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윌리엄 하비와 현대 생리학의 출발

2014.11.07 20:42 입력 2014.11.19 16:46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1400년간 ‘잘못된 진리’ 깬 대전환… “혈액은 순환한다”

▲ ‘의학 변방’ 영국 출신 의학도‘혈액은 중심서 말초로 흐른다’ 전통적 진리에 의문 품어
▲ 동물실험 통해 가설 세우고 30년 연구 끝 ‘혈액순환론’ 공표
▲ 기존 생리학 핵심 무너지고 실험에 바탕 둔 현대 생리학 탄생

1901년부터 수여된 노벨 의학상의 정식 명칭은 노벨 생리의학상. 영어로는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이다. 노벨상이 제정되던 당시 (의)학계와 사회에서 생리학이 차지한 비중과 성가를 짐작할 수 있는 명칭이다. 노벨(Alfred Nobel, 1833-1896) 자신도 독자적인 생리학 연구소를 운영했을 정도로 생리학, 특히 실험생리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 생리학자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실험의학 방법 서설>(1865년)은 생리학자와 의사뿐만 아니라 교양인의 필독서였다. 베르나르는 그 책에서 생리학과 의학이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는 실증과학이어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인이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거나 또는 다른 사실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학을 부정하는 셈이다.” 지식인들은 베르나르의 사상과 실험에 열광했다. 베르나르가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에서 자신의 실험 연구를 공개적으로 시연할 때면 자네(Paul Janet, 1823-1899)와 같은 철학자,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을 비롯한 역사학자들도 빠짐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르낭은 역사학도 생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이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졸라(Emile Zola, 1840-1902)는 베르나르를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문학이론서의 제목을 <실험소설론>이라고 했다. 이들은 생리학이 탐구하는 생명의 기능들은 궁극적으로 철학과 연결되므로 생리학은 의학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분야라고 여겼다.

이렇듯 현대적 생리학이 학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지만 그 출발은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회에서 현대의학과 다른 의학 체계들과의 차이점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인체해부학의 유무라고 했는데, 인체의 기능을 설명하는 생리학은 어떤 의학 체계에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전통 서양의학에도 생리학은 있었다. 체액설에 기반을 둔 생리학이었다. 하지만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생리학은 당시 학문의 변방국가 출신의 한 의학도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영국 왕 찰스 1세에게 ‘혈액 순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하비. 어린 소년은 미래의 찰스 2세이다. 영국 화가 한나(Robert Hannah)의 1848년 작품.

영국 왕 찰스 1세에게 ‘혈액 순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하비. 어린 소년은 미래의 찰스 2세이다. 영국 화가 한나(Robert Hannah)의 1848년 작품.

베살리우스를 배출한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은 그 뒤에도 인체해부학의 메카라는 명성을 유지했다. 콜롬보(Realdo Colombo, 1516-1559), 팔로피우스(Fallopius, 1523-1562), 파브리키우스(Fabricus ab Aqu

-apendente, 1537-1619)와 같은 당대 대표적인 해부학 교수들이 연구와 교육에서 계속 빼어난 업적을 남긴 덕분이다. 1599년 그러한 파도바 대학에 영국 청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가 찾아왔다. 1602년 4월 졸업할 때까지 30개월의 유학 기간은 하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의학 역사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하비는 1578년 4월1일 영국 켄트 주 폭스톤에서 아홉 형제자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로 마을의 유지였으며 다른 형제들도 사업가로 성공했다. 하비는 집안에서 예외적으로 의학에 특별한 흥미가 있어서 1593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 받은 교육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직 영국과 케임브리지 대학은 의학을 비롯한 학문 분야에서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케임브리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하비가 찾았던 파도바 대학에는 파브리키우스를 비롯해서 쟁쟁한 교수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1594년 파브리키우스의 요청으로 파도바 대학에는 세계 최초로 상설적인 해부학 전용 실습강의실이 만들어졌다. 이 가파른 계단형 강의실은 지금도 의과대학생들 교육에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도바를 찾는 여행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탐방 장소이다.

하비가 심장 박동과 혈액 운동의 특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 강의실에서였다. 하비는 해부학만을 공부하려고 파도바에 유학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부강의실에서 파브리키우스로부터 정맥판막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예기치 못했던 탐구심이 솟아났다. 하비는 어느 누구도 품지 않았던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맥판막이 정맥 벽에 붙어 있는 방향이 문제였다. 그것은 갈레노스의 설명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1594년 사상 최초로 파도바 대학에 세워진 상설적인 해부학 전용 실습강의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가까이에서 인체해부 장면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1594년 사상 최초로 파도바 대학에 세워진 상설적인 해부학 전용 실습강의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가까이에서 인체해부 장면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정맥판막의 모식도

정맥판막의 모식도

이제 혈액 운동에 관한 갈레노스의 이론을 살펴보자. 갈레노스는 사람이 섭취한 음식물이 소화, 흡수된 뒤 간에서 1차 변화를 받아 자연정기(自然精氣)를 띤 혈액이 되며, 그 혈액은 정맥을 따라 말초로 가서 쓰이고 없어진다고 했다. 자연정기를 띤 혈액 중 일부는 대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가서 폐를 통해 들어온 생명정기(生命精氣)를 받아 두번째 혈액이 되며, 그 혈액은 동맥을 따라 말초로 가서 소모된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몸의 각 부위가 끊임없이 생명정기를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명정기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체라는 소우주를 둘러싼 대우주, 즉 자연이다. 대우주와 소우주, 즉 자연과 인체의 소통이 끊어지면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며, 호흡은 외부로부터 생명의 기(氣)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생명정기를 띤 혈액 중 일부는 경동맥과 척추동맥을 타고 뇌로 가서 세번째 변화를 거쳐 동물정기(動物精氣)를 얻게 된다. 동물정기를 지닌 혈액은 신경을 따라 말초로 이동해서 소비된다. 사람을 비롯해서 동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동물정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레노스의 설명은 간혹 세르베투스(Servetus, 1509-1553) 등의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절대적인 진리로서 1400년 넘게 신봉되어 왔다.

이런 차에 하비가 등장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갈레노스의 말대로 혈액이 몸의 중심부인 간에서 말초 쪽으로 흐른다면 정맥판막은 정맥 속의 혈액 운동을 방해하는 구실을 할 것이다(모식도 참조). 하비는 정맥판막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한 의문을 품었다. 하비는 충직한 갈레노스주의자였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갈레노스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 전통과 권위에 맹종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비는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맥판막의 모식도에서 보듯이, 정맥판막은 정맥 속의 혈액이 제 방향, 즉 말초부 쪽에서 중심부 쪽으로 흐를 때 열리며(왼쪽), 거꾸로 흐르려 할 때는 닫혀서(오른쪽) 역류를 방지하는 작용을 한다. 갈레노스의 ‘교리’는 실제의 혈액 운동과 정반대이다.

정맥판막의 존재와 그것이 붙은 방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특히 의사라면 2000여년 전부터 일상적으로 경험해온 시술에도 갈레노스의 주장을 반박할 단서가 있었다. 사혈(瀉血)을 하는 경우 절개할 정맥이 도드라지도록 천이나 고무줄 등으로 묶었다. 요즈음도 정맥주사나 채혈할 때 마찬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묶었을 때 도드라지는 정맥은 말초 쪽인가, 중심 쪽인가? 당연히 말초부 쪽의 정맥이다. 정맥 속의 혈액이 중심부에서 말초로 흐른다는 갈레노스의 주장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하비 이외에 그 점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다.

하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갈레노스의 설명대로라면 얼마나 많은 혈액이 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하비는 생산된 전체 혈액 가운데 일부만이 지나가는 심장의 용적과 심장에서 동맥으로 분출되는 혈액의 양을 실험동물에서 측정했다. 정량적인 실험을 한 것으로, 당시로는 가히 선구적인 행동이었다. 실험동물을 마취할 수단조차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동물실험이라기보다는 도살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쨌든 하비는 그러한 정량적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갈레노스의 주장이 맞는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혈액이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섭취하는 음식물의 양을 생각할 때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관찰과 실험 데이터가 있다고 저절로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론으로 설명해내야 한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틀렸다! 대신 하비는 궁리 끝에 혈액이 순환한다는 가설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데이터를 그 가설에 넣어보니 모든 게 설명되었다. 따라서 “혈액은 순환한다”. 하비는 파도바 유학 시절 가졌던 의문을 바탕으로 30년 가까이 연구한 결과를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간략하게 de Motu Cordis)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세상에 공표했다. 갈레노스 생리학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렇게 허물어졌다. 대신 관찰과 실험, 그리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 바탕을 둔 현대적 생리학이 탄생했다.

하비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주치의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철두철미한 보수적 왕당파였다. 정치사상적으로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지만 현대적 생리학의 탄생과 발전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진보적 의학자였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