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공자와 ‘황제내경’

2014.08.29 21:28 입력 2014.08.29 21:38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그리스에 ‘히포크라테스 전집’ 있다면, 중국엔 ‘황제내경’ 있다

▲ 신이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 의술을 다룬 의학책, 비행기도 전화도 없었던 이역만리 두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은 경이로워

“선생께서 병이 깊어지자 자로가 기도하기를 청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자로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전해오는 제문(祭文)에 이르길, 너를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기도한다, 라고 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기도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 <논어> ‘술이(述而)’편 34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의 병세가 심해지자 제자 자로(子路, 기원전 542~480년)가 스승에게 병에서 회복되도록 기도를 권했지만 공자가 그것을 거절하는 대화이다.

한편 논어 ‘옹야(雍也)’편 6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백우가 병에 걸리자 선생께서 문병을 가셨다. 창문을 통해 백우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구나.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 ‘운명(命)’을 언급했다고 해서 공자를 운명론자로 볼 일은 아닐 터이다. 중병에 걸린 애제자 염백우(염伯牛)를 안타깝게 여기는 공자의 심경을 읽으면 될 것이다.

“선생께서는 귀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았다” “내가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일체의 기복적(祈福的)인 태도를 배격하고 내세에 대한 관심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질병에 대한 생각과 태도도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독일 베를린 마르찬의 ‘중국 정원’에 서 있는 공자상. 공자가 직접 의술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의 합리적, 인본주의적 사상은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의학의 탄생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독일 베를린 마르찬의 ‘중국 정원’에 서 있는 공자상. 공자가 직접 의술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의 합리적, 인본주의적 사상은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의학의 탄생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 병 걸린 공자, 애제자 부탁에도 기도 안 해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적 의학이 탄생한 데에는 탈레스(기원전 625~547년경)와 같은 (자연)철학자의 등장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공자를 비롯해서 춘추시대 후기와 전국시대에 나타난 수많은 사상가들(제자백가:諸子百家)의 구체적인 주장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대체로 이전 시대에 종교적, 초자연적 힘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합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사상적 배경 위에서 중국 최초의 의학책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제내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 후기 내지는 전한시대(기원전 206~서기 8년)라고 여겨진다.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대략 비슷한 시기이다. 공식적인 역사책에 최초로 기록된 것은 반고(班固, 서기 32~92년)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이고 그보다 앞선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135~86년)의 <사기(史記)>에는 언급이 없다. <황제내경>은 그 뒤로 계속 첨삭, 수정,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서기 762년 무렵 왕빙(王빙)에 의해서이다.

■ 문답 형식으로 풀어 쓴 중국 최초 의학책

<황제내경>은 황제(黃帝)와 기백(岐伯), 뇌공(雷公), 백고(伯高) 등이 나눈 문답 형식으로 기록된 의학책이다. 중국 개국 설화에 ‘3황 5제’의 하나로 등장하는 황제는 실존 여부가 확실치 않아 한국사의 단군과 비슷한 존재이다. 또 언제부터인가 민간에서는 의술이 뛰어난 인물로 숭앙의 대상이었다. 이런 황제와 유명한 의사로 전해져 내려오는 기백 등이 의학의 여러 문제에 관해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 <황제내경>인 것이다.

<황제내경>이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누대에 걸쳐 여러 명의 저자들이 전설 속 명의들의 입을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 것일 터이다. 그에 따라 내용과 형식에서 어긋나고 모순되는 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황제내경>을 관통하는 핵심적 특성은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이다. 질병의 초자연성을 부정, 배격하고 건강 유지와 병 치료에 대해 합리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황제내경>과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매우 유사하다. 또한 두 가지 책은 탄생 이래 동과 서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려왔다. 다만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1700년대에 의학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반면, <황제내경>은 여전히 현실적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고 있는 점이 뚜렷한 차이이다.

언제 이 구절이 들어갔는지 확실치 않지만 지금 전해지는 <황제내경>에는 질환을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경우(六不治)의 하나로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信巫不信醫)”을 꼽고 있다. 또 사마천의 <사기> ‘편작 창공 열전(扁鵲倉公列傳)’에도 마찬가지 구절이 있다. 편작(扁鵲)의 실존 여부 역시 명확하지 않지만 ‘열전’의 그 구절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적어도 사마천이 사기를 펴낸 기원전 100년 무렵에는 무당의사(巫醫)와 의사를 분간하고, 의사들이 무당의사를 배격한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의사와 의술을 뜻하는 글자인 ‘의원 의(醫)’자에 대해 알아보자.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甲骨文)에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醫’는 나오지 않고 ‘’만 있다. 무당을 뜻하는 ‘무(巫)’는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한다. ‘’는 본디 화살 통을 뜻하는 상형문자에서 출발하여 화살을 막아주는 군사시설물을 가리키는 글자로도 쓰였고, 화살에 맞은 사람을 치료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醫’가 처음 나타난 것은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210년) 때 이사(李斯, 기원전 280~208년)가 글자를 통일하기 위해 만든 문자인 소전(小篆)에 이르러서이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 고전들의 여러 판본을 살펴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 한자 ‘醫’자 변천으로 본 무당과 의사

이체자(異體字)로 분류되는 ‘’는 사용된 경우가 많지 않거니와 가장 오래된 용례가 전한시대 말기이다. 따라서 ‘醫’보다 나중에 나타난 글자이거나 적어도 먼저 생긴 글자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럼 ‘’와 ‘醫’를 비교해보자. 두 글자의 윗부분은 같고 아랫부분은 각각 ‘무(巫)’와 ‘유(酉)’이다. 즉 ‘’는 무당(巫)이 하는 치료 행위를 뜻한다. ‘유(酉)’는 원래 ‘주(酒)’인데 글자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 ’가 빠진 것이라고 해석되며, ‘酒’는 요즈음도 “술은 잘 쓰면 약이요 잘못 쓰면 독”이라고 하듯이 약을 뜻한다. (독도 ‘독약’, 결국 약이다.) 즉 ‘醫’는 약을 써서 하는 치료 행위를 뜻하며, 무당이 하는 것과 다른 합리적 의술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의’자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보자. 처음에는 ‘’가 쓰이다가 기원전 200년대에 오늘날 사용하는 ‘醫’가 나타났다. 합리주의적 의학의 탄생을 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醫’는 비슷하거나 조금 후대에 생긴 ‘’와 함께 쓰이다 언제쯤인가 글자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를 옥편에 가두었다. 합리적 의술이 무당의술을 축출한 것이다. (글자에 대한 논의는 중국 전통철학 연구자로 고전과 한문에 해박한 민족의학연구원의 전호근 원장과 안은수 연구실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필자는 명확한 고증도 없이 먼저 ‘’가 쓰이다 새로운 글자 ‘醫’에 밀려났다고 말해왔는데 그러한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다.)

기원전 몇 세기 무렵 그리스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합리적 의학이 탄생했다. 의학이 든든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로는 머나먼 두 문명권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의학혁명이 일어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히포크라테스와 고대 그리스 의학에 대해서만 주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서유럽(미국을 포함해서)이 학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만큼 상대적으로 고대 그리스 의학에 대한 연구가 잘되어 있기도 하다.

■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똑같은 평가를

그럼 어떻게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 중국에서 비슷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났을까?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교류와 소통 방법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인류 문명의 발전과정에서 거치게 마련인 공통 경로가 있어서일까?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합리적 의학의 탄생에 앞서서 신이 아니라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과 과학이 등장한 것도 공통적이다.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그리스에서는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엠페도클레스 등 철학자이자 과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고,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장자, 맹자 등 사상가들이 백가쟁명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스와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도 상황이 비슷했다. 요컨대 합리적 의학의 탄생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 무렵 대표적인 고대 문명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역사적 의미를 칭송한다면, <황제내경>에 대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적 관점에서 <황제내경>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한다면,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평가를 하는 것이 공정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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