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

2016.01.15 22:04 입력 2016.01.15 22:10 수정

‘붓 끝 남은 먹물’로 세상 아름다움·모순 아우른 ‘향수’의 논객

경향신문 70년은 ‘여적’ 70년이다. 1946년 10월6일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2만건 이상 게재된 여적의 첫 회 집필자는 경향신문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 시인(1902~1950?)이었다.

1930년대 휘문고보 교사 시절의 정지용.  경향신문 자료사진

1930년대 휘문고보 교사 시절의 정지용.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적이 뛰어난 장인의 화룡점정이라면 이만한 생색이 다시 없겠지만, 잔 받침에 흘러내린 술방울이라면 부질없는 일이요, 하다못해 펑펑 흘린 수만 섬의 눈물이 거쳐간 뒤에, 뼈에 맺힌 설움에 절어 나온 짜내는 눈물방울이라면 쓸모도 있겠고, 생각대로 곧바로 행동하며 강직하게 거리끼지 않고 직언을 하여 입가에 침을 튀겨가며 곧은 말을 하는 침방울 같을진대, 이 또한 때로는 청량제도 될 것이다. 산모의 유두에서 떨어지는 뽀얗고 기름지고 부드러운 젖방울은 또 어떨까. 젖방울이라니 정신의 젖방울, 마음의 유방도 그 아니 좋으냐.”

‘여적’이 ‘붓 끝에 남아 있는 먹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술방울, 눈물, 침방울, 젖방울로 이어지는 액체의 이미지가 이어진다. 정지용은 칼럼 ‘여적’이 세상의 슬픔을 담고(눈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침방울), 마음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기를 희망했다(젖방울). 정지용의 감각적인 어휘가 ‘여적’, 그리고 경향신문의 지향을 밝힌 것이다.

1930년 시문학 ‘동인’ 창립 당시 정지용(뒷줄 맨 오른쪽)이 박용철, 이하윤, 김윤식, 정인보, 변영로(시계 반대방향) 등과 기념 촬영한 모습.  하늘아름(독립운동가 사이트) 제공

1930년 시문학 ‘동인’ 창립 당시 정지용(뒷줄 맨 오른쪽)이 박용철, 이하윤, 김윤식, 정인보, 변영로(시계 반대방향) 등과 기념 촬영한 모습. 하늘아름(독립운동가 사이트) 제공

선구적인 모더니스트, 감각적 서정시인, 잡지 ‘문장’의 편집위원으로 이름 높았던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경향신문에 입사한 것은 1946년 10월이었다. 당시 초대 편집국장으로 소설가 염상섭이 취임했으니,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소설가가 신생 경향신문의 논조를 이끄는 중책을 맡은 셈이다. 정지용 가문은 부친부터 가톨릭 신자였기에, 가톨릭 계열로 창간된 경향신문에 친연성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정지용은 뚜렷한 정치색을 드러낸 적이 없다. 식민지 말기엔 은일의 자세를 통해 제국주의 질서에 소극적으로 저항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의 지식인들은 새 나라의 방향을 이끌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고, 이는 정지용같이 ‘순수시’를 쓴 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 자신의 시에 대해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 (…) 사춘기를 훨석(한참) 지나서부텀은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그런 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라고 적었다. 해방공간은 정지용이 더 이상 산과 바다만 노래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지용이 하루아침에 ‘정치 논객’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 비평은 오직 간접적·문화적 방식으로 드러날 따름이었다. 주간 재직 시절 경향신문에 쓴 칼럼들은 이 같은 정지용의 현실 참여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1947년 3월9일자에 실린 ‘사시인의 불행’은 안과의사를 잘못 만나 사시를 교정하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를 애처롭게 묘사한 뒤, 이 안과의사가 정치인으로 나서는 경우를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눈에는 육체적 안구 이외에 정치적 안목이라는 눈도 있다. 무수한 정치안목적 사팔뜨기의 대범람!”이라는 표현으로 글을 맺었다.

정지용, 송재숙 부부와 어린 시절 장남 구관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  하늘아름 제공

정지용, 송재숙 부부와 어린 시절 장남 구관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 하늘아름 제공

같은 해 5월15일자의 ‘기상예보와 미소공위(美蘇共委)’란 글도 비슷하다. 일기예보에는 확실한 오보와 “비가 올 듯도 하고 안 올 듯도 하다”는 애매한 표현이 있는데, 정지용은 이를 정세분석에 적용한다. “이번 미소공위가 성공할 것도 같고 아니될 것도 같다”는 이는 조선 자주독립에 별 관심이 없는 ‘무책임한 사람’이지만, “미소공위가 다시 결렬하리라”고 말하는 이는 ‘위험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정지용의 명민한 인식은 ‘여적’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자산가를 금시계 차고 담배 피우며 젊은 여성을 동반한 남자로 그리는 만평의 관습을 비판했다. ‘지방축적증’은 몸이 아니라 정신에서 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훈장의 효능을 과신하는 자’는 대개 군국주의 침략자들이기에, 아이들에게 칼, 훈장 등의 완구를 줘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다만 조숙한 아이에게는 “원자력 관리안과 원자력 스파이전과 제삼차전(第三次戰)의 무수한 훈장과 훈장도 찰 여유조차 없을 원자력 전쟁”을 알려줘도 좋다고 덧붙인다.

정지용은 반전·반제국주의에 대한 신념도 투철했다. “조선이 일본의 질곡에서 벗어난 것은 이차대전의 여공(餘功)”이지만, 조선이 제삼차대전을 통해 삼팔선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이가 있다면 이들은 “후일 남산에 조선 자주독립의 공로자로 전범자 동조(東條·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참모총장 도조 히데키)의 동상을 계획하자는 의견을 가질른지도 모른다”고 일갈했다.

해방공간의 정지용은 자신의 본령이라 할 시는 거의 쓰지 않았다. 정지용은 ‘조선시의 반성’에서 “이들 해방의 노래가 대개 일정하나 정치노선을 파악하기 전의 사상성이 빈곤하고 민족해방 대도의 확호한 이념을 준비하지 못한 재래 문단인의 단순한 습기적(習氣的) 문장수법에서 제작되었던 것이므로 막연한 축제 목적 흥분, 과장, 혼돈 무정견의 방가 이외에 취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중도적이고 신중한 정지용은 온갖 이념이 뒤얽혔던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문학적으로 방황했다. 정지용은 경향신문 재직 시절 여러 편의 산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조심스레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지용과 경향신문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지용은 1947년 8월 경향신문을 떠나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했다. 1948년에는 주거지를 서울 돈암동에서 녹번리 초당으로 옮기고 서예로 소일했다. 이태준, 박태원, 오장환 등 친분이 두터운 문우들이 잇달아 월북한 상황에서, 중도파 지식인으로 정국의 전면에 나서기 힘겨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2월엔 마지막이 된 시 ‘곡마단’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곡마단원의 곡예를 묘사한 서정시지만, 해방정국 좌우익의 갈등 속에 번민했던 중도 지식인의 내면도 언뜻 비친다.

“위태 천만 나의 마흔아홉 해가/ 접시 따라 돈다 나는 박수한다”(‘곡마단’ 중)

※참고자료 : <정지용의 삶과 문학>(박태상/깊은샘), <정지용과 그의 세계>(송기한/박문사),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이숭원/태학사), <정지용 전집>(최동호 엮음/서정시학)


■의문의 ‘마지막 행적’
6·25 때 강제 북송 혹은 월북 도중 미군 폭격 사망설
남북서 오랜 시간 금지된 이름…최근 복권돼 재평가


정지용의 마지막 행적은 여전히 모호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남과 북에서 정지용은 오랜 시간 금지된 이름이었다.

정지용은 6·25 직전 국도신문의 의뢰로 한려수도 기행문을 연재하고 있었다. 기행문은 6월28일자까지 실렸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정지용은 녹번리 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7월 정지용은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안면 있는 젊은이 몇 명과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나갔고,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한 쪽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지용은 전쟁의 와중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정지용은 이후 평양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폭격에 의해 사망했거나, 평양감옥에 있다가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북한 쪽 입장은 다르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대백과사전>은 정지용의 사망일을 1950년 9월25일이라고 적시했다. 북한 시인 박산운은 정지용이 자진 월북하다가 동두천 소요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남한에서 정지용은 1988년 정부가 납·월북 작가 해금 조치를 취한 뒤에야 읽히고 연구됐다. 이듬해엔 정지용의 고향 충북 옥천에서 제1회 ‘지용제’가 열려 지난해까지 28회 행사가 개최됐다.

북한에서도 정지용은 오랜 시간 ‘부르주아 반동문학’으로 취급돼 다뤄지지 않다가, 1990년대 들어서 복권됐다. 1995년 출간된 류만의 <조선문학사 2> 권 9에서 정지용은 4쪽에 걸쳐 비중 있게 다뤄진다. 류만은 정지용 초기 시의 향토색 및 민족적 정서를 호평했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갑을 앞두고 경축의 의미로 기획된 <조선대백과사전>(총 30권·1995~2001)에도 정지용이 수록됐다. 2000년 나온 <조선대백과사전> 권 17에서 정지용은 “8·15 이전 진보적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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