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보성여관 여전히 손님 맞고… 78세 보성강발전소 ‘생생’

2015.02.16 21:57 입력 2015.02.16 22:08 수정

(7) 전남 벌교읍

▲ 쌀·해산물 수탈 포구로 번성
현부자 집·소화다리 과거 흔적
벌교금융조합은 문화재로 지정

‘삐걱’. 널빤지가 부대끼며 내는 소리는 80년이나 된 건물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2층에 오르자 4칸짜리 널찍한 ‘다다미방’이 펼쳐졌다. 다다미방 끝 창문에서 내려다본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퇴락한 건물들 속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한 토막씩 숨어 있었다.

‘보성여관’. 1935년 문을 연 이 여관은 등록문화재이지만 현재도 숙박이 가능하다. 1층에서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김성춘 매니저는 “지금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정도로 보면 된다”고 했다. 건물이 7채에 방이 13개나 됐던 보성여관은 번성했던 벌교의 모습을 대변한다. 지금은 인구 1만4000명 남짓한 소읍이지만 일제시대 벌교는 전남 4대 도시였다.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자료’를 보면 1935년 전남지역 인구는 목포 6만734명, 광주 5만4607명, 여수 2만8205명, 벌교 2만4254명이었다. 순천은 2만1938명에 그쳤다. 일본인만 벌교에 550명이 넘게 살았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남아있는 ‘보성여관’. 일제시대인 1935년에 지어진 이 여관은 현재로 치면 ‘특급 호텔’ 수준으로 당시 방이 13개나 됐다. 한옥과 일본식 건축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1층은 온돌이지만 2층에는 4칸짜리 널찍한 ‘다다미방’이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남아있는 ‘보성여관’. 일제시대인 1935년에 지어진 이 여관은 현재로 치면 ‘특급 호텔’ 수준으로 당시 방이 13개나 됐다. 한옥과 일본식 건축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1층은 온돌이지만 2층에는 4칸짜리 널찍한 ‘다다미방’이 있다.

해방과 함께 쇠락하며 잊혀진 도시 벌교를 다시 살려낸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조정래(72)였다. 벌교를 무대로 <태백산맥>을 쓴 작가는 벌교읍 100년을 기념해 발행된 ‘벌교읍지’에 이렇게 적었다. “시골이 무대가 되는 작품을 구성하게 되면 어김없이 벌교의 풍광 전체가 일시에 떠올라 의식을 꽉 채워버리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벌교를 완벽하게 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그래서 벌교의 ‘태백산맥 답사길’은 일제 건축물기행과 겹친다. 보성여관을 사람들이 ‘남도여관’으로 기억하는 것도 소설 때문이다. 한식과 일식이 조합된 보성여관은 보성군이 벌교읍에 조성한 ‘태백산맥 문학거리’의 중심 건물이다.

여관이 문을 열던 즈음 벌교는 전남 동부권의 중심도시였다. 1913년 200여 가구가 살던 작은 포구 벌교는 지리적 이점을 간파한 일제에 의해 급속도로 발전한다. 동쪽의 순천과 마산, 서쪽의 장흥과 해남, 북쪽의 광주와 화순, 남쪽의 고흥으로 향하는 길이 모두 벌교를 지났다.

1930년에는 여수∼광주간 남조선철도(현재의 경전선)까지 생겼고, 수탈은 더욱 용이해졌다.

지금은 읍내에 즐비한 ‘꼬막정식’ 식당에서 바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화물선이 매일 20회씩 드나드는 큰 항구였다. 벌교는 고흥과 여수반도 사이 여자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큰 배가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편리한 육로를 통해 모인 쌀과 곡물, 해산물은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다.

몰려든 일본인들은 건물을 세울 땅이 부족하자 신시가지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현재의 보성여관 주변이다. 여관에서 벌교읍사무소 쪽으로 5분쯤 가면 왼쪽에 유럽풍의 석조건물이 나온다. 일제가 벌교에 돈이 모이자 1919년 설립한 벌교금융조합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최근까지 농민상담소로 쓰였다. 건물 뒤편에는 일본식 주택도 있었지만 문짝이 뜯기고 기와가 무너지고 있었다.

길을 안내한 양현수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 회장은 “주택은 금융조합 직원들의 관사로 쓰이던 곳으로 일본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무관심 속에 무너지고 있다”면서 “벌교 곳곳에 이런 건물들이 상당하다”고 했다. 인근에 일제시대 때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선명한 목공소 건물도 주인이 붕괴를 막기 위해 철기둥을 덧대 두고 있었다.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향하기 위해 벌교천을 건너면서 만나는 다리는 생김새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이름이 눈길을 잡는다. 1931년 일제가 쓰던 연호로 ‘소화6년’에 만든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부용교’이다. 하지만 누군가 ‘소화다리’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금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

태백산맥 문학관 옆에 있는 ‘현부자네 집’의 문간채. 2층에 주변을 볼 수 있는 ‘누마루’가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 옆에 있는 ‘현부자네 집’의 문간채. 2층에 주변을 볼 수 있는 ‘누마루’가 있다.

일제가 1935년 득량만간척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막은 ‘보성강 댐’. 일제는 도수터널을 만든 뒤 낙차를 이용해 1937년부터 ‘보성군수력발전소’를 운영했다.

일제가 1935년 득량만간척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막은 ‘보성강 댐’. 일제는 도수터널을 만든 뒤 낙차를 이용해 1937년부터 ‘보성군수력발전소’를 운영했다.

안내판에 ‘현부자네 집’으로 소개돼 있는 문학관 옆 한옥은 일제시대 벌교의 부호였던 박사윤이 지은 제각과 별장이다. 1938년 건립돼 2003년 해체 복원됐는데 한옥과 일본풍이 혼합돼 있다. 문간채에는 이층에 올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누마루’가 있고 본채에는 당시 일제가 만든 관공서 건물 등에 설치됐던 ‘포치(건물 입구에 지붕을 갖춰 비바람을 피하도록 한 구조물)’가 기와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너른 간척지 제방인 ‘중도방죽’은 일제시대 벌교를 비롯해 인근에서 간척사업을 크게 벌였던 일본인 ‘나카시마(中島·중도)’의 이름에서 나왔다. 일본인들이 활발하게 펼친 간척사업은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발전소를 남기기도 했다. 벌교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떨어진 보성군 미력면에 있는 ‘보성강수력발전소’는 1937년 발전을 시작해 지금도 전기를 만든다.

득량면과 조성면 사이의 바다를 막아 득량만간척지를 만든 일제는 1932년 부족한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산 너머에 흐르던 보성강에 댐을 쌓고 2.2㎞의 터널을 뚫었다. 76m나 되는 낙차가 생기자 이곳에 수력발전소도 만들었다. 댐과 2대의 수차가 돌고 있는 발전소 건물, 원통형의 수조는 당시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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