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끝자락인데, 수영복을 입고 다니는 곳에 있으니 한파로 고생하는 한국의 가족에게 미안하고 보고싶다…

2017.12.29 17:06 입력 2017.12.29 20:32 수정
선현경

선현경의 ‘잠시멈춤’

며칠 전 하와이 뉴스에 백사장이 파도에 깎여 해안 침식이 심각하다고 했다. 유명한 선셋 비치는 3m나 물러났단다. 아름다운 자연도 끝이 있나…지구도 가는 세월을 막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며 좋은 점은 유머가 생긴다는 것인데, 화가 나고 걱정이 돼도 이젠 웃음이 난다. 차가 고장나도, 보드의 프린트가 벗겨져 몸에 문신이 생겨도, 남편의 안경을 뭉개도 웃음이 난다. 어쩔 수 없다. 웃음은 낯선 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이니까. 해변에 누워 모래를 보며 또 웃는다.연말이니 식구들과 전화를 하다가 깜짝 놀란다. 내가 이렇게 다정했었나? 진작 그리 살것을… 또 웃음이 났다. 그래 웃자! 웃고, 다시 시작하자!

일러스트 | 이우일

일러스트 | 이우일

2017년이 며칠 남지 않은 끝자락에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길에 돌아다니는 곳에 있으니, 연말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올해 한국은 전례가 없이 이른 한파로 시베리아보다 춥다는 뉴스를 들었더니 이곳의 겨울 날씨가 좀 미안하고 부끄러워진다.

연말이 되었는데 꼭 봐야 할 사람들을 못 보고 지나가야 하니 날씨만 미안하고 부끄러운 게 아니다. 갑자기 아파서 수술을 했다는 동생도 보고 싶고, 동생 수술로 마음 아팠을 엄마도 보고 싶고, 공부한다고 멀리 떠난 딸도 보고 싶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서 살아보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가족들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진다. 이렇게 해가 간다. 해를 보낸다는 건 헤어지는 것과 같이 쓸쓸한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도 하와이에는 가족이 하나 있다.

바로 4년 전 이곳에 정착한 시동생 부부다. 시동생은 서핑을 좋아해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 그는 회사에 다니고 동서는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며 하와이에 정착한 부부다.

가족이 있으니 좋다. 김치를 듬뿍 담가 나눌 수도 있고,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엔 명절이라고 만나 저녁을 함께하기도 했다. 각자의 생활이 있어 자주 볼 수는 없지만 한 시간만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거리에 가족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덕분에 선뜻 이곳에서 살아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날씨와 바다 생각만으로도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긴 하지만, 살아볼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준 이들이다.

며칠 전 하와이 뉴스에서 해변 백사장이 파도에 깎여 해안 침식이 심각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겨울이 유난하다고 했다. 오하우 북쪽에 있는 선셋 비치는 침식 때문에 백사장 위의 인명구조 타워를 작년보다 3m나 육지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해마다 열리는 서핑대회의 진행 무대도 변경했다고 한다.

선셋 비치라면 파도가 높아 서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폭풍을 견뎌낸 활처럼 휘어진 야자수가 있고 석양이 멋있어 이름마저 선셋 비치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달력사진이 되는 현실감이 없는 해변이다. 그런 곳이 사라지고 있다.

북쪽 해안(노스 쇼어)을 따라 있는 대저택의 소유자들이 걱정이었다. 그들은 개인 해변이 있어 바다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집에 설치되어 있다. 하와이 관습법에 따르면 해안선은 육지의 가장 높은 지점에 남는 물 자국을 토대로 결정한다. 그러니 해안선이 바뀌어 일부 주택의 개인 땅이 공공 해안선에 포함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거다. 원래 개인의 땅이었지만 자연재해로 주정부의 땅이 되었다. 공공의 땅이니 개인이 원한다고 해서 보수 공사를 하거나 구조물을 세워 넣을 수가 없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서로 논의 중인 모양이다.

그런 멋진 해변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있는 동안 자주 가봐야겠다. 그 생각을 시동생에게 말했더니 그도 4년 전 도착했을 때 똑같은 뉴스를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해변이 사라지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라며 웃었다.

그는 서퍼다. 그래서 이민 초창기엔 집도 노스 쇼어에서 구했다. 회사까지 가려면 차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데도 해변이 좋아 그곳에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해변이 오자마자 없어질지도 모른다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변을 찾았다고 한다. 짬이 날 때마다 북쪽 해변에서 서핑을 했단다. 하지만 모래가 깎여나갈 때마다 그 해변은 복구되었다고 한다. 주정부에서 모래를 사다가 그곳에 어마어마하게 부어놓는다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부산 해운대에 모래를 사다 부어놓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땐 모래를 사다 해변에 붓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별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별나다고 생각했던 일을 이곳에서도 해마다 하고 있었다. 해변에 모래가 모자라서 모래를 산다. 모래를 실은 배가 바다를 건너 해변으로 와 모래를 부어놓다니 이솝 우화 같은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해변이 몇 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게 보였다. 현저히 폭이 줄어든 해변들. 방파제에 두둑이 쌓아놓은 모래주머니들도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이 많은 호놀룰루 쪽의 해변들도 마찬가지다. 와이키키의 작은 해변들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떤 해변은 너무 작아져서 호텔식당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해마다 해수면이 올라오고 있다. 그로 인한 해변 침식은 막을 수가 없다. 해변이 줄면 관광객도 줄어드니 하는 수 없다. 매해 모래를 채워야만 한다. 2050년에는 6m가, 2100년에는 12m가 사라질 거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지만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겠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들을 모색 중이다. 내년에는 해변 바닥에 모래로 만든 특수 매트리스를 깔 계획이라고 한다. 사라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시도 중이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듯이 침식되는 모래를 막을 수가 없다. 아름다운 자연에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이가 들며 사람이 늙어가는 것처럼 자연도 지구도 늙어가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유머감각이 조금씩 더 생긴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화가 나거나 걱정되는 일에도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이방인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그 유머의 기술은 나날이 더 늘어가고 있다.

관공서에서 한참을 줄서서 간신히 내 차례가 되었는데,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일처리를 못했지만 웃겼다. 미국 관공서에서는 기본은 서너 번이라고 생각하고 사는데, 역시나 한 번에 안되면 힘이 빠지며 웃음이 나온다. 중고차를 사자마자 창문이 고장 나 팬티 고무줄이 끊어진 것처럼 스르르 내려올 때도 웃음이 나왔다. 영국 코미디 미스터 빈의 차 같았다. 차에 ‘비니’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보디보드를 사 바다에 나갔는데 싸구려 보드라 프린트가 우리의 뱃가죽에 판박이처럼 새겨진 날도 웃었다. 그 브랜드 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도 곧 배에 문신이 생길 거라며 키득거렸다.

며칠 전 침대 위에 무심코 던져둔 남편 안경을 내가 모르고 덥석 깔아뭉개 안경다리가 양쪽 모두 가지런하게도 부러졌다. 내가 조심성 없이 장난치다 생긴 일이다. 한국에서라면 당장 새 안경을 했겠지만 여긴 다르다. 맘에 드는 안경 찾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며 잔소리를 시작하는데 미안했다. 안경 맞추는 게 한국에 비해 여긴 너무 비싸다며 본드로 안경다리를 붙이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불쌍한데 웃겼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와 몰래 웃다 들켰더니 같이 웃어준다. 남편도 슬슬 유머의 기술이 늘고 있는 듯하다. 다행이다.

어쩔 수 없다. 낯선 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품목은 유머다. 우울을 대적할 수 있는 건 유머뿐이다. 불쾌하거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면 웃어야 한다.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모래 속에 모래매트를 깔아야 할 지경이라니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웃음이 나온다. 우리가 해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나 줍는 일이다.

해변에 누워 다리에 달라붙는 이 모래는 대체 어디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를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태국일지도 모르고 중국일지도 모른다. 호주에서 이 모래가 자신들의 모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인터넷 기사도 보았다. 누구의 모래면 어떠하리. 어차피 이곳은 만들어진 세상이다. 해변을 지키는 일이 잘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아름다운 해변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연말이라고 식구들이랑 통화를 하다 보니 내가 이렇게나 가족적인 사람이었는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시부모님과의 오랜 통화도, 우리 엄마나 동생과의 살가운 통화도 서울에선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들이다. 살아왔던 곳에서 떠나 다른 나라에서 지내다 보니 몸은 비록 멀지만 새삼 가족과 더 친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늘 보며 살 때는 만나서 괜한 소리를 하다 마음이 상하기도 했는데, 멀리에 있으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항상 보고 싶어 한다.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요즘이다.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이제 곧 2017년도 끝이다. 있을 때 잘하자 우리. 그리고 웃자. 조금 나쁜 일이 생겨도 웃었다면, 웃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선현경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다른 삶]2017년 끝자락인데, 수영복을 입고 다니는 곳에 있으니 한파로 고생하는 한국의 가족에게 미안하고 보고싶다…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다가 최근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터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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