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하면서도 화기애애…울음을 삼키는 일본 장례식

2017.12.22 17:28 입력 2017.12.22 17:34 수정
박철현

박철현의 일기일회

떠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손주들.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작별을 고했다.

떠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손주들.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작별을 고했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두어 번 언급했던 장인어른이 10월29일 세상을 떠났다.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가 소식을 접했고, 바로 달려갔다. 큰처남은 요양병원 측과 여러 가지 수속을 밟느라 바빴고 아내와 처남댁은 도합 6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안실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망자와 산 자가 교차하는 그 공간에 둘이, 아니 혼자 남겨져 있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념의 대부분은 한 시대를 오롯이 살다 간 장인어른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일본이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 시절, 아키타현의 시골 마을에서 아홉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고향에 돌아온 형들의 유해를 통해 전쟁을 경험했다. 이내 고도성장기가 찾아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청춘취직열차를 타고 도쿄로 상경해 중견 전기회사에 입사했고, 거기서 정년퇴직했다. 고도성장과 버블 시대의 최전성기를 경험했지만 타고난 절약정신으로 헛되이 재산을 낭비하지 않았다.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이 찾아와도 오히려 자산을 불려 나갔다. 아들과 딸은 그를 차갑고 완고한 아버지라고 내내 말했지만, 마지막 즈음에는 “내가 너희들과 손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구나”라며 생전 증여를 하셨다. 지금 우리 가족과 처남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그가 남기고 간 유산이다. 영안실에 누워 있는 그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처남과 아내가 안치소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 안치소는 장례식을 치르기 전 염을 하고 유체를 보관하는 장소다. 안치소 사람들은 유체를 보관하면서 유족들이 원하는 장례식장을 알아봐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며칠 지나 안치소가 장례식과 화장까지 동시에 치를 수 있는 다마장례식장을 소개했다. 장례식은 11월7일에 거행하기로 했다. 그동안 처남과 아내는 내내 담담했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철부지같이 굴었다. 이해가 안 갔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 당일 준비를 하고 식장을 향하는 차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그렇게 떠드냐고. 큰아이는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 더 화를 내려 하자 운전하던 아내가 “그러지 마. 아이들이 뭘 알겠어. 오히려 울고 그러는 게 더 이상해”라고 한마디 했다. 고인의 딸이 그러는데 내가 뭐라 반론하는 것도 그런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운전을 하는 아내와 때때로 울컥해지는, 역시 말없는 나와 그리고 재잘대는 아이들로 가득 찬 소형 밴은, 돌이켜보면 매우 기묘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른 장례식도 내내 그러했다. 미리 오신 분들은 대기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다과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아이들은 밖에서 떠들며 술래잡기를 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데 잠시 후 식이 진행되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여기 온 지 16년이 되었지만 일본 장례식에는 처음 참석해 보는구나, 슬퍼도 겉으로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슬픔을 내 보이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문상객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느끼게 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장례문화였다. 한국처럼 며칠 밤 장례식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동안 망자를 추모하고 기억한다.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만진다. 큰아이는 잠시 숙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할아버지 잘 가요. 그동안 감사했고, 수고하셨어요. 아 참, 저쪽 세상 아름답대요”라며 밝은 미소를 보였고, 둘째는 흰 국화꽃을 장인어른 얼굴 주위로 놓으면서 “꽃향기 많이 맡으시니까 기분 좋으실 거야. 그렇지?” 하며 나를 쳐다본다. 셋째는 장인어른의 얼굴 옆에 자기 얼굴을 내밀고 포즈를 취하고 막내도 누나, 형의 이런 모습에 동화돼 시종일관 웃음을 띤다. 이 광경을 보던, 장례식에 참여한 유일한 외부인이자 한국 사람인 우리 회사 대표가 “우리 할머니가 생전에 꽃상여 타고 저세상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걸 여기서 보네. 이런 장례식 정말 좋은 것 같다”면서 연신 아이들의 사진을 찍는다. 엄숙했지만, 아이들 덕분에 밝았던 장례식이 끝나고 바로 옆 건물에서 화장이 진행됐다. 역시 담담했고 그나마 울컥한 이는 내가 유일했던 것 같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화장이 끝나자 이번엔 단정한 제복을 입고 흰 면장갑을 낀 화장 담당자가 유족들을 불러 모은 후 유골함에 유골을 담으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고인을 유골함에 담을 때도 순서가 있는데 먼저 다리 부분부터 넣고 허리 그리고 상체 부분, 여기가 갈비뼈지요. 그리고 얼굴 부분을 담습니다. 마지막에 두개골을 넣고 뚜껑을 닫습니다. 저세상에서도 바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서대로 넣는 것입니다. 고인은, 이 세상에서 고인이 되신 것이고, 저쪽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보내드리는 것이 바로 화장의 의미입니다.”

다카하시 유지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박철현 제공

다카하시 유지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박철현 제공

유골 담는 것까지 나름의 문화가 존재한다. 아무튼 이렇게 두 시간짜리 장례식이 끝났다. 참가자는 아이들까지 쳐서 21명. 유골함은 처남이 가져가고, 아내는 유품을 보관하기로 했다. 조촐하면서도 의미가 있는, 번잡하지 않은 장례식이다. 한국에서 장례식을 몇 번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정신이 없었다. 세상 무너진 듯 울던 사람이 두어 시간 후엔 술 마시며 고스톱 치면서, 호상이니 괜찮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간혹 술에 취한 형제들끼리 싸움도 나는, 아무튼 뭔가 어수선하고 소란한 장례식만 경험하다가(내가 그런 장례식만 경험했을 수도 있다) 낮시간에 정해진 식장에서 간소하고 조용하게 행해지는 장례식을 처음 겪어보았다. 한국의 이런 장례식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문상객들의 왁자지껄함이 상주들을 위로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갔는데 고인의 얼굴조차 못 보는 건 이상하다. 한국에서 관을 열어 본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여기선 장례식을 진행하는 이가 관을 열고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시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이제는 다시 못 볼, 한줌 뼛가루가 되어 사라질 할아버지의 얼굴에 꽃을 놓으면서 당신의 얼굴을 만지고 손으로 비비면서 미소를 띠는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고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례문화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에게 물었다. 무섭지 않더냐고. 그러자 이제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한 막내가 “무섭지 않았어. 근데 다음은 할머니겠네. 그건 안 좋아”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를 법한 네 살짜리 아이가 파킨슨병으로 십수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게다가 장례식 내내 웃었던 아이가 그래도 죽음은 안 좋은 것이라는 걸 체감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게 놀랍다. 그러자 둘째가 “아냐. 다음 차례는 아빠일지도 몰라”라고 말한다. “아니 내가 왜?!!”라고 큰 소리로 반문하자 “아빠, 담배 피잖아. 그것도 많이. 그러니까 죽지 않으려면 담배를 끊어야 해”라고 단언한다. 나머지 아이들도 “맞아, 맞아”라며 깔깔거린다. 아내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보지만 “그러니까 담배 좀 끊어”라는 차가운 말만 돌아온다. 풀도 죽고, 반론의 여지가 없어 뚱하니 앉아 있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아까 화장할 때,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갈 때….”

“응?”

“아니, 그냥. 오빠가 울어줘서 고맙다고.”

“아. 내가 울었던가? 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적당히 얼버무린다. 그러곤 둘 다 말이 없다. 운전하는 아내의 눈을 보니 조금 눈물이 고인 듯하다.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꼭 이러더라. 이런 딸과 손자들을 세상에 두고 가신, 그리고 일본의 근현대를 온몸으로 살다 간 평범한 어른 다카하시 유지의 명복을 빈다. 향년 81세다.



[다른 삶]조촐하면서도 화기애애…울음을 삼키는 일본 장례식


▶필자 박철현 2001년 도일. 한국에선 영화 연출을 공부했지만 일본에선 오마이뉴스재팬, JP뉴스 등에서 기자로 10년간 일했다. 도쿄 우에노에서 바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고, <일본 제국은 왜 실패했는가>와 <인터넷 동반자살>을 번역했다. 1976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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