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근대 유럽 초기의 여성 의학 교수들

2014.12.05 21:15 입력 2014.12.05 21:46 수정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 500년 전 병원 설립한 갈린도, 세계 최초 여성 대학교수 바시, 남편 거들다 교수가 된 만졸리니… ‘금녀의 벽’ 낮은 이탈리아가 키웠다

대학은 20세기 이전에는 남성들의 독점물이었다. 2009년에 제작된 에스파냐 영화 <아고라>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의 천문학·철학 교수 히파티아(Hypatia, 370?~415)처럼 여자 교수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고대 시대의 대학은 금녀(禁女)의 집에 가까웠다.

서기 395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무이한 국교가 되면서 서양문명권에서 사라졌던 대학이 중세 후기에 ‘universitatis’(라틴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고서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의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위 직종의 여성 의료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대학 의학부의 학생, 더구나 교수는 꿈꾸기조차 어려웠다. 영미권의 경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7전8기의 노력으로 의과대학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국의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1821~1910), 미국의 재코비(Mary Putnam Jacobi, 1842~1906)와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18세기까지 의학을 비롯해서 모든 분야의 학문을 주도하던 이탈리아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학문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탈리아 대학들이 여성의 진출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오늘은 여성들에게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대학에서 의학 교육과 연구를 담당했던 여성 의학 교수들에 대해 살펴본다.

1732년 4월17일 볼로냐 시 공회소(Palazzo Pubblico)에서 열린 공개토론회(볼로냐 시 문서보관소 소장). 바시(그림의 왼쪽 위)는 이 자리에서 5명의 볼로냐 대학 교수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충실히 답함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다.

1732년 4월17일 볼로냐 시 공회소(Palazzo Pubblico)에서 열린 공개토론회(볼로냐 시 문서보관소 소장). 바시(그림의 왼쪽 위)는 이 자리에서 5명의 볼로냐 대학 교수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충실히 답함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다.

갈린도(Beatriz Galindo, 1468~1534)는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스파냐가 자랑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여성 의사이자 철학자이다. 에스파냐의 살라만카에서 태어난 갈린도는 어려서부터 학문, 특히 라틴어에 빼어난 자질을 보여 멀리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대학(Schola Medica Salernitana)으로 유학을 갔다. 재능도 출중했거니와 당시 사정에 비추어 용기와 진취성도 매우 뛰어났다.

살레르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금의환향한 갈린도는 살라만카 대학 교수로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카스티야 왕실의 멘토로서 영국 헨리 8세의 왕비가 된 아라곤의 캐서린과 ‘미남 왕’ 펠리페 1세의 왕비가 된 후아나 라 로카를 가르쳤다. 1491년 카스티야 왕실의 고위 신료(臣僚)인 프란치스코 라미레즈와 결혼해서 다섯 자녀를 낳은 골린도는 1506년 남편과 함께 마드리드에 산타크루즈 성(聖)십자병원을 설립했다. 세워진 지 500년이 넘은 이 병원은 지금도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갈린도의 저작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유감스럽게도 그의 학문적 면모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는 2011년 9월29일부터 11월11일까지 한 달이 넘도록 ‘세계 최초의 여성 대학 교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행사의 주인공은 1711년 10월29일에 출생한 바시(Laura Maria Caterina Bassi, 1711~1778)이다.

볼로냐에서 부유한 법률가의 딸로 태어난 바시는 열세살부터 7년 동안 볼로냐 대학 의학부 교수인 타코니(Gaetano Tacconi)의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때 배운 과목은 의학과 해부학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 철학과 수사학, 물리학과 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은 바시는 만 20세가 된 1732년 3월20일 볼로냐 과학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되었고, 이어서 4월17일에는 볼로냐 대교구의 람베르티니(Prospero Lambertini, 1675~1758) 추기경의 주선으로 스승인 타코니를 비롯해서 다섯 명의 교수와 함께 공개적인 학술토론을 가져 자신의 학문적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얼마 뒤 볼로냐 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4월의 토론회가 공개적인 박사학위 심사 자리 구실을 한 셈이다. 바시가 학문적인 역량을 인정받는 기회를 마련해준 람베르티니는 1740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로 즉위한 뒤에도 꾸준히 바시를 후원했다.

바시에 50여년 앞서서 피스코피아(Elena Cornaro Piscopia, 1646~1684)가 1678년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대체로 피스코피아를 최초의 여성 박사로, 바시를 두번째로 인정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에스파냐의 갈린도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탓일까?

2006년 6월 마드리드에 건립된 갈린도의 동상. 그가 설립한 병원 5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졌다. 그에 앞서 1968년에는 탄생 5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가 제작되었다.

2006년 6월 마드리드에 건립된 갈린도의 동상. 그가 설립한 병원 5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졌다. 그에 앞서 1968년에는 탄생 5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가 제작되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바시는 1732년 10월부터 볼로냐 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철학 강의도 병행했지만 두 강의 모두 비정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1734년부터 볼로냐 대학과 시의 주요 연례행사인 ‘공개 해부 시연’에도 참여하게 되어 정규 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만큼 해부 시연은 당시에 중요한 행사였고 대학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관심사였다.

1738년 바시의 결혼 계획이 알려지자 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시간을 뺏길 것을 걱정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바시는 자기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험실습도 하도록 허락받았다. 대신 연구와 학생 교육에 필요한 도구나 소모품 등은 바시의 봉급에서 해결하도록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학당국이 그 비용도 지급했다. 바시는 결혼생활을 통해 볼로냐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인 남편 베라티(Giuseppe Veratti)와의 사이에 무려 여덟이나 되는 자녀를 낳았다. 이 가운데 셋은 돌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교수로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남편과 주변 사람들, 대학과 시 당국의 관심과 배려 덕분이었다.

바시는 나이가 들수록 의학보다는 물리학, 특히 뉴턴 물리학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논문도 대부분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1746년 이후 의학에 관련된 활동은 매년 한 차례씩의 해부 시연에만 국한되었는데, 그 일만은 사망 전 해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1745년 교황청이 유럽 전역에서 교황의 즉위명을 딴 ‘베네딕토 석좌 학자’로 위촉한 25명 가운데 여성으로는 바시가 유일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76년 바시는 볼로냐 대학 실험물리학 주임교수에 취임했다. 볼로냐 대학은 바시가 볼로냐 대학뿐만 아니라 유럽 최초, 나아가 세계 최초의 여성 주임교수라고 주장한다. 바시의 사후 볼로냐 시는 한 거리의 이름을 ‘비아 로라 바시 베라티’라고 명명했다.

역사문화 유적이 즐비한 볼로냐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루이지 카타네오 밀랍 해부학 박물관’(Luigi Cattaneo Museo delle Cere Anatomiche)이 있다. 1970년대 초 박물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한 것은 당시 볼로냐 대학 해부학 교수인 카타네오의 공이지만 박물관의 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볼로냐의 ‘밀랍 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만졸리니 부부의 밀랍상(蜜蠟像). 부인 안나 모란디의 작품이다.

볼로냐의 ‘밀랍 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만졸리니 부부의 밀랍상(蜜蠟像). 부인 안나 모란디의 작품이다.

안나 모란디(Anna Morandi, 1714~1774)는 보통 해부학자보다는 해부학 모형 제작가로 분류된다. 1714년 볼로냐에서 태어난 안나는 당시의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학문과는 무관하게 자라났다. 그리고 1736년 어렸을 때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만졸리니(Giovanni Manzolini, 1700~1755)와 결혼해서 5년 사이에 여섯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안나는 양육과 가사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해부학 교수인 남편을 거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주된 관심사는 밀랍으로 인체해부 모형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안나는 처녀 시절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인체해부를 공부하고 모형을 제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노력 덕분에 머지않아 남편을 능가하게 되었다. 만졸리니 부부의 이름은 곧 전 유럽에 알려졌다.

병약했던 남편이 1755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는 안나가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안나는 남편 후임으로 볼로냐 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치는 한편 혼자 힘으로 밀랍 모형 제작도 계속했다. 그리고 곧 능력과 공적을 인정받아 1756년에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고 박사학위도 물론 없었지만 모형 제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만큼 이 무렵에 밀랍으로 만든 인체 모형이 해부학 연구와 교육에서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안나는 유럽의 여러 대학들로부터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강의를 하거나 모형 제작에 참여할 뿐이었다.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 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하지만 선구적인 모습은 근대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의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