경향신문 9면에는 ‘송창식의 나의 삶, 나의 노래’가 실려 있다. 여기서 그는 “트윈 폴리오 시절 팝송만 들려준 데 대한 죄갚음으로 의식적으로 우리 노래를 부르려 애썼다”며 “트윈 폴리오의 노래는 대중으로부터 우리 음악을 멀어지게 한 독약 같은 것이었다”며 고백했다.

- 그때 독약 같다고 한 노래를 이번 세시봉 콘서트에서 불렀지 않습니까. 그건 어떻게 설명이 되는 거죠.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그 기사는 내가 직접 쓴 게 아니라 나의 구술을 받아 기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팝송을 초콜릿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외국의 초콜릿이 맛있으니까 국내에서도 초콜릿을 만들 수 있겠죠. 그게 서양 것과 달라도 사람들은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갱엿 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독이라고 한 거죠. 지금 제가 부르는 노래는 과거 트윈 폴리오 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는 영어를 미국사람들 흉내내려고 했지만 지금은 내 식대로 합니다. 영어의 원칙은 지키되 정정당당하게 한국식으로 하는 거죠. 또 옛날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격렬하게 부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부르는 팝송은 독이 아닌 거죠.”

- 그걸 깨닫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변함없는 하모니라며 감탄을 하거든요.

“사람들이 그저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사실 윤형주하고 나하고는 음악의 내용상 괴리가 많습니다. 40년간 떨어져 있었으니 어울림이 되려면 서로가 많이 다가가야 해요. 지금은 노래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주 엉터리는 아니지만 20~30점짜리밖에 안되거든요. 60점은 돼야 할 텐데 말입니다. 미숙한 거를 가지고 돈 받고 한다는 게 미안할 뿐입니다.”

보통의 팬 입장에서 이건 어쩌면 알아서 마음이 편치 않는 진실일 수도 있겠다.

- 음악을 새로이 깨닫고 난 뒤 만든 노래는 어떤 점이 다릅니까.

“피리부는 사나이, 왜 불러, 고래사냥 같은 노래는 내 음악의 논리를 한 두 소절씩 집어넣은 겁니다. 한꺼번에 다 넣을 수는 없으니까. 가장 많이 넣은 노래가 가나다라 입니다. 내 이론을 절반쯤 넣었죠. 이들 노래는 한국음악도 아니면서 서양음악도 아닌, 국적불명의 음악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다 1990년대 댄스음악이 나오면서 안하게 됐죠.”

- 천재 뮤지션이 노래를 만들지 않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이해도 안되고요. 이미 써놓은 곡이 1000곡쯤 있다면서요.

“곡을 완성한 것은 아니고 한두 소절씩 메모해둔 게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가 취입을 안하는 이유는 사업적으로 안맞기 때문이에요. 내 노래 목표가 10만장인데 음반회사에서는 20만장을 팔아야 사업성이 있다고 하니까요. 또 마음에 드는 밴드가 없기도 해요. 옛날에도 TV에서 노래할 때 꼭 밴드가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아 기분이 안좋았는데 지금은 더 그럴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콘서트를 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이 문제 때문입니다. 같이할 밴드가 없어서죠.”

- 혼자 기타치며 노래하면 되지 않습니까.

“제 노래솜씨가 40점이라면 기타솜씨는 20점밖에 안돼요. 취입을 할 정도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저 300~400명 앞에서 부르는 거, 트윈 폴리오 정도가 적당하죠. 내가 미사리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나가던 카페가 지난해 없어져서 그 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런 곳에서 대중과 호흡하면서 노래부르는 게 좋습니다. 남들은 돈 때문에 내가 미사리를 가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권투선수가 스파링을 하듯이 저는 매일 노래를 불러야 하거든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많은 궁금증이 풀렸다. 못내 아쉬운 것은 신곡에 대한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점이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통해 부탁해본다. “좋은 노래 묵히지 말고 좀 내 주세요.”

◇ 초등교 입학 전 6학년 음악책까지 다 뗄 정도로 소질

송창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나가 숨지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누이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나오는 소리란 소리는 다 듣고 따라불렀다.

그래서 초등학교 음악교과서는 입학도 하기 전에 6학년 책까지 모두 뗄 정도였다. “음악 책을 보고 거기에 실린 아는 노래를 죄다 불렀는데, 4학년 책부터는 콩나물 대가리 밑에 계명이 쓰여 있어 도미솔솔 하며 부르다 보니까 음계를 저절로 알게 됐다”는 게 그의 회고다.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 이미 악보를 읽고 채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인천중을 졸업하고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지휘자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 작곡과를 가고 싶었지만 작곡은 별도로 레슨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해 성악과를 선택했다. 여기서 음악이 공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서울예고는 학생이 각자 개인레슨을 받고 그 레슨교사의 추천을 받아 학기말 실기시험을 보는 제도를 시행했다. 보통 가정에서 하는 레슨비가 1만원일 때 학교 레슨교사의 교습비는 1000원.

그러나 인천에서 서울까지 다닐 통학비가 없어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던 그로서는 이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고, 실기시험은 계속 0점이었다. 3학년이 되자 학교는 유급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며 가정통지문을 보냈고, 이를 본 송창식은 그 길로 말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고교를 중퇴한 셈이나, 나중에 보니 서울예고 동창회 명단에 한 해 선배들과 같이 졸업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조기졸업 처리가 된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학교를 그만둔 송창식은 떠돌이 생활을 한다. 닥치는 대로 살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책을 훔쳐 헌책방에서 음악책이랑 바꿔보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어떤 계기로 40일간 무전여행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되겠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새기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의도에서 1개월간 생각을 정리하고 서울로 와 공사판 야방(경비)을 서다가 홍익대 잔디밭에서 세시봉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음악인생을 걷게 됐다.

◇ 송창식 연보

△1947년 인천 출생 △서울예고 △68년 트윈 폴리오 △70년 솔로 전향 △<내나라 내겨레> <딩동댕 지난여름> <피리부는 사나이> <토함산> <한번쯤> 등 다수 히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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