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원고지 채우며 아침 맞는 기자·1호 방송작가 ‘대중문화의 산역사’

2016.02.12 21:59 입력 2016.02.12 23:19 수정
유정미 | 영화제작자·유호 손녀

문화부장 유호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사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눈이 너무 높은 거야.”

“…”

<b>‘김내성문학상’ 제정 인사말</b> 195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유호 선생이 경향신문사가 제정한 ‘김내성문학상’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내성문학상은 탐정소설가·대중소설가로 잘 알려진 김내성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경향신문사에서 제정한 소설부문 문학상이다. 제1회 수상작은 1958년 정한숙의 <암흑의 계절>, 제2회는 1959년 박경리의 <표류도>였다. 1960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정미씨 제공

‘김내성문학상’ 제정 인사말 195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유호 선생이 경향신문사가 제정한 ‘김내성문학상’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내성문학상은 탐정소설가·대중소설가로 잘 알려진 김내성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경향신문사에서 제정한 소설부문 문학상이다. 제1회 수상작은 1958년 정한숙의 <암흑의 계절>, 제2회는 1959년 박경리의 <표류도>였다. 1960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정미씨 제공

60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눈이 높다’고 손녀에게 돌직구를 날린 사람은 바로 올해로 아흔여섯이 된 대한민국 최초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인 유호(본명 유해준) 선생, 내 할아버지다. 그의 유머러스한 성품 때문에 지금도 6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조부와 손녀 사이엔 늘 이런 식의 농담이 오고간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엔 진지한 표정으로 “집에 안 들어와도 된다”고 하셔서 배꼽을 잡았다. 나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모든 가족 간의 대화는 내 기억으론 늘 이런 식이다.

그는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입사해 부장으로 퇴직하신 후, 본격적으로 방송작가의 길을 걸어오셨다(이하 할아버지의 호칭을 필요한 부분에선 유호 선생이라고 정리하는 것을 부디 독자와 할아버지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유호 선생은 광복 이후 드라마 작가 1호인 동시에 현재까지도 최다작의 기록을 갖고 있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의 주제가를 통해 서민들의 휴머니티를 대변해온 그는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유호·박시춘·현인’이라는 최고의 히트라인을 구축하며 본격적으로 작사가와 드라마 작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b>럭키레코드사 앞에서</b> 1947년 ‘신라의 달밤’ 작사가인 유호 선생(오른쪽)이 같은 곡을 작곡한 박시춘이 설립한 럭키레코드 사옥 앞에서 가수 현인과 함께 서 있다.  유정미씨 제공

럭키레코드사 앞에서 1947년 ‘신라의 달밤’ 작사가인 유호 선생(오른쪽)이 같은 곡을 작곡한 박시춘이 설립한 럭키레코드 사옥 앞에서 가수 현인과 함께 서 있다. 유정미씨 제공

2011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정도로 한국 대표 드라마 작가인 그는 1939년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42년 제국미술학교 도안공예과 2년을 수료했다.

1943년 동양극장의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일하며 극본 두 편을 써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 두 편이 모두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을 통해 낭독소설로 방송된 것이 인연이 돼 1945년 10월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에 입사, 본격적으로 드라마 집필을 시작했다.

중앙방송국은 1947년 박시춘, 손목인 두 거장을 앞세워 경음악단을 발족한다. 이어 조선방송사업협회에서 추진한 건전가요 보급에 동참해 그는 처음으로 ‘목장의 노래’와 ‘하이킹의 노래’의 노랫말을 쓰며 작사를 시작한다. 이때 작곡을 맡은 박시춘 선생과의 인연으로 그의 노랫말 인생이 시작된다.

유호 선생이 본격적으로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방송국에서 경향신문 문화부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다. 1947년 ‘신라의 달밤’(노래 현인)이 그 시작인데, 시공관(당시 명치좌) 무대에서 처음 발표될 당시 아홉 번의 앙코르를 받기도 한 이 노래의 빅 히트를 계기로 박시춘 선생은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했다. 당시 기자로 재직 중이던 유호 선생은 럭키의 문예부장직을 맡아 ‘오전엔 충무로 경향신문사, 오후엔 소공동의 럭키레코드’를 오가며 회사 마크, 로고, 음반 라벨, 포스터, 가사지의 디자인까지 도맡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향신문은 소설가, 작가 등 다양한 문인들이 기자로 재직하며 활약하던 시절이었고, 유호 선생의 직속 상관인 문화부장 김광주 선생의 배려로 ‘투잡’이 가능했다고 과거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몇 년 전 김광주 선생의 아들인 김훈 작가가 김운경 작가와 함께 할아버지의 인터뷰 자리에 동석해 즐거운 자리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수 현인 선생의 목소리가 낮고 특이한 것도 매력이지만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특히 여성들의 앙코르 요청이 많다는 얘기에 노래가 히트하겠구나 막연히 생각했는데, 앞서 얘기한 9번 앙코르가 터져나왔다는 말을 듣고 신문사에 있다가 부랴부랴 현장으로 가서 직접 현인 선생의 인기를 보니 이거 뭔가 되겠단 확신이 섰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럭키레코드사를 통해 이른바 ‘유호·박시춘·현인’ 콤비가 탄생됐고, 이들은 ‘고향 만리’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발표해 연속 인기를 누렸다. 또 ‘서울야곡’ ‘낭랑18세’ ‘아내의 노래’ ‘가을인가 가을’ ‘여인애가’ 등도 이 시기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유호 선생은 운명처럼 노랫말을 만들게 되었다. 6·25전쟁이 터졌지만 피란을 가지 못해 적 치하를 청파동 집에서 겪어야 했던 그는 9·28 서울수복을 맞자 일단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시내를 거닐다 명동에서 우연히 밀짚 벙거지 차림의 박시춘 선생과 마주친다. 이들은 오랜만의 해후에 기뻐하며 필동 박시춘 선생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날 밤 ‘전우야 잘 자라’가 만들어진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는 곧바로 육군본부 정훈국을 통해 전군에 악보가 뿌려지며 군의 사기를 한껏 북돋웠다고 한다. 진격의 주제곡이 된 이 노래는 1·4후퇴에 즈음해 육본에 의해 금지됐는데, 2절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노래는 휴전 이후에야 복권되었다. 이후 정훈국의 의뢰를 받아 본격 군가를 작사했는데 지금도 장병들에게 익숙한 군가 ‘진짜 사나이’가 그때 탄생된 작품이다.

이렇듯 유호 선생은 늘 의미가 부여된 노래와 인연이 깊다. 광복을 기념한 노래 ‘신라의 달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 전쟁 중에 만들어진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 그리고 1·4후퇴 때는 군인들 사기 앙양을 위해 만들어진 ‘전선야곡’ 등이 그 예다. 육본 정훈국 문예중대에 예속되었던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 시절에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 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의기투합해 만든 노래가 ‘삼다도 소식’, 피란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개인적으로는 할머니가 생전에 들을 때마다 눈을 감고 아련한 표정을 지으셨던 노래가 몇 곡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1·4후퇴 당시 문예대 소속인 할아버지 때문에 따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당시 피란 수도인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던 어머니와 아내, 아들들을 찾으려고 부산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내와 가족을 만난 할아버지는 피란길에 운명을 달리한 갓난쟁이 둘째 아들을 제 손으로 묻었다. 전쟁 중에 아내와 가족을 찾으려 절박했던 할아버지의 눈에 비친 당시 부산 피란민들, 그 광경과 사연이 더 생생하게 고스란히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랫말에 실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마침내 휴전이 되고 유호 선생이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과 부장을 거치면서 발표한 노래는 영화 <산유화>의 주제가인 ‘여옥의 노래’(송민도), ‘카츄샤의 노래’(송민도), ‘아무도 없어라’(나애심), ‘그늘에 핀 꽃이라’(백설희) 등이다. 1950년대 후반, 어렵기도 했지만 휴전이 되어 조금은 희망적이던 시대를 살았기에 제법 낭만적이 되었을 그의 마음이 반영된 노래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경향사람들] (8) 원고지 채우며 아침 맞는 기자·1호 방송작가 ‘대중문화의 산역사’

이후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드라마 작가로 입문한 유호 선생은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왕성한 드라마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방송계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단연 ‘유호 시대’였다. 지금도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리메이크되는 <짚세기 신고 왔네> <님은 먼 곳에>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1961년 개국한 TBC TV의 <초설>로 본격적인 TV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이후 을 통해 방영된 <맞벌이 부부> <짚세기 신고 왔네> 등은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때문에 방송국 측은 <일요극장>을 아예 <유호극장>으로 타이틀을 바꿔 2년간 방송했다. 특히 일일연속극 <딸>은 300회가 넘게 방영되면서 당시 최장 드라마로 기록됐다.

유호 드라마는 속속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주제가 또한 크게 히트했다. ‘맨발의 청춘’ ‘종점’ ‘길 잃은 철새’ ‘위를 보고 걷자’ ‘남성금지구역’ ‘떠날 때는 말없이’ ‘짚세기 신고 왔네’ ‘님은 먼 곳에’ 등이다. 드라마, 영화, 주제가가 모두 인기를 얻으면서 작가 유호를 찾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이봉조 선생과의 일화도 많이 회자된다. 작사를 부탁할 때 이봉조 선생은 늘 “작사 하면 유호 선생 아니오”라고 하셨고, 유호 선생이 “노래는 누가 합니까”라고 물으면 늘 “노래 하면 현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유호 선생은 73세이던 1993년 SBS 추석특집극 <왔습니다>를 마지막으로 절필했다. 1980년부터 5년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직을 맡아 방송작가들의 권익과 방송문화 발전에 공헌했던 그는 절필 이후에도 그와 콤비를 이루던 연출가 최상현, 김수동의 요청으로 각각 이들의 정년퇴임 작품인 <구리반지>(KBS)와 <너두 늙어봐라>(KBS)를 의리상 집필하기도 했다. 방송작가로 그가 쓴 드라마는 100여편이다. 신문기자 생활 7년을 제외하고 38년간 매년 30회 이상의 드라마를 썼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 유호 선생은 아침이면 늘 책상 앞에서 노란 원고지를 채우고 계셨다. 그 전날 아무리 과음한 경우에도 일어나면 늘 신문을 가장 먼저 챙겼고, 식사도 하기 전에 책상 앞에 앉아 단어 하나라도 꼭 써놓고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절필한 뒤에는 사실 더욱 바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늘 작가, 탤런트, 영화배우 등 수많은 방송연예계 선후배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아주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딱히 거절하신 기억이 없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선후배들과 보낸 시간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본인의 직업을, 시대의 희로애락을 기꺼이 누리셨던 분이고, 함께한 모든 이를 마음으로 따뜻하게 품을 줄 아는 선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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