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술인의 삶터이자 일터…“주거비·육아 걱정 더니 창작에 더 전념”

2016.11.25 21:26 입력 2016.11.25 21:30 수정

예술인협동조합 ‘막쿱’

서울 중구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 1층 커뮤니티룸에 피아노, 소파,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공연, 전시회, 반상회가 열린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서울 중구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 1층 커뮤니티룸에 피아노, 소파,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공연, 전시회, 반상회가 열린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배고픈 예술인들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주거비다. 전업 예술인 10명 중 7명의 수입이 월 100만원 미만. 예술인 공공 임대주택이 서울 중구 만리동 ‘달동네’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예술인들이 주로 활동하는 대학로와 홍대로 이동하기 편해 인기가 좋다. 연극·미술·음악·문학 등 분야에서 일하는 스물아홉 가구…공용 공간에서는 영화 상영, 연극 및 음악 공연, 퍼포먼스, 전시회도 열린다.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전경. 막쿱 제공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전경. 막쿱 제공

‘결핍은 창작의 원동력’이란 말도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좋아하는 일만 좇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예술인들에게 주거비는 삶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덜 먹고 적게 사 입을 수는 있다지만, 편히 몸을 누일 곳 없이 살아가기란 무엇보다 어렵다. ‘작품은 배고프고 헐벗은 곳에서 나온다’는 것도 옛말일지 모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6일 발간한 ‘예술인 맞춤형 사회복지사업 개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전업 예술인 열 명 중 일곱 명(68.7%)이 예술 관련 활동으로 버는 수입이 월 100만원 미만이라고 답했다. 이 가운데 43.1%는 50만원도 안됐다. 월 200만원 이상 번다고 답한 전업 예술인은 11.9%에 그쳤다. 상당수 예술인들이 전공분야와 다른 일을 병행하지만 이마저도 저소득·불안정 일자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1일 늦은 오후 서울 중구 만리동 ‘달동네’를 올랐다. 충정로역, 애오개역, 서울역을 삼각형으로 이으면 그 사이에 위치한 이곳에 예술인 스물아홉 가구(현재 두 가구 빔)가 모여 있다. 역에 내려서도 가파른 골목을 15분은 걸어올라야 했다. 처음 찾는 운전자는 내비게이션을 켜고도 헤맬 법한 달동네 꼭대기 막다른 길에 깔끔한 4~5층짜리 회색 건물 세 개 동으로 이뤄진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 예술인들이 ‘막쿱(Mallidong Artists Cooperative, M.A.Coop)’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만리동 218-105번지 일원인 이곳은 지난해 예술인 주택이 들어서기 전까지 만리배수지 관사가 있던 자리다. 앞쪽으로 낮은 주택들이 밀집해 있고, 뒤에는 환일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외진 느낌은 들지만, 서울이 한눈에 보이는 데다 많은 예술인들이 활동하는 대학로와 홍대를 비롯한 서울 어디로나 이동하기 편해 예술인 사이에 인기가 좋다. 스물아홉 가구의 집은 모두 전용면적 60㎡ 미만으로, 스튜디오형 아홉 가구와 방 두 개와 세 개짜리가 각각 열 가구씩이다. 주변 전세 시세의 80% 수준으로 최장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1층 커뮤니티룸은 커다란 유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김창길 기자

1층 커뮤니티룸은 커다란 유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김창길 기자

이날 만리동 예술인 주택 1층 커뮤니티룸에서 만난 영화연출가 서동훈씨(34)는 성악을 하는 어머니와 방이 두 개인 집에 산다. 어머니 방과는 독립된 서씨의 방은 작품을 쓰고 편집하는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서씨는 “여기로 이사온 뒤 생계를 위한 일을 줄이면서 연출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면서 “그래서인지 요즘 일도 잘 풀린다”고 웃었다. 2013년 공공임대주택 입주를 알아보던 차에 이곳을 알게 돼 신청했고, 입주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다. 원래 부모님과 함께 연립주택에서 반전세로 거주하던 그는 이사 후 주거비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했다. 전액 전세로 살 수 있어 대출이자를 내더라도 월세를 낼 때보다 훨씬 부담이 적어서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는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다니며 연출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도 가능해졌다.

지난 1일 예술인 주택 옥상에 작은 독서실처럼 꾸며진 쉼터 의자에 주민 서동훈씨가 앉아 있다.<br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지난 1일 예술인 주택 옥상에 작은 독서실처럼 꾸며진 쉼터 의자에 주민 서동훈씨가 앉아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서씨는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축구선수를 꿈꿨다. 하지만 2010년 영화배우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문득 ‘아버지가 내게 하기를 원하셨던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이 모두 예술을 하시는 분들이다보니 평소에 ‘내가 남들과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했다. 여러 단편영화에 출연하던 서씨는 2013년 처음으로 한 상업영화의 단역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배우보다 더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해 비상업성 코미디 단편영화 두 편을 작업했고, 올 초부터 만들고 있는 작품은 내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개최되는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출품을 앞두고 있다. 그는 “여기 살면서 다른 입주자의 연기를 보고 배우며 많이 는 것 같다”며 “무엇보다 일이 늘어나 바빠져서 좋다”고 했다.

또 다른 30대 연출가 이은서씨(33)도 지난해 남편과 시어머니, 만 한 살과 네 살 아이들과 예술인 주택에 입주했다. 관악구 봉천동에서 전세로 살던 이씨는 이사한 이유를 묻자 “엄마로서의 정체성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결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주 활동공간인 대학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작업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며 “이곳은 1층에 동료들을 만나 일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보니 육아도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좁아지면서 남편과 시어머니의 ‘불평’을 듣기도 했지만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컸다”고 했다.

무주택 문화예술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예술인 주택의 입주민 66명은 연극과 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각각 3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음악·문학·건축 등 분야에서 일한다.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30~40대가 가장 많다. 이들은 입주 전 1년 반 이상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공동체 교육을 받았다. 비폭력 대화법을 배우고, 조별로 협동조합 설립, 환경 미화, 공동체 네트워크 등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교육과 토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설계 과정에는 조합원 의견을 반영했다. 조합원 특성에 맞게 당초 계획보다 원룸을 줄이고, 2인 이상 가구용 집을 늘린 게 한 예다. 1인 가구의 경우 임대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침실은 독립공간으로, 거실과 부엌, 욕실 등은 공유하는 형태로 구성했다. 서씨는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갈등이 없지 않지만 정해진 사항은 주민들이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매달 한 번 반상회를 열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흡연·주차 문제 등을 논의한다.

꽤 넓은 1층 커뮤니티룸은 주민들이 함께 모이거나 작업을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이곳에서 연기 연습이나 교육이 이뤄지기도 하고, 공연,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커다란 유리창이 두 면을 둘러싸고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흠뻑 품을 수 있는 공간에 피아노, 소파,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었다. 공용부엌과 화장실도 설치해 놨다. 옥상에는 작은 독서실처럼 꾸며진 곳을 마련해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며 책을 볼 수 있다. 건물끼리는 구름다리로 연결해 이웃에게 쉽게 다가가도록 설계했다. 지하에는 주차장이 있다. 서씨는 “바로 앞에 25층짜리 아파트 재개발이 마무리 단계여서 남산서울타워까지 훤하던 시야가 가려진 게 무척 아쉽다”고 했다.

지난해 5월 예술인 주택 야외에서 ‘만리재로27길 오프닝쇼’ 개막식이 진행되고 있다.  막쿱 제공

지난해 5월 예술인 주택 야외에서 ‘만리재로27길 오프닝쇼’ 개막식이 진행되고 있다. 막쿱 제공

모두 예술분야에서 일하는 입주민 특성상 예술은 이들을 연결하고, 이들과 만리동의 다른 주민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지난해 5월 입주민들은 만리동 이웃주민 등을 초청해 집들이 행사인 ‘만리재로 27길 오프닝 쇼’를 열었다. 영화 상영, 연극 및 음악 공연, 퍼포먼스, 전시회 등이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시끌벅적했다. 옥상에서는 주변 재개발 지역에서 주운 깨진 문짝, 벽돌, 간판 등을 모은 작은 전시회가 열렸다. 재개발 현장을 찍은 흑백사진도 전시됐다. 이씨는 당시 다른 입주민들과 함께 전시에 참여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예술강좌, 벼룩시장, 수지 공방, 디스코 파티 등을 진행했다. 근처 서울디자인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직접 디자이너와 모델이 된 ‘서울의 달, 동네 패션쇼’, 홍대 앞 음악인들이 재개발로 사라진 만리동 주민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음악공연 ‘구루부 구루마’도 펼쳐졌다. 이씨는 “‘굴러들어온 돌’인 우리가 문화를 통해 지역주민들과의 차이를 메우고 싶었다”며 “서로 소통을 시작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예술인 주택 야외에서 진행된 ‘만리재로27길 오프닝쇼’에 참석한 주민들이 연극 <쉬또 젤라찌>를 관람하고 있다.  막쿱 제공

지난해 6월 예술인 주택 야외에서 진행된 ‘만리재로27길 오프닝쇼’에 참석한 주민들이 연극 <쉬또 젤라찌>를 관람하고 있다. 막쿱 제공

열정적인 입주 첫해가 지나고 고민도 남았다. 다들 본인의 예술활동이 있다보니 조합원으로서의 일에 오랜 시간을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입주민들은 당번을 정해 청소와 분류배출을 하는 것부터 공동체를 운영하는 일까지 할 일이 제법 많다. 이씨는 “이곳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주거지”라며 “장기적으로 화려한 행사들이 지속가능할지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예술인 주택 지하주차장에서 서울디자인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디자이너와 모델을 맡은 ‘서울의 달, 동네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막쿱 제공

지난해 11월 예술인 주택 지하주차장에서 서울디자인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디자이너와 모델을 맡은 ‘서울의 달, 동네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막쿱 제공

이들은 여전히 협업이 예술인 주택이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믿는다. 이씨는 내년 1월 중순 지역주민들과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연극’ 공연을 커뮤니티룸에서 열 계획이다. 조합원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는 공연을 위해 이곳에 사는 예술인들과 힘을 모으고 있다. 서씨에게도 배우로 출연해 줄 것을 제안했다.

아직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예술인들을 위한 주거공간은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서는 대학로와 가까운 성북구에 세 곳이 지어졌거나 지어지고 있다. 정릉동 793-3번지에 만리동에 이어 두번째 예술인 주택 19가구, 삼선동2가 77번지에 연극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11가구, 삼선동3가 27-2번지에 민관협력형 토지임대부 공동체주택 ‘배우의 집’ 10가구 등이다. ‘배우의 집’은 공공임대주택 형태인 다른 곳들과 달리 서울시가 토지와 다가구주택을 민간사업자에게 40년간 저렴하게 빌려주고 사업자는 입주자에 맞춰 리모델링해 재임대하는 차이가 있다. 다만 임대료가 저렴하고,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공용공간을 뒀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리동에 온 뒤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두 예술인은 “작은 아쉬움은 있지만 계속 이곳에 살고 싶다”며 “예술인들의 요구를 반영한 집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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