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민주주의, 영원한 미완의 기획 : 최장집과 김근태

2013.11.03 22:33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민주주의에 목마른 이 땅에 ‘차가운 이론’과 ‘뜨거운 실천’ 선물

‘풍경’이란 말을 인문·사회과학에서 선구적으로 쓴 두 사람은 일본의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인도 출신의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다. 두 사람이 제시하는 풍경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가라타니에게 풍경(風景)이 근대적 ‘내적 인간’에 의해 발견된 인식의 틀을 뜻한다면, 아파두라이에게 풍경(scape)은 유동적이고 비규칙적인 현대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의미한다. ‘사상의 풍경’이란 인간과 세계를 보는 인식틀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양상을 말한다.

최장집(왼쪽 사진)과 고 김근태(오른쪽)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되는 인물들이다. 최장집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화 작업을 수행했다면 김근태는 치열한 삶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장집(왼쪽 사진)과 고 김근태(오른쪽)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되는 인물들이다. 최장집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화 작업을 수행했다면 김근태는 치열한 삶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최장집, 성숙한 정당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주창
김근태, 재야 투사서 정치권 진출… 민주대연합론·한국적 사회협약 제시
세계화 파도 속 진로, 절차와 실질의 양립 모색은 민주주의 미완의 과제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상의 풍경에서 ‘사상들의 사상’은 단연 민주주의다.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기호들, 예를 들어 서구주의, 마르크스주의, 섹슈얼리티, 글로벌라이제이션 등 그 어떤 것들도 민주주의에 우선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운영 방법인 동시에 ‘타는 목마름’을 느끼게 하는 순정한 가치다.

민주주의(democracy)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 기원한다. 국민(demos)과 지배(kratos)가 결합한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단수이자 복수로 존재한다. 국민의 지배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수이지만, 그 방법과 내용에 따라선 복수로 나타난다. 모든 국민이 정치적 결정에 권한을 직접 행사하는 게 참여민주주의라면, 선출된 대표들에게 정치적 결정을 위임하는 게 대의민주주의다. 이외에도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디지털민주주의, 글로벌민주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여러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라면 누구를 먼저 떠올리게 될까? 어떤 이들은 대통령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지식인 함석헌과 리영희, 김지하를 돌아볼 것이다. 나는 한 지식인과 한 정치가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고 싶다. 최장집과 김근태가 그들이다. 최장집이 ‘이론의 민주주의’를 대표한다면, 김근태는 ‘실천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 최장집, 이론의 민주주의

최장집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 지식인을 평가하는 데는 학문적 연구와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두 기준이 존재한다. 사상가라면 여기에 미래에의 통찰을 더할 수 있다. 이 세 기준을 고려할 때 최장집은 백낙청과 함께 우리 시대 가장 주목할 사상가다.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을 만나 나를 포함한 범486세대 지식인을 소개할 경우 우리 세대는 ‘최장집의 아이들(children)’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장집은 1943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와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고려대로 돌아와 가르치다 2008년 정년퇴임했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발표해 큰 주목을 받았다. 국가-시장-시민사회의 생산적 균형을 강조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해방 이후 가장 체계화된 중도진보의 대안론이었다.

최장집에게 확고한 명성을 안겨준 책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다. 민주화 시대 이후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단 한권의 사회과학 저작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해 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라는 부제를 단 이 저작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한 40년이 넘는 최장집의 고민과 성찰이 집약돼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성취한 학문적 기여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 민주화를 분단국가 형성과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 속에 위치시켜 분석한다. 둘째, 정당정치의 미성숙과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를 한국 정치의 현주소로 진단한다. 셋째, 시민사회 균열이 제대로 반영된 정당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한국 민주주의의 당면 과제로 제시한다. 성숙한 정당정치와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계몽을 여전히 다수의 사회과학자들이 받아들이는 현실은 출간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이 갖는 현재적 가치를 웅변한다.

최근 최장집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창해 다시 한번 큰 관심을 모았다. 그는 강한 국가·대기업에 맞서서 자율적 결사체의 강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시장의 관료화에 맞서는 정당과 이들 간의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를 강조한다. 이 자유주의가 사회 양극화를 강화해온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과도한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진보적 지향을 갖는 게 ‘진보적’ 자유주의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변화된 현실을 적극 고려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2.0 버전이다. 정당정치의 중심성을 강조하고 경제민주화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며 노동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중도진보의 새로운 미래비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당정치의 정상화가 시민정치의 도전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는 중대한 과제다.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는 상호 보완의 대등한 관계로 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 김근태, 실천의 민주주의

김근태의 저서 <희망의 근거>

김근태의 저서 <희망의 근거>

사상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론적 탐구는 물론 실천적 운동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진다. 예를 들어, 전후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존 롤스 못지않게 기여한 이는 마르틴 루터 킹이며, 전후 독일 민주주의 발전에 위르겐 하버마스 못지않게 기여한 이는 빌리 브란트다. 한국 사회에서 운동으로 시작했으되 정치로 나아갔던 민주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이는 김근태일 것이다.

김근태는 1947년 경기 부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1970년대에는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그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주도적으로 결성해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수차례에 걸쳐 당했던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재야’로 불리던 김근태는 1995년 정치권에 진출해 1996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후보를 사퇴했다.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등을 맡는 등 진보개혁 정치의 한 중심을 이뤘던 그는 2011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희망의 근거>는 1995년 그가 재야에서 정치권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표한 책이다. 그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민주대연합론’이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선 재야 사회운동 세력과 제도권 진보개혁 정당이 연대해야 한다는 게 그 핵심이다. 민주대연합론이 그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었지만, 김근태의 정치를 상징하는 논리였다. 최근까지도 ‘연합정치’ 또는 ‘야권연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돼 왔듯이 민주대연합론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미친 영향은 심원했다.

김근태는 운동정치의 투사만이 아니었다. 2006년 그는 열린우리당을 이끌면서 ‘뉴딜’과 ‘잡딜(job deal)’을 제안했다. 이는 한국적 사회협약을 맺자는 발상이었다.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인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 노후 일자리 등을 위한 사회협약의 모색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충격을 시장의 논리가 아닌 민주주의의 논리로 풀려는 그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2008년 총선에서 그는 낙선했다. 그가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발표한 ‘2012년을 점령하라’는 글과 함께였다. ‘참여하는 자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의 지침이 됐다. 어떤 이들은 그를 지나치게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햄릿형 정치가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결과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운동과 정치의 최전선에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했던 그는, 정치학자 정해구가 주장하듯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 민주주의의 미래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국민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초시간적 가치이며, 현대적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정착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모더니티의 프로젝트다. 민주주의가 갖는 이런 이중적 의미에 주목해 안과 밖의 시각에서 우리 민주주의에 부여된 두 과제를 제시하고 싶다.

밖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 민주화 모델로는 세계화의 충격과 진전을 완충하기 어렵다. 세계화가 우리 사회에 가하는 구조적 강제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넘어선 경쟁과 형평, 효율성과 공공성의 새로운 결합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외국인 투자, 고용 없는 성장, 국경 없는 지구문화 등에 민주주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화라는 신념윤리를 넘어서 지속가능한 세계화의 책임윤리를 발휘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 민주주의가 안고 있다는 점이다.

안의 시각에서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모두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에서 볼 수 있듯이 더 이상 유보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더불어, 절차적 민주주의 역시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최근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훼손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나아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는 단계적 개념이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 없이 절차적 민주주의 없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화 과정이 안겨준 중대한 교훈이다.

민주화 시대가 머지않아 종언을 고한다 하더라도 자유·정의·연대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영원한 미완의 기획이다. 최장집과 김근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다운 사회를 일생 내내 꿈꿔왔다. ‘민주주의를 점령하라.’ 다소 거친 표현이지만, 이 말이야말로 두 사람이 우리 세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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