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햇볕정책

2015.11.10 20:44 입력 2015.11.10 20:49 수정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대북 강경론자 “퍼주기” 역공…북 도발 때마다 ‘남남갈등 이슈’

한국전쟁 후 정부의 대북정책 중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것이 햇볕정책이다. 대북 포용정책을 의미하는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출발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남북 간의 안보위기가 고양됐지만, 1971년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됐다. 1972년과 1973년에는 7·4공동선언과 6·23선언이 발표됐다. 7·4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것을 약속한 것이었고, 곧 이은 6·23선언에서 한국 정부는 남북한이 각기 따로 국제기구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탈냉전을 전후한 시기 노태우 정부의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으로 현실화되었고, 김영삼 정부의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한완상은 북한에 따뜻한 햇볕을 쬐어 스스로 옷을 벗게 한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송환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북핵문제가 발생하면서 김영삼 정부 시기 남북관계는 민간 차원의 교류 외에는 진전되지 않았다. 미국 클린턴 정부가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주장했지만, 김영삼 정부는 햇볕을 비추려고 해도 구름이 있어 비추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이 1998년 7월27일 임진각 근처에 미련된 환송회장에서 통일소의 고삐를 잡고 환송나온 실향민과 현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햇볕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이 1998년 7월27일 임진각 근처에 미련된 환송회장에서 통일소의 고삐를 잡고 환송나온 실향민과 현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햇볕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대중은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햇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후보는 1993년 6월6일 영국 런던대학 강연에서 “북한을 변화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면 햇볕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94년 9월에는 미국 정계 인사들과 만나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햇볕정책 ‘빛과 그림자’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주장한 적은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북한의 변화와 협력을 이끌어내겠다는 정책은 처음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비해 북한은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서독의 동방정책이 가능했던 1970년대 이후 상황이 한반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은 햇볕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이 시작되면서 햇볕정책은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남북 간의 긴장상태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 평화적 분위기는 한국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적극적 접근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클린턴 정부 역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여기에 더해 북한이 주한미군을 동북아 평화유지군으로 인정했다는 발언을 했다는 점이 보도되면서 햇볕정책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며 포옹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며 포옹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햇볕정책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55년 만의 일이었다. 7·4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관여했지만, 직접적인 만남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순간만큼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6·15공동선언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남북관계는 전향적인 진전을 이뤄냈다.

햇볕정책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됐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정부만큼 전향적이지는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부시 행정부의 정책이 ABC(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모두 바꾸겠다는 것)라고 불리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변화한 것이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됐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테러 세력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른바 ‘불량 국가’들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강경한 정책을 실시했는데, 북한은 이란, 리비아와 함께 ‘불량 국가’에 포함됐다. 미국이 불량 국가로 규정한 북한과 이란, 리비아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샀다. 이로 인해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고, 미국을 축으로 하는 한반도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남남갈등의 핵심 이슈로 등장

노무현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북 포용정책을 실시해 개성공단을 열고, 남북의 철도를 잇는 성과를 냈다. 북한의 입장에서 개성공단은 외화벌이 수단이었지만, 남한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중소기업의 입지를 넓혀주는 것이었다. 북한이 아리랑 축제에 남한 관광객들의 방문을 허용했고, 지자체와 기업인들의 방북이 잇따라 성사됐다. 북한의 개방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2007년에는 10·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햇볕정책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냈다. 첫째로 남한의 대북지원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의 도발이 잇달아 발생했다.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이 발생했고, 2003년에는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2005년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이어 2006년 10월9일 제1차 핵실험이 강행됐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키고, 도발을 방지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특히 2002년 연평해전은 월드컵 기간 중에 발생했고, 한국 해군 6명이 전투 중 사망해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둘째로 햇볕정책의 투명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이 대표적이다. 보수언론은 특검팀의 발표와는 달리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지급된 5억달러가 정상회담의 대가인 양 보도했고, 이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북송금 문제는 2002년 3월 미 행정부에서 제기된 것으로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국면에서 불거진 사안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예견됐다.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는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 독일 통일과정에서 거듭 강조된 통일비용은 햇볕정책뿐만 아니라 통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대두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후 햇볕정책은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간의 남남갈등에 핵심적인 이슈가 됐다.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 개발을 도와준 ‘종북적인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6·23선언이나 남북기본합의서, 독일의 동방정책이 그랬듯이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었다. 대북정책은 이념적인 잣대가 아닌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대의적 측면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대북정책이 정권에 따라 조령모개한다는 점이다. 대북정책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기에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외교부와 달리 통일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대북정책에는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햇볕정책이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NLL 논쟁…정전협정서 규정 못한 ‘해상분계선’…이후 합의도 무효화

1953년 한국전쟁을 중단시킨 정전협정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일부 조항이 무효가 됐을 뿐만 아니라 정전체제를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단의 활동이 중지됐다. 게다가 북한은 1994년 이후 정전협정이 무효화되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정전협정은 북방한계선(NLL)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정전협정을 빨리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옹진반도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서해 5도 지역 사이의 해상 군사분계선에 대한 규정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정전협정 조인 후 한 달이 지난 1953년 8월30일 유엔군 사령관이 NLL을 선포했고, 북한은 1973년까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NLL이 서해상의 유일한 군사분계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NLL이 합의 없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전협정에 사인한 또 다른 주체인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정부와 동일한 입장이지만, 1974년의 CIA 보고서에는 1961년까지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은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국경은 양자 간의 동의가 있어야 확정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의 동의 없이 그어진 NLL은 국제법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 조항은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로 하고 있어 NLL 자체가 위헌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부속합의서 10조에서 “해상불가침 구역은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해 NLL의 실체를 인정한 적이 있으며, 2007년 10·4공동선언에서도 NLL을 중심으로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는 데 동의했다. 이렇게 보면 NLL은 실질적인 군사분계선으로 작동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에서 비준되지 못해 무효가 되었으며, 10·4공동선언은 이명박 정부 때 무효화된 상황이다. NLL 지역에서 남북 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두 합의가 무효화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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