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문화부장 김동리 - 해방 정국 좌·우 넘나들어…언론계 떠난 뒤 ‘문단의 거목’으로

2016.02.05 20:43 입력 2016.02.05 20:53 수정
김여란 기자

초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염상섭이 추대된 데는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공이 컸다. 경향신문이 창간된 1946년 김동리(당시 33세)와 염상섭(당시 49세)은 서울 돈암동 한동네에 살면서 어느 봄날 우연히 첫인사를 나눴다. 한 달쯤 지나 김동리는 “일제강점기부터 형같이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던 정지용(당시 46세)을 만났다. 정지용은 ‘교회에서 신문을 내게 돼 내가 일을 봐줘야 하게 생겼다. 편집국장을 물색해보자’고 김동리에게 의논했다. 김동리는 염상섭을 추천했고, 정지용은 구미가 당기는 표정으로 “당장 염상섭의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고 김동리는 자전 수필에서 회고했다. 그 해 가을 염상섭 편집국장, 정지용 주필의 경향신문이 발간됐다.

김동리는 ‘우익문단의 거두’로 불렸지만 정치적 이념이 달랐던 정지용, 염상섭 등과 서로의 문학을 존중하며 인간애를 나누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동리는 ‘우익문단의 거두’로 불렸지만 정치적 이념이 달랐던 정지용, 염상섭 등과 서로의 문학을 존중하며 인간애를 나누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편집국장 일이 잘 풀리자 정지용은 감사의 뜻으로 쇠고기를 사서 김동리의 집에 찾아가 밤새 술을 마셨다. 극히 가난했던 김동리의 부인은 쇠고기를 아예 요리할 줄 몰랐고, 내놓을 안주는 수제비 한 그릇뿐이었다. 이런 살림을 보고 정지용이 “적빈여세라! 적빈여세라!”고 외쳤고, “이렇게 가난한 처지에서 왜 한민당 앞잡이를 하나”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여러 기록과 달리 김동리는 자전 수필에서 ‘적빈여세’를 외친 인물을 정지용과 확연히 구분되는 Y씨라 쓰고 있다. 정지용이 Y씨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정지용과 김동리의 인연은 김동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맏형 김범보가 이어준 것이었지만, 당시 이미 거장이던 정지용과 젊은 김동리가 어울릴 수 있던 것은 서로의 문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김동리는 스물두 살이던 1935년 <화랑의 후예> 등으로 등단한 뒤 내놓는 작품마다 주목받았다. 1939~1940년에는 기성 문인 유진오와 치열하게 세대 논쟁을 벌여 신세대 문학의 기수로 꼽혔다. 형을 따라 경남 사천에 머물던 김동리는 친일 문학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 그가 야학 교사로 일하던 광명학원이 폐쇄되고 형이 구속되자 사실상 절필했다. 사천에서 양곡배급소 서기로 일하던 김동리는 해방 후 상경했다.

김동리는 경향신문 창간과 여러 모로 깊은 인연이 있었고 문화부 차장으로 내정됐지만, 금세 떠났다. 당시 경향신문에 대한 김동리의 술회는 이렇다. “그러나 이 신문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좀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정치면은 그런 대로 우익에 가까웠으나, 문화면은 분명히 좌익에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나와는 거리가 먼 신문이 되어버렸다. 나는 다시 그 신문사에 가지 않았다.”

1947년 11월2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김춘수의 시 ‘푸서리’. 당시 문화부장이던 김동리가 신인 김춘수의 시를 처음 뽑아 게재했다.

1947년 11월2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김춘수의 시 ‘푸서리’. 당시 문화부장이던 김동리가 신인 김춘수의 시를 처음 뽑아 게재했다.

경향신문, 정지용과 김동리의 관계는 좌우익 갈등, 찬·반탁 갈등이 극심했던 해방 정국과 그에 민감했던 문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동리는 1946년 4월 조지훈, 서정주 등과 함께 우익·민족성향의 단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이 된다. 임화 등이 주도하는 좌익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정지용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었다. ‘형제 같던’ 정지용과 김동리는 갈라설 참이었다. 후에 김동리는 정지용의 경향신문 칼럼 ‘여적’이 “매일같이 날카롭게 우익을 공격”한다며 정지용을 “아주 좌경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김동리는 1947년 3월부터 민중일보 문화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민중일보는 윤보선이 사장, 김광섭이 편집국장이었다. ‘우익=반탁=민족주의’라는 등식을 따르던 김동리는 민중일보에 애정이 컸다. “(…) 그 무렵의 돈암장(이승만의 집)이나 우리 문협 동지들에게 있어 유일한 무기라야 이 민중일보 하나밖에 없을 때이니만큼.”

김동리가 ‘발을 끊었던’ 경향신문에 돌아온 것은 1947년 하반기로 염상섭과 정지용이 물러난 다음이었다. 민중일보 주필이었던 오종식이 경향신문 주필과 편집국장을 겸하게 되었는데, 아마 김동리는 오종식을 따라 경향신문에 재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동리는 1948년 11월 창간된 민국일보 편집국장을 맡기 전까지 1년여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으로 문화부를 이끌었다.

그래도 이념보다 문학, 사람 사이의 정리가 앞섰던 장면이 있다. 1947년 봄 김동리의 첫 소설집 <무녀도>가 출간되고, 서울 종로 한식집에서 우익 문인단체 주최로 출판기념회가 열린 날, ‘뜻밖에’ 정지용과 염상섭이 나타났다. 또 같은 해 7월, 9월 경향신문에는 두 차례에 걸쳐 김광주 소설가, 염상섭 편집국장이 <무녀도>에 대한 극찬에 가까운 호평을 실었다.

“내가 발을 끊은 경향신문에 염상섭 선생의 고무적인 신간평이 게재되었다. 책을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그 신문에 더구나 선생의 이름으로 그 책의 신간평이 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당시엔 좌우익이란 것이 심히 대립되어 있었으므로 무슨 집회 같은 것이 있어도 피차간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들의 행사엔 우리가 나가지 않고, 우리의 행사엔 그들이 나오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옛날에는 다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평소 외면하고 지내던 이들이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왔다는 것은 “그 시절로서는 경이에 가까운 사건”이었다고 김동리는 기억했다. 당시 사회를 맡은 정지용은 김동리를 두고 “여기 고집쟁이 작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라고 개회 인사를 했다. 그날 밤 정지용, 염상섭, 김동리를 비롯한 참석자 대다수가 구두와 안경, 모자 따위를 잃어버릴 만큼 만취했다. “처음엔 어색해서였겠지만, 나중엔 그래도 옛 친구들이라 감개가 새로운 바 있었던지 아주 정신을 잃도록 취해 버렸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유신 등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김동리는 문단의 거목이 됐다. 1995년 타계 전까지 우익 문단의 거두이자, ‘본격문학’의 대표자로서 김동리는 항상 논쟁의 최전방에 섰다. 서라벌예대와 중앙대 교수를 거쳐 한국문인협회 회장, 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고, 잡지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을 창간했다. 그사이 김동리는 언제나 경향신문 신춘문예와 문학상의 단골 심사위원이었다. 1968년 창간 22돌을 맞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김동리는 “내가 재직했던 시기는 좌우익 싸움으로 혼란이 심했던 1948년이다. 당시 도하의 각 신문엔 문화면이 없었는데 경향신문에만 1주 2회 문화면이 있었다. 그래서 시나 소설을 한 번만 경향신문에 발표하면 그대로 기성 작가가 되었던 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신인 김동리, 선배 유진오와 ‘세대 논쟁’ 평론가 이어령과 경향 지면에서 격론도

한평생 우익 문단의 거두로 살았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김동리의 삶은 치열함 그 자체였다. <무녀도> <역마> <사반의 십자가> 등 대표작을 비롯한 숱한 작품으로 생명주의, 동양적 정신 등이 담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일궜다. 신과 구원, 인간과 운명, 민족이 그의 일관적인 화두였다. 김동리는 언제나 한국 문학사의 굵직한 논쟁 한복판에 있었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에 바탕을 둔 김동리의 문학적 태도는 해방 뒤 좌우익으로 갈린 문단 대결 구도에서 우파 민족주의 문학 이론의 논거였다.

1939년 20대 중반의 신인이던 김동리는 문단 선배 유진오의 글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세대 논쟁과 함께 신세대의 순수문학 내용에 관한 논쟁을 이어갔다. 1947~1948년 해방 공간에서도 좌익 평론가 김동석과 순수·참여 문학 논쟁을 벌이며 “문학은 영원히 작가 자신에 복무할 따름”이라고 선언하면서 순수문학을 민족문학이자 휴머니즘, 초시대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 논쟁에서 김동리는 거침없고 맹렬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논리가 촘촘하지 못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1959년 김동리는 구세대 대표로서 당시 신예 평론가 이어령과 격론을 벌였다. 김동리가 신진 평론가들을 비판한 데서 시작해, 그해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어령과 김동리는 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비판했다. 이에 다른 평론가, 작가들이 가세해 화려한 논쟁의 장을 펼쳤지만, 그 쟁점과 내용은 빈곤했다고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가했다.

김동리는 말년에 현실 정치에 밀접해졌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 젊은 문인들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집단들이 등장하면서 문협 중심체제에 균열이 가던 1970년 중반이었다. 김동리는 1985년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됐고, 대학 안에 경찰을 주둔시키자는 ‘학원안정법’을 적극 지지했다. 1987년에는 4·13 호헌 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문협 이사장 자격으로 발표했다. 결정적 사건은 김동리가 75세이던 1988년 8월29일 국제펜대회 개막식에서였다. 문협 이사장 자격으로 축사를 하던 김동리는 구속 문인 석방 운동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졌다”고 해 논란을 빚었다. 펜클럽과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반발이 일었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사흘간 총장실을 점거하고 김동리 명예교수의 퇴진을 촉구했다. 결국 김동리는 해촉됐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