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른 나라, 다른 지도자들 속에서

2013.12.13 20:30 입력 2015.03.23 16:03 수정
권보드래 | 고려대 국문과 교수

숭배와 혐오 사이, 그들의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1960년대에 일어난 쿠데타 숫자는 세계적으로 119회를 헤아린다. 1961년 한국의 5·16 쿠데타는 그 숱한 사건 중 하나였다. 1970년대에 암살당한 국가 원수는 세계적으로 11명. 1979년 10월26일 박정희의 죽음은 그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와 그 시대는 한국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지만, 또한 동시대 세계사의 흐름 속에 위치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마 박정희는 1960년대의 쿠데타와 1970년대의 암살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보유한 지도자 중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일 것이다. 2013년, 적어도 지금 연대를 기준으로, 한국의 5·16 쿠데타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쿠데타였던 듯 보인다.

■ 낫세르·수카르노 등 롤 모델 삼은 ‘소장 박정희’
1961년, 당시 45세였던 소장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라면 상황은 달랐다. 박정희에게는 여러 명의 롤 모델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대통령이었던 나세르가 대표적일 테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며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대만의 장제스-장징궈 등,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작용한 인물은 그 밖에도 여럿 있을 터이다. 카말 압둘 나세르에 대해서는 5·16 직후 박정희 스스로 그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다. 1963년에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총 분량의 거의 10분의 1을 나세르를 논하는 데 할애했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특별히 주목하면서 “우리들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형성 중에 있을 뿐이다”라는 나세르의 말을 인용했다.

‘자유 장교’들이 주도한 1952년 7월 이집트의 격변은 ‘혁명’에 가까웠다고 지금도 인정되고 있다. 당시 이집트는 명목상 독립국가였지만 영국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었다. 입헌왕정 체제였으나 자주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못했던 왕실과 정부는 민심에서 멀리 이반한 상태였다. 군인들의 거사는 ‘대중적 열광’을 얻었고, 왕정을 종료시켰으며, 이어 이집트의 실제적 독립을 획득하는 데로 나아갔다. ‘혁명’ 후 몇 달이 지나 나세르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롭고 강력한 이집트”를 현실화하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추진한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추진했고, 영국과의 군사충돌을 무릅쓰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냈으며, 1960년에는 (제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무렵 나세르에 대한 제3세계 민족주의의 기대와 찬탄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45세의 육군 소장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진은 1979년 10월 열린 리콴유 총리(왼쪽에서 두번째) 환영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세번째)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첫번째)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45세의 육군 소장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진은 1979년 10월 열린 리콴유 총리(왼쪽에서 두번째) 환영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세번째)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첫번째)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세르의 국내 통치는 1인 독재에 가까웠다. 1960~61년 은행과 기간산업을 국유화했을 당시에는 재무부 장관마저 그 사실을 발표 후에야 통지받았다고 한다. 나세르뿐이 아니었다. 항용 반식민의 영웅이었던 제3세계 지도자들은 독립 후 종종 뜻밖의 독재적 면모를 드러내곤 했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매혹됐음에도(혹은 매혹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탄압했다는 점에서도 이들 중 상당수는 공통점이 있다. 이슬람주의자였던 나세르는 예외였던 것 같지만, 대만의 장징궈, 싱가포르의 리콴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은 모두 청년기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거나 그 사상을 가까이서 겪었다. 박정희 역시, 잘 알려져 있듯, 여순사건 당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숙군 대상이 됐던 바 있다.

장징궈는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의 아들이었음에도 1925년, 16세 때 동료 학생들과 함께 소련행을 택한 후 1937년까지 10년 넘게 그 땅에서 살았다. 한때 시베리아로 이주당했음에도 귀국 직전에는 정식으로 소련 공산당원이 되기까지 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및 그 각료들은 좌·우 사이 중도를 표명했으며 드물잖게 사회주의적 신념을 표하곤 했다. ‘국가 자본주의’ 혹은 ‘시장 사회주의’라는 명칭 역시 사양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리콴유의 노선은 영국식 ‘혁명 없는 사회주의’(페비언 사회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된다.

수카르노의 경우 집권 말기 혹독한 좌익 탄압을 방조했음에도 오래도록 ‘인도네시아를 공산주의 캠프로 몰아넣으려 한다’는 의심을 샀다. 이들 대부분이 경제계획을 입안할 수 있었던 데도 사회주의 학습 효과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만으로의 이주 초기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1만여 명을 체포하고 1000여명을 처형했던 장징궈의 이력이 잘 보여주듯, 제3세계 지도자들은 종종 ‘반공’과 ‘멸공’을 통해 자기 입지를 다지곤 했다.

나세르처럼 이들 역시 ‘강하고 자유로운’ 조국을 꿈꾸었다. 그 조국이 살아갈 세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나세르나 수카르노가 달라진 세계 속에서 달라진 조국을 구상했다면, 리콴유나 장징궈는 현존의 세계 질서를 바꿀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조국의 생존과 부강을 모색했던 듯하다. 박정희는 후자에 가까웠다. 웃음기 없이 긴장감으로 팽팽한 그 얼굴, 15도쯤 높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그 시선은 결코 ‘비현실적인’ 세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비판자였던 함석헌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이 여기다. 함석헌은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늘 한민족을 통해 세계 전체를 구제할 것을 기원했다. 박정희는 달랐다.

■ 격렬한 찬반 논쟁 여전한 역사의 평가
박정희는 진심으로 조국을 염려했을 것이다. 권력을 욕심내고 자기 안위를 걱정했을지라도 그것과 조국에 대한 격정을 스스로 구분하지 못했기 쉽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정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일대 개혁”을 위해 “무질서와 비능률”을 척결해야 한다는 유신헌법 반포 당시 명분 역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1960~70년대 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이 공유했던 태도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인권 담론이 부상, 국제적 판단과 개입에서도 중요한 척도로 작용하게 되지만, ‘개발 도상’에 있던 국가의 지도자들은 흔히 자유·민주·권리 같은 개념을 부차화했다. 명분이 너무나 정당하고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으므로, 이들은 ‘강하고 자유로운’ 조국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치는 유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강하고 자유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신념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상주의를 일체 거부하고 현존의 세계 체제 속 조국 근대화에 몰두할 경우 그런 괴리는 한층 커지곤 했다.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출현은 세계적 현상 중 하나다. 1960~70년대, 냉전체제가 와해되기 시작된 가운데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적 명분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이 다수 출현했다. 실제는 다양한데, 그 스펙트럼은 존경할 만한 세계 지도자에서 추악한 독재자에까지 미친다. 박정희는 그토록 많은 이름 중 하나다. 지금껏 ‘박정희’라는 이름을 회자케 하고 있는 원동력, 즉 1960~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도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1966년 독립 후 여러 해 동안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했으며, 대만은 1965년 이후 1981년까지 연 평균 9.4%의 국민총생산(GNP) 실질성장률을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도 오래도록 7%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과시했다. 실제 경제성장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집트마저 1960년대 한때는 연 평균 5.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도 1960년대는 국내총생산(GDP)이 연 평균 4.3%의 성장률을 보였던 때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수치는 7.3%였다.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생생히 기억할 1980년대 중반의 호황이 상당 부분 세계 경제 호황에 말미암았듯,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과 그 성공 및 실패 역시, 한국이 다른 여러 나라와 공유하고 있는 역사다.

박정희를 비롯한 1960~70년대 ‘가난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지도자들은 지금껏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그러하듯 정견이 충돌하고 혐오가 들끓는 - 다양성을 향한 진자운동이라기엔 너무나 소모적인 상황의 한복판에 수십 년 전 지도자였던 이들이 놓여 있는 경우도 많다. 카스트로와 카다피, 호찌민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까지 ‘제3세계’라는 범주로 함께 묶는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들 중 극소수는 사랑받는 민족 지도자로 살아남았다-베트남에서 ‘호 아저씨’가 지금껏 그러하듯. 그러나 ‘호 아저씨’ 호찌민은 1960년대 이후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물러났고, 1960~70년대를 통해, 혹은 그 이후까지 권좌에 있었던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찬반 중 어느 한쪽이 명백한 대세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 한때 신봉했던 사회주의, 집권 후 철저히 탄압 공통점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연방에서 싱가포르가 독립한 후, 1965년부터 20여년간 집권했지만 부정 선거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리콴유와 그 주변의 청교도적 결백성은 유명하다. 그는 후계자 그룹을 선발하고 훈련시켰으며, 총 7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권력을 인수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후 1988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임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신설해 리콴유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본인이 한사코 마다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리콴유마저 숭배와 혐오의 양가감정을 완전히 피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 제목으로마저 선보였듯이 <리콴유가 없었다면 싱가포르는 어떻게 됐을 것인가>.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다른 현재,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재정·금융 서비스의 허브, 깔끔하고도 질서정연한 싱가포르-그 현재는 아들 이센룽을 포함해 후계자들을 직접 선발·교육했던 리콴유가 기획한 연속선상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수카르노는 1968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후 1970년에 숨졌다. 나세르는 대통령으로 재직 중 1970년에 세상을 떠난다. 장징궈는 아버지 장제스가 죽은 후 총통으로 취임, 1988년 임기 중에 타계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권력을 이양하고 벌써 25년, 여전히 존경받는 원로로 생존해 있으나, 1960~70년대의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역시 30여 년 전 수명을 다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지금 한창 격변을 겪고 있는 이집트의 상점에서는 아직껏 나세르의 책이며 연설 테이프를 판매하고 있다고 하고, 수카르노와 장징궈는,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숭배와 향수와 혐오 사이 복잡한 반응의 교차 속에 있다. 박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착잡한 경우다.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힘이, 지혜가,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