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란히 남은 일본 어부들의 적산가옥, 일본인 관광명소로

2015.02.09 21:46 입력 2015.02.09 23:13 수정
백승목·사진 이준헌 기자

포항 구룡포

구한말 일본 어민들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일본 혼슈 서부와 규슈, 시코쿠에 에워싸인 내해)의 어장이 줄고 어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커지자 한반도로 눈을 돌렸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은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1908년 한일어업협정을 맺으면서 일본 가가와(香川)현과 오카야마(岡山)현의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대거 경북 포항 구룡포로 몰려왔다. 일제가 당시 식민지였던 한반도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구룡포 일대에 도로와 항만을 건설했고, 해방 때까지 동해 연안의 풍부한 어장에서 부를 축적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일본 어민들도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났다. 한때 정부에 귀속됐다가 일반인에게 불하된 구룡포 적산가옥(敵産家屋)은 아직도 주민들의 주거용 또는 찻집·기념품점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적산가옥이 들어선 골목은 포항시가 2010년 정비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꾸몄다.

일제시대 일본인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거주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근대역사문화거리 내 적산가옥 골목. 왼쪽에 일본 전통복장 체험과 일본 차(茶)를 팔고 있는 가게가 보인다.

일제시대 일본인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거주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근대역사문화거리 내 적산가옥 골목. 왼쪽에 일본 전통복장 체험과 일본 차(茶)를 팔고 있는 가게가 보인다.

■ 일본 수산업자의 저택, 근대역사관으로

일본 어민들이 1910년을 전후해 구룡포에 정착할 당시 이곳에 사는 한국인은 2~3가구에 불과했다. 일제시대 한반도의 어업 전진기지로 번성한 구룡포는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됐다. 구룡포가 성장하면서 이주해온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조합이나 어선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하시모토 젠키치(橋本善吉)와 도가와 야사부로(十河彌三郞)는 당시 구룡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시모토의 집은 현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함석지붕에다 정원을 갖춘 그의 집은 흙·나무·종이를 주로 이용했고, 채광을 위해 많은 창문을 낸 전형적인 일본인 주거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집은 2층 구조로, 건축면적은 210㎡가량 된다.

하시모토의 집무실과 안방(다다미방)이 있는 1층의 부엌 아궁이는 바깥으로 툭 튀어나왔다. 한국의 재래식 아궁이가 방 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방 안에는 안녕을 기원하는 ‘불단(佛壇)’이 있다. 이 건물에는 또 평민들의 가옥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폭 1m의 툇마루가 있다. 이는 재력이 있는 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1·2층에 각각 3개로 나뉜 방 사이에는 중간 방문을 설치했고, 손님이 많으면 이를 떼내고 대형 집회장으로 사용됐다. 방과 방 사이 경계를 이루는 윗부분은 ‘란마(爛間)’가 설치돼 공간의 연속성을 주면서 통풍과 채광을 잘할 수 있게 했다. 하시모토 집의 2층 서재에는 액자나 족자 같은 장식품과 함께 위엄을 상징하는 흑단목 재질의 ‘도코바시라’라는 장식기둥이 있다. 특이한 점은 대문 입구에 놓인 목재 재질의 ‘간독’이다. 이원희 문화유산해설사는 “수산업 종사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 간독은 생선을 잡아 보관하기 쉽게 소금에 절인 후 일본으로 유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룡포가 가장 번성했던 1930년대에는 포구 인근 470여m의 중심도로 옆에 220여가구의 적산가옥이 즐비했다. 이들 중 현재 보존된 가옥은 28가구가량이며, 대부분 건물의 앞면 쪽만 일본식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구룡포가 가장 번성했던 1930년대 어선 선착장 주변의 모습. | 포항시 제공

구룡포가 가장 번성했던 1930년대 어선 선착장 주변의 모습. | 포항시 제공

일제강점기에 구룡포를 개발하고 수산업 전진기지로 만드는 데 기여한 하시모토 젠키치의 2층 집.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구룡포를 개발하고 수산업 전진기지로 만드는 데 기여한 하시모토 젠키치의 2층 집.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신사·일본인 공덕비가 있던 구룡포공원

구룡포의 번영기의 시가지 모습은 대도시 중심가를 옮겨놓은 듯했다.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병원, 백화점, 이·미용업소, 술집 등이 즐비했다. 이 거리에는 ‘게이샤’(기생)들이 운영하는 주점들도 많았는데, 일본과 한국 기생 150여명이 터를 잡았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인 학교를 다녔던 서상호씨(94)는 “번화가에는 극장이나 당구장까지 있을 정도로 전국의 유명 도회지 못지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난 삶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이를 떨치기 위해 주변에 공원을 만들고 신사와 절을 세웠다. 공원에는 27살 때 구룡포에 정착해 일본 어민들의 정주기반을 닦은 도가와 야사부로의 공덕비가 서 있다. 일본인들이 도가와의 고향인 오카야마현의 규화석을 직접 운반해와 1944년 세운 이 공덕비는 기단부 3m, 비석 7m 크기이다. 하지만 비문은 없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비문을 시멘트로 모두 발라 버렸기 때문이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120개의 돌계단 옆에 세워진 돌기둥에는 구룡포 성장에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이 역시 대부분이 시멘트로 뭉개졌고, 한국인들은 1960년 공원을 정비하면서 돌기둥을 뽑아 돌려 세운 뒤 한국인 공헌자의 이름을 새겼다. ‘신숙주’라는 한국인의 이름 뒷면에 있는 일본인의 이름 ‘도가와 야사부로’만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가 구룡포에 기여한 것을 인정하는 듯하다.

공원에는 일제 때 4개의 신사와 2개의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신사 앞 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기단부와 신사에 들어가기 전 일본인들이 손을 씻었던 석재 재질의 세숫대야, 건축 기초로 사용된 돌기둥 일부만 남아 있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는 한국의 ‘충혼탑’이 서 있다.

구룡포의 일본 이주민 1세는 모두 사망했지만, 일본에서는 이주 2·3세들이 어릴 적 구룡포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1978년 ‘구룡포회’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구룡포 근대역사문화거리와 공원은 최근 일본관광객들이 포항을 찾을 때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적산가옥에는 지번에 따라 ‘요리집’ ‘쌀집·과자상점’ 등을 표기해 일제시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가가와현의 어촌인 오다(小田) 출신의 이시하라 히데오 구룡포회장(80)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의 홍보영상을 통해 “일본 해역에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서 (선조들이) 구룡포로 가자고 해서 이주했는데, 아직도 어릴 적 그곳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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