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모르가니와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 의학의 종언

2014.11.21 21:55 입력 2014.11.21 22:15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히포크라테스도 갈레노스도 틀렸다” 모르가니, 2000년의 전통의학에 종지부

▲ 18세기 활동 이탈리아 해부학자 50년 넘게 증례 모아 2500쪽 저서
임상과 부검 소견의 관련성 규명
‘병은 체액 아닌 장기에 자리한다’ 질병의 실체 찾아 치료하는 계기

“야윈 몸집에 포도주 애호가인 74세 난 노인이 한 달 전부터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싣듯이 걸었다. 하인들은 절뚝거림을 눈치 챘지만 노인은 그것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불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런 지 22일째 복부에 통증이 생기자 예전부터 널리 쓰여 온 테리아카 가루로 스스로를 치료했다. 고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12일 뒤, 오른쪽 하복부에 ‘개들이 물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 생겼다. 통증 부위는 부어올랐고, 내가 손으로 누르자 단단하게 뭉친 것이 만져졌다. 나는 맥박이 정상이 아닌데다, 눈이 움푹 꺼지고, 혀가 말랐음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아침, 맥박이 더 빠르게 뛰었다. 통증과 단단한 덩어리는 이제 가운데와 왼쪽 하복부에까지 번졌다. 나는 혈액을 200g가량 빼라고 처방했다. 사혈을 한 부위에는 피가 굳어 누런 딱지가 생겼다. 환자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날 밤은 상황이 극히 좋지 않았다.

다음날, 노인은 시큼한 액체를 토해냈다. 게다가 발음이 불분명해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또 다음날 아침에는 15분 정도 지속되는 경련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변 같은 악취가 나는 토사물도 쏟아냈다. 호흡도 더 곤란해졌다. 그날 저녁, 반짝 정신이 든 노인은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경련을 하더니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에 시행한 부검에서 눈에 띄는 소견이 오른쪽 하복부의 복강에 있었다. 맹장의 기저부, 즉 대장이 시작되는 곳에 생긴 괴저가 다리 쪽으로 가는 근육 위에 걸쳐 있었다. 냄새가 지독한 농양이 그 근육 깊숙이 박혀 있어서 절개하지 않고는 떼어 낼 방법이 없었다. 농양을 절개하자 피고름이 솟았다.”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에 실려 있는 모르가니의 초상화는 프랑스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장 레나르(Jean Renard, 1744~1807)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레나르가 17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진위가 의심스럽다.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에 실려 있는 모르가니의 초상화는 프랑스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장 레나르(Jean Renard, 1744~1807)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레나르가 17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진위가 의심스럽다.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이 임상 및 부검 기록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탈리아 해부학 연구자 모르가니(Giovanni Battista Morgagni, 1682~1771)가 스물세 살 나던 1705년에 작성한 것이다. 환자의 사인은 거의 틀림없이 충수염(맹장염은 부정확한 용어이다) 파열이다. 치료법은 물론 충수염이라는 병명도 없던 시절이지만, 정확한 묘사 덕분에 우리는 300년 전 환자가 앓았던 병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모르가니는 이 무렵부터 50년이 넘는 동안 많은 증례를 모아 의학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의학의 교황’이라고 불렸고 모르가니의 업적을 더욱 발전시킨 독일의 병리학자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는 “모르가니의 공적 덕택에 케케묵은 의학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의학이 탄생했다. 그의 책이 나오고서야 비로소 의학은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라고 썼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모르가니는 학생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해부학자인 발살바(Antonio Valsalva, 1666~1723)의 해부학 실습을 거드는 등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1701년 졸업과 동시에 발살바의 조수가 된 그는 잠시 고향인 포를리에서 개업을 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파도바 대학 이론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해부학 교수직을 맡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부학 연구자로 빼어난 업적을 쌓으며 유럽 각지에서 찾아온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대적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의 산실이 된 파도바 대학의 교표(校標). 파도바 대학은 유럽 최초의 근대식 대학(university)인 볼로냐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1222년 학문의 자유를 찾아 이주해서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 북부에 소재한 두 대학은 18세기까지 수백년 동안 유럽 의학을 주도하며 현대의학의 성립에 기여했다.

현대적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의 산실이 된 파도바 대학의 교표(校標). 파도바 대학은 유럽 최초의 근대식 대학(university)인 볼로냐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1222년 학문의 자유를 찾아 이주해서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 북부에 소재한 두 대학은 18세기까지 수백년 동안 유럽 의학을 주도하며 현대의학의 성립에 기여했다.

앞에서 언급한 피르호는 현대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요소로 동물실험, 임상관찰과 더불어 부검(剖檢)을 꼽았다. 부검이 체계적으로 행해진 역사는 길지 않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잠시 시행되었던 부검이 중세 후기에 부활했지만 17세기에 들어서도 체계가 없었고, 임상 소견과 부검 소견 사이의 상관관계도 별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증상과 부검 결과를 연관 짓는 시도는 1679년 보네투스(Theophilus Bonetus, 1620~1689)가 <부검 실례(Sepulchretum sive Anatomica Practica)>를 출간하며 가시화되었다.

보네투스의 의도는 병력들을 검토하고 인체에 생긴 변화를 관찰한 부검 결과들을 종합하여 병의 숨은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보네투스는 임상 기록과 부검 보고가 연관되는 470명 저자의 증례 3000여개를 정리했지만 원래 의도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의 책은 잘못된 인용과 오역, 부정확한 판단으로 얼룩졌다. 청년의사 모르가니는 보네투스의 의도 자체는 올바르므로 책의 오류를 바로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은 <부검 실례>의 개정이지만 결국 아주 새로운 작업으로 마무리된다.

모르가니는 700례(대부분 스스로 한 것이고 일부는 발살바 등 다른 학자의 것을 인용했다)에 가까운 부검 소견과 그 환자들 생전의 임상 소견을 연결 지어 검토하여 1761년에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De Sedibus et Causis Morborum per Anatomem Indagatis)>라는 2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출간했다. 거의 80세가 되어서야 책이 나온 것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미루었기 때문이다.

1761년에 발간된 모르가니의 대저작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의 초판 표지.

1761년에 발간된 모르가니의 대저작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의 초판 표지.

그의 저서는 1741년부터 가상의 젊은이에게 보낸 70통의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편지들에 담긴 약 700개의 증례는 임상 자료와 관련된 부검 결과를 보여주는 한편, 역사적 배경과 다른 저자들의 연구를 언급하기도 하며 때로는 질병의 경과를 밝히기 위해 수행한 실험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 책은 모든 증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질서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정확하고 세심한 색인까지 달려 있어 임상의학의 방대한 문헌박물관 구실을 한다. 삽화가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그 책에서 모르가니는 각각의 증례에 대해 우선 환자 생전의 임상적 특성을 기술하고 난 뒤 부검에서 보이는 해부병리학적 특징을 묘사하고 둘 사이의 관련성을 규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질병은 장기라는 국소부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르가니의 모범을 따라 의사들은 ‘체액의 불균형’이 아니라 ‘고통 받아 울부짖는 장기’를 통해 환자의 증상을 설명하려 애쓰게 되었다. 그리고 질병의 본체라고 생각되는 병변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여 청진법(1816년)과 방사선진단법(1895년) 등 새로운 진단방법이 개발되었다.

모르가니의 업적은 자신이 환자를 치료할 책임이 있는 의사라는 지각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해부학은 질병을 이해하기 위한 최상의 도구였으며 따라서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모르가니는 기나긴 생애 내내 환자들을 진료했다. 모르가니의 환자 진료 기록 중 100편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낸 자르코(Saul Jarcho)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가니는 해부학 연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했다. 해부학은 그가 임상의사로서도 뛰어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강과 질병은 대체로 몸 전체의 조화·균형과 관련된 문제였다. 한의학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 여부가,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학에서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등 네 가지 체액의 균형 여부가 건강과 질병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이에 따라 환자의 치료도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는 것이 핵심 원리였다. 약 체계 역시 부족한 것을 보(補)하는 보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동서의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즉 질병관과 치료술, 그리고 약물학 모두 전인적(全人的)이고 전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의학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들어 ‘본체론’(本體論)적인 질병관이 싹트면서부터다. 즉 병은 인간(의 신체)을 구성하는 체액들 사이의 균형이 깨어진 전인적인 상태가 아니라 신체의 특정한 국소 부위에 생긴 해부병리학적인 변화(병변)라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18세기 중엽 모르가니에 의해 탄생한 장기(臟器)병리학은 19세기초 프랑스의 비샤(Xavier Bichat, 1771~1802)에 의해 조직병리학으로, 19세기 중엽 독일의 피르호 등에 의해 세포병리학으로 발전했다. 다시 말해 모르가니는 질병의 자리를 ‘장기’라고 했고, 비샤는 그것을 ‘조직’으로 좁혔으며, 피르호는 ‘세포’로 더욱 구체화했다.

16세기 베살리우스 이래 빠르게 발전한 인체해부학은 인간의 신체를 해체하고 분절화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질병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병리학, 즉 해부병리학을 탄생시켰다. 이로써 질병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실체’가 되었고 의학은 이러한 실체를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발견(진단)하여 그것을 제거하거나 교정(치료)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또한 의학관이 이렇게 분절적·분석적·객관적인 특성을 띠게 되면서 의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전자공학, 통계학 등 여러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를 손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과학적 의학’이 탄생한 것이다.

모르가니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인, 질병의 구체적인 자리를 찾으려는 국소병리학(해부병리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000년 넘게 주도권을 가졌던 체액병리학의 지위를 넘겨받게 되었다. 또한 이로써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로 대표되는 서양의 전통의학은 운명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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