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유신 종말의 단초가 된 부마항쟁

2014.01.10 20:56
김성환 | 부산대 HK연구교수

자괴감의 이심전심, 유신의 심장 겨냥해 폭발

■ 서울에서 온 가위

1970년대 말 이화여대에서 조롱의 뜻으로 가위를 보냈더라는 소문이 1974년 이래 교내 시위가 끊긴 탓에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부산대에 떠돌았다. 부산대 학생들은 가위의 수신자를 자처하며 자괴감을 되씹었지만 이는 이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김영삼의 지역구에 위치한 동아대도,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장악한 경남대도 이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거시기’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이 지역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력에 자괴감을 느꼈고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동시에 공분의 표출 방식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가위에 관한 소문이었다. 이 대학생들의 자괴감은 한순간에 부마항쟁으로 폭발한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부마항쟁은 학생 중심의 민주항쟁 성격과 도시 하층민에 의한 도시 봉기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지 않았기에 두 성격은 부마항쟁의 짧은 기간에 혼재되어 있었다. 낮에는 대학생이 게릴라식으로 도로를 점령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밤에는 사진 찍힐 것을 두려워하여 “불 꺼라”를 외치는 도시 하층민이 관공서를 공격하며 부산과 마산의 항쟁을 이끌었다.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추든, 부마항쟁은 독재권력이 종국에 이르러 무엇에 맞닥뜨리게 되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비록 유신정권의 마지막 장면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탄환으로 장식되었지만, 탄환에는 없었던 저항의 근원적인 폭발력을 부마항쟁이 보여주었음은 자명하다. 1970년대 들어 처음으로 시위대가 도심을 점령했으며 파출소, 세무서 등 관공서와 권력에 굴복한 언론사가 공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약탈행위 같은 난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영삼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비난받을 정도로 항쟁의 지향점은 정치적 이해를 넘어서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공수부대가 급파되기까지 이 짧은 시기의 부산과 마산에는 혁명적인 저항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동안 ‘잊혀진 항쟁’으로 남아 있던 부마항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야당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지역의 정치적 정서를 자극했으며, YH사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민중저항이 부산, 마산에도 현실감 있게 전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의 열악한 경제상황에다 과중한 부가가치세로 인해 서민계층의 불만이 쌓인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중소상인까지 합세하여 세무서를 공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해온 대학생·시민사회의 민주화 기반 역시 부마항쟁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대학생 지하서클은 계속되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운동과 독서모임도 역량을 키워나갔다. 1981년 ‘부림사건’으로 엮인 이들의 독서·학습모임도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해온 민주화 운동 세력의 중추였기에 부마항쟁의 뜨거운 열기는 한순간 급격하게 타오를 수 있었다.

1979년 10월16일 시민과 대학생들이 부산 광복동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9년 10월16일 시민과 대학생들이 부산 광복동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심성의 연대로서 부마항쟁

그러나 역사적 평가와 분석만으로 부마항쟁의 근본적인 동력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찰이 상주하던 1970년대 대학의 살풍경 속에서, 게다가 유신대학의 고분고분한 학생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도심으로 진출하여 시민과 합세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학내 시위를 준비한 조직이 존재한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까지는 기획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부마항쟁의 해방적 장면은 자발적인 동기부여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실 부마항쟁은 작은 실패에서 시작되었다. ‘10·16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항쟁의 전날, 부산대에서는 시위를 주도한 이들이 교내에 유인물을 뿌리고 도서관 앞으로 모일 것을 알렸지만 이에 호응한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상황은 달라졌다. 전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선동에 교내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움직였다. 이 같은 극적인 상황변화는 전날의 실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0월15일 도서관 앞에 무심하게 흩어진 선언문은 시위 실패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신대학생의 내면에 가라앉았던 자괴감과 분노를 되살리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10월16일 다시 유인물이 뿌려졌을 때 수천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온 것은 세련되게 조직된 선전 덕분이 아니라 저항의 심성이 서로에게 전염되듯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유신대학생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포동, 광복동 일대의 도심으로 진출하자 그 소식은 근처 동아대, 고신대 학생에게도 전해졌다. 자신들의 앞마당을 뺏길 수 없다는 묘한 자존심과 함께 유신체제 내내 소문 속 문제의 가위를 받은 듯한 부끄러움 혹은 모멸의 심성이 대량으로 전염되었다. 고립되어 있던 개인의 내면은 해방된 공간에서 극적으로 접속하면서 커다란 항쟁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부산에서 마산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상황이 가라앉던 18일에 결집한 경남대 시위대가 맨 먼저 향한 곳은 4·19의 시작점이 된 3·15의거 기념탑 앞이었다. 그곳에서 경남대학생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 주십시오. 우린 전국 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벌일 때 학교당국의 농간으로 ‘유신찬성 데모’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라는 고해성사는 부마항쟁을 일으킨 청년들의 심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랜 기간 묵혀 두었던 자존심이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한 심성을 서로가 확인함으로써 이들은 거대한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부마항쟁의 시위는 부끄러움과 분노라는 심성의 전도(傳道)와 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성의 연대는 조직적인 기획 없이도 시·도의 경계를 넘어 북상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비상계엄 선포를 보도한 경향신문 10월18일자 1면 기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상계엄 선포를 보도한 경향신문 10월18일자 1면 기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연대의 힘과 권력이 느낀 두려움

유신의 심장이 두려워한 것은 이 전도현상이다. 현장을 목격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열기가 5대 도시에서 재현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노라 말했고, 100만명쯤 죽여버려도 별일 없다고 경호실장이 부추겼지만, 이는 오만보다도 본능적인 두려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특히 공화당의 텃밭으로 다져진 부산·경남지방에서 반정부 소요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충격은 컸던 모양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가 도농의 경계를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면, 1970년대 들어 이 경계는 교묘하게 동서 간의 지역감정으로 전환된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부산·경남의 항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과 다름없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전도된 것같이 대구를 거쳐 서울로 전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부마항쟁이 종료된 후 대구의 경북대와 영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10월25일에 계명대에서 시위가 발생한다. 부산의 시위에 놀라 다급하게 휴교를 알린 경남대 교내방송이 오히려 집결신호 역할을 한 것에서 보듯이 저항은 휴교령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결국 부마항쟁을 거치면서 유신정권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붕괴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의 심장을 겨냥한 치명적인 사건으로 떠올랐다.

부마항쟁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치밀하게 기획된 사건도 아니었다. 부산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 커다란 저항의 발상이었고 실제 항쟁은 그 이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어진 대학생들의 심성의 연대에 거리의 시민들도 공감할 만큼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정권은 언론을 통해 YH사건을 적군파 빨갱이의 소행으로 매도했지만 마산 공단의 노동자들은 여공들의 절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서울 학생들이 합류한 지역 사회조직도 동질감으로 지역적 차이를 무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대는 도시의 하층민에게로 향했다. 경제성장의 혜택에서 가장 멀리 소외되었기에 그들의 저항은 훨씬 더 격렬했다. 대통령은 ‘식당뽀이’나 ‘똘마니’들이 난동을 피운다고 단정했다. 또 목격자에 따라 깡패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산시경은 20세 전후 때밀이, 식당 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의 ‘불량성향자’가 대학생으로 가장했다고 분석했지만, 시민들은 오인하지 않았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는 물론, 다방 아가씨와 호스티스까지 거리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유신도 박정희도 이젠 갔다’고 생각했다. 항쟁 초반을 주도한 대학생들이 점차 흩어지고 도시 하층민들이 다시 거리를 메운 것은 부마항쟁만의 현상은 아니다. 4·19혁명과 1980년 광주도 이와 같았다. 이 ‘똘마니’, ‘깡패’ 들은 유신 체제 하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같은 심성으로 엮인 사람들이었다.

전면적인 항쟁이 서울이 아닌 정치적 텃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내면으로부터의 저항이 이미 대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1980년 광주와도 직접 연결될 수 있었으며 민주화 운동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얻게 되었다.

■ 소외된 이들의 가능성

그런데 반유신의 저항이 왜 하필 이곳에서 일어났을까. 아니, 지방의 저항이 어떻게 유신정권의 종말을 부른 결정적 사건이 될 수 있었을까. 이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 벌어졌다면 상황 전개는 달랐을지 모른다. 여당의 텃밭, 혹은 집토끼쯤으로 여겼을지라도 부산·경남은 항상 한국의 변두리였다. 그러나 변두리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정권의 감시와 통제도 주변부 내면의 저항은 소멸시키지 못한다. 지역의 소외된 이들의 심성이 짙어질수록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집중된다. 그리고 그 심성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보이지 않는 연대를 확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항의 불길을 일으킨 것이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대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어지는 반유신의 심성들은 주변부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 점에서 부마항쟁은 서울보다 더 큰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 주변에서 중심을 향하는 힘의 전복적 가능성은 중심에서 주변을 향하는 지배의 힘보다 훨씬 거대했다.

부마항쟁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4·19, 5·18,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을 잇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부마항쟁은 지역적 특이성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가진 가치의 일반성을 증명한 것이다. 자발적인 저항이 집결하는 장면은 부끄러움과 분노라는 심성이 연대했기에 가능했으며 이 연대가 계층의 차이와 지역의 경계를 넘을 수 있음을 보인 것도 부마항쟁이었다. 유신은 이때 이미 끝나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나약한 이들이 부끄러움과 분노를 고백하며 서로의 ‘안녕’을 물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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