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일제와 손잡고 독립운동···불운한 인도 영웅 ‘찬드라 보스’

2016.11.25 20:38 입력 2016.11.27 23:57 수정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인도와 일본 - 이것도 독립운동이다

194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를 보도한 잡지 표지에 실린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얼굴.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그는 대동아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했다.

194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를 보도한 잡지 표지에 실린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얼굴.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그는 대동아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했다.

지난 회에서는 한국의 부루마불 게임과 비슷한 형태의 ‘대동아’ 말판놀이를 살펴봤다. 1940년대 당시 이 놀이를 만든 사람들은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진행상황을 일본의 어린아이들에게 소개한다는 계몽적 목적을 표방했다. 현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비참한 실상을 알지 못한 일본의 어린아이들은 이 놀이를 하면서, 서구 세력의 독무대였던 동남아시아의 영토를 빼앗으며 국력을 키워 나가는 조국 일본을 자랑스러워했을 터이다. 물론,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조국이 연합군 포로에 대한 식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음은 알지 못한 채.

일본 ‘대동아전쟁’을 어린이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주사위놀이판 ‘대동아공영권 일주’. 말판을 거꾸로 돌리면 인도의 친일 정치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흰 옷을 입고 행진하는 군대의 모습이 보인다(왼쪽).

일본 ‘대동아전쟁’을 어린이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주사위놀이판 ‘대동아공영권 일주’. 말판을 거꾸로 돌리면 인도의 친일 정치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흰 옷을 입고 행진하는 군대의 모습이 보인다(왼쪽).

[한국이 모르는 일본] (11) 일제와 손잡고 독립운동···불운한 인도 영웅 ‘찬드라 보스’

아무튼 ‘대동아공영권’은 서구 세력에 맞서 일본이 국력을 키워 나간 결과로 인식되었고, ‘대동아’ 말판놀이를 위시해서 이를 소재로 한 놀이가 숱하게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필자는 ‘주사위놀이 대동아공영권 일주(雙六大亞共榮圈めぐり)’라는 주사위놀이 말판을 소장하고 있다. 전쟁 중에 만화가로 활동했고, 패전 후에는 동화의 삽화를 그린 사와이 이치사부로(澤井一三郞)가 그린 이 말판은, ‘대동아공영권’을 소재로 한 여러 놀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말판 속의 각 지역 칸에는 만주국,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필리핀, 자바, 싱가포르, 태국, 미얀마, 인도 등의 특징적인 풍물과 함께 해당국의 친일 정치인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이들은 일본의 괴뢰로 간주되었고, 이들의 존재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구 세력의 식민지 상태였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이들은 조금 다른 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말판에 등장하는 지역들, 그리고 등장하지 않는 지역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말판 왼쪽 위의 ‘인도’다. 말판을 거꾸로 돌리면 당시 자유 인도 임시정부(Arzi Hukumat-e-Azad Hind)의 수반이었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와 흰 옷을 입고 행진하는 군대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인도 독립운동의 여러 분파 가운데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과 적대하던 나치 독일 및 제국주의 일본의 도움을 끌어내고자 하는 세력을 대표했다. 1943년 11월5~6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 태국, 미얀마, 필리핀의 ‘대동아회의’에는 옵서버로 참가했다. 그가 옵서버로 참석한 것은 영국령 인도가 당시 대동아공영권에 포함되지 않았고, 인도가 일본군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로 설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본 측에 서면서 인도가 일본의 차기 전략 목표로 부상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인도는 불교 발상지로서의 이미지가 컸다. 그런데 13세기 일본의 승려였던 니치렌(日蓮)은 독특한 주장을 전개했다. 자신은 일본에 전래된 모든 불경을 연구해 불교의 가장 깊은 이치를 깨달았는데,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했으므로 자신의 깨달음을 인도에 거꾸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도 뭄바이 근처 석굴에서 발견된 13세기 일본 승려 니치렌이 직접 쓴 ‘나무묘법연화경’과 제석천 족자.

인도 뭄바이 근처 석굴에서 발견된 13세기 일본 승려 니치렌이 직접 쓴 ‘나무묘법연화경’과 제석천 족자.

비록 외래 종교지만 자기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습이 가장 순수하고 그 외래 종교의 원고향에서는 종교적 원형이 쇠퇴했으므로 거꾸로 전도해야 한다는 발상. 이는 유럽에 예수의 복음을 거꾸로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한국 교회들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닌 셈이다. 니치렌이 창시한 일본 불교 종파인 니치렌슈(日蓮宗)는 <현불미래기(顯佛未來記)>라는 책을 통해 전해져 온 스승의 이러한 유언을 실천하고자 대대로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근대가 되면서 마침내 이러한 노력의 결실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뭄바이 근처의 칸헤리(Kanheri) 석굴에서는 니치렌슈의 독특한 ‘나무묘법연화경’ 문구가 확인된다. 2008년 필자가 일본인 연구자들과 뉴델리에 갔을 때 묵은 숙소도 니치렌슈의 사찰인 ‘묘법사(妙法寺)’였다. 이때 인도와 일본의 접점 역할을 한 것이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라쉬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다. 라쉬 비하리 보스는 인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 귀화한 상태였다.

한편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간디 등이 주도하던 국민회의(The Indian National Congress)에 소속되어 있다가 노선상의 차이로 이를 이탈, 1941년 독일로 갔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과 맞서던 나치 독일의 힘을 빌려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는 ‘적의 적은 친구(The enemy of my enemy is my friend)’ 전략이었다. 그러나 독일 측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1941년 12월 일본군은 홍콩과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6만5000명의 인도군을 생포했다. 일본군은 이들 포로를 조직하여 인도국민군을 창설시켰다. 1942년 3월에는 인도국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국외의 여러 단체가 일본 도쿄에서 회담을 열었다. 일본 측은 라쉬 비하리 보스를 의장으로 하는 인도독립연맹(Indian Independence League)을 창설시키고 인도국민군을 그 산하에 두었다. 그러나 중국과 함께 역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자임한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괴뢰로 이용하려는 일본 측에 저항했다. 1942년 12월 인도국민군을 이끌던 모한 싱(Mohan Singh)이 일본 측과 대립하다 일본 특무기관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국민회의 밖에서는 소리없이 존경을 받던”(게일 옴베트 <암베드카르 평전> 중)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잠수함에 태워 독일에서 일본으로 데려왔다.

1943년 5월 도쿄에 도착한 보스는 도조 히데키 총리와 회견을 가졌는데, 이때 보스에게 매료된 도조는 인도 독립을 위한 원조와 협력을 약속했다(나카자토 나리아키 <팔 판사>). 1943년 10월에는 보스를 수반으로 하는 자유 인도 임시정부가 발족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실상 일본 측은 임시정부를 일본의 괴뢰로 간주할 뿐이었고, 보스는 이러한 일본 측에 불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괴뢰’라 일컬어지는 만주국의 황제 푸이가, 만주국을 일본과 동등한 위상에 놓으려 하며 일본 측과 빈번히 충돌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1944년 3월에는 일본군이 최대의 난맥상을 보인 임팔전투(Battle of Imphal)가 일어났다. 이 전투를 인도 해방전쟁으로 인식한 보스는 인도국민군을 독립군으로서 가장 먼저 인도에 진입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군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보스는 패주하는 일본군과 함께 1945년 5월 방콕으로 돌아왔고, 호찌민에서 일본의 패전을 접했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권위주의적 독립국가의 모델인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려 했지만, 타이베이에서 탑승한 소련행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이상과 같은 행적을 보인 보스를 인도 바깥의 많은 사람들은 파시스트 국가들에 동조한 전범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벵갈을 중심으로 한 인도에서는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보스를 파시스트로 보는 데 반대하고, 그를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인식한다. 1945년 11월 델리에서 인도국민군을 재판하는 군법회의가 시작되자,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 1947년 8월 인도 독립으로 이어지는 촉발제가 되었다. 몇 년 전 필자가 어느 인도인 교수에게 보스에 대한 견해를 물었을 때에도, 그는 보스가 간디나 네루와 동등한 정도로 인도의 독립에 이바지한 영웅이라고 답했다. 특히 그의 출생지인 벵갈지역에서는 보스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때는 영국령 인도의 중심이었고, 현재는 방글라데시·미얀마·중국 등 여러 나라와 복잡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벵갈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간디와 대립한 달리트(the dalits, 불가촉천민) 해방운동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와 같은 사람 역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인의 독립 영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도의 대표적 위인인 간디에 맞서 싸운 보스도 암베드카르도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 터이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독립운동사에는 간디·네루 등과 함께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갈라서서 무슬림 중심의 파키스탄을 분리 독립시킨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와 같은 사람도 존재한다. 무굴제국 이후 영국령 인도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동안 같은 나라였던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는 스스로 분단을 택했다. 장강명의 최근 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에서 언급되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몽골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내몽골(남몽골) 등도 자의적·타의적으로 분단된 상태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분단을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예멘과 같이 ‘평화통일’ 뒤에 내전을 겪고 지금까지 혼란에 빠져 있는 사례도 있다.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데 참고가 되는 것은 ‘통일 독일’이나 베트남뿐만이 아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