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안철수 현상

2015.12.21 20:25 입력 2015.12.21 20:44 수정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시민사회 열망의 아이콘” “정치적 포퓰리즘 위험” 시각 공존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여기서 다루는 ‘안철수 현상’은 2011년에서 2012년까지 진행된 정치적·사회적 현상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안철수 현상이라는 말에는 두 개의 의미, 의사이자 벤처사업가인 ‘개인 안철수’와 시민사회의 정치적 열망의 분출이라는 ‘사회현상’이 결합돼 있다. 안철수 현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것은 2011년 9월이었다.

2011년 이전에 안철수는 컴퓨터 백신 개발자로 시민사회에 알려져 있었다.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호감을 얻고 있던 안철수는 2011년 9월 서울시장 후보를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전면에 부상했다. 안철수 현상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안철수 현상이 절정에 달한 것은 2012년 9월 그가 18대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을 때였다. 1년 동안 밖에서 관망하던 그는 정치사회에 진입하자마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그해 11월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하기 위해 대선 후보를 사퇴했다.

<b>양보</b> 2011년 9월6일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기자회견에서 포옹하고 있는 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과 박원순 변호사.

양보 2011년 9월6일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기자회견에서 포옹하고 있는 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과 박원순 변호사.

]

■ ‘등장’ 아닌 시민사회가 ‘발견’

안철수 현상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현상이란 이름이 붙여진 사례는 노무현 대통령과 대중가수 서태지였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노무현 현상’을 낳았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서태지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한 인물에게 현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 인물의 등장이 새로운 시대에의 열망과 맞물려 있을 경우다. 안철수라는 인물의 등장은 그만큼 신선하고 강렬했다.

안철수가 정치사회로부터 호명된 데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가 그 배경으로 놓여 있었다. 2012년 대선은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87년 체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공고화를 가져다줬지만 이념갈등을 포함한 과도한 사회갈등을 낳았다. 97년 체제는 외환위기를 단기간 안에 극복하게 했지만 분배구조 악화를 포함한 사회 양극화를 증대시켰다. 87년 체제에 내재된 지나친 사회갈등과 정치적 대립의 구조화는 소통의 부재를 가져왔고, 97년 체제의 점증하는 양극화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서의 사회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2011년 당시 많은 시민들은 ‘소통과 공공성’의 가치를 열망하고 있었다.

안철수라는 이름이 시민사회에서 정치적 공명(共鳴)을 일으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안철수라는 개인의 삶, 벤처기업 운영, 청춘콘서트 등 사회활동은 소통과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부합했다. 앞선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정신에 대응해 한국 사회가 2011~2012년 대선 국면에서 새롭게 주목한 시대정신은 복지국가였다. 시대정신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본다면, 이명박 정부를 경유하면서 소통과 공공성 또한 새로운 시대정신의 하나로 주목받았다. 소통의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것은 불통의 권위주의였고, 공공성의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은 사익성의 시장주의였다. 불통과 사익성의 정치 및 리더십을 거부하려는 게 안철수 현상의 본질을 이뤘다.

안철수 현상은 2008년 촛불집회, 2010년 무상급식 논쟁, 2011년 희망버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국가와 시장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격’과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새정치’에 대한 열망을 함의했다.

여기서 반격이란 기존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공존을 거부한 채 경쟁만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과 주권의 대리인임에도 마치 주인인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부정이 안철수 현상에 담겨 있었다. 요컨대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 정치와 공론장에서의 과도한 이념논쟁의 피로감, 그리고 새로운 리더의 등장에 대한 기대가 결합돼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b>지지</b>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왼쪽)가 2012년 12월15일 당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유세를 하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오른쪽)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다.

지지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왼쪽)가 2012년 12월15일 당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유세를 하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오른쪽)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다.

■긍정적·부정적 시각 크게 엇갈려

2011~2012년 안철수 현상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시민 다수가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철수의 주요 지지 그룹은 20대 젊은 세대, 30~40대 화이트칼라, 여성층이었다. 이 집단이 갖는 특징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리더를 갈망해 왔다는 데 있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듯 ‘거리의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표출했던 이 집단은 운동정치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선거의 정치’에서 자신의 대변자를 찾았다. 이 점에서 안철수는 스스로 ‘등장’했다기보다 시민들에 의해 ‘발견’된 셈이었다.

문제는 리더를 발견했다고 해서 정치적 세력화가 곧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정치적 세력화 과정에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정당 조직과 결합할 때 현실정치에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안철수 현상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긍정적 시각은 안철수 현상에 정치사회의 ‘정상화’와 ‘우선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이 담겨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선 분배와 재분배의 개혁, 즉 노동시장 개혁과 사회복지 개혁이 동시에 추진돼야 하고, 이를 위해선 시장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재벌개혁 역시 의제화돼야 했다. ‘안랩’이라는 벤처 사업의 신화를 갖고 있던 안철수는 비록 정치 경험은 없었지만 이런 개혁들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됐다.

<b>결별</b>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지난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을 선언하기 앞서 기자회견문을 꺼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결별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지난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을 선언하기 앞서 기자회견문을 꺼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정적 시각은 안철수 현상과 같은 열망의 분출이 ‘반(反)정치의 정치’에 머무르게 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반정치의 정치는 정당정치와 맞서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위험을 갖는다. 어느 사회이건 이른바 ‘바람의 정치’는 그것이 정치사회 내에 제도화될 때 지속가능성과 실현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화를 성취하지 못할 때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은 이내 환멸로 바뀌게 되고, 새로운 정치 질서에 대한 에너지는 그 과정에서 고갈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선 이후 안철수는 2013년 4월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했다. 2014년 3월에는 민주당과 결합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지만, 지난 13일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안철수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2011~2012년 안철수 현상’은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안철수 개인의 취약했던 정치적 역량과 기성 정치사회가 갖는 구심력이 안철수 현상의 정치적 세력화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주목할 것은 안철수 현상이 쇠퇴했다고 해서 국가와 시장을 개혁하려는 시민사회의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안철수 현상에서 안철수라는 이름을 안철수가 되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포함해 새로운 인물이 호명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2012년 대선 시대정신

산업화·민주화 세대 대결 구도 속…안 사퇴, 신세대 세력화 좌절 함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시대 구분이다. 광복 70년을 돌아볼 때 우리 사회의 시대 구분은 정부 수립, 산업화, 민주화 시대로 나눠볼 수 있다. 민주화 시대가 절정을 이룬 것은 1998년에서 2008년까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2007년 대선이 ‘경제 살리기’를 앞세워 진보세력에 맞선 보수세력의 반격이 이뤄진 선거였다면, 2012년 대선은 민주화를 잇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게 하는 선거였다. 담론적 측면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그 구체적인 증거였다.

세력의 측면에서도 2012년 대선은 세대가 팽팽히 맞선 선거였다. 산업화세대가 박근혜 후보를 주로 지지했다면, 민주화세대는 문재인 후보를 주로 선택했다. 안철수의 핵심 지지 그룹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인 20대와 30대였다. 20~30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이는 안철수였다. 이 점에서 그해 11월 안철수 후보의 사퇴는 신세대 정치 세력화의 좌절을 함의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문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내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추진한 정책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 대신 규제개혁을 내세우고 대선 당시 제시한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를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와의 연속성을 보여줬다.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된 것은 대외정책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을 우선시한 반면, 박근혜 정부는 대미정책과 대중정책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2017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예상컨대 불평등 해소가 현재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인 만큼, 이를 위한 복지국가 구축과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사회통합 제고가 복수적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