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량도축 시대’ 동물 고통 앞 인간도 ‘말 못할 통증’ 마주한다

2018.06.07 20:49 입력 2018.06.07 20:59 수정

전염되는 고통

고통은 대량 도축되는 동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그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통의 제거나 축소를 표방하는 사회적 제도하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또 다른 고통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역 관계자들이 2014년 2월 충북 진천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감염된 오리를 살처분하기 위해 몰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통은 대량 도축되는 동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그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통의 제거나 축소를 표방하는 사회적 제도하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또 다른 고통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역 관계자들이 2014년 2월 충북 진천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감염된 오리를 살처분하기 위해 몰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동물보호법에서 동물은 ‘반려동물’ ‘실험동물’ ‘농장동물’ ‘전시동물’ 등으로 분류되며, 기본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한’ 존재로 정의된다. 즉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서의 동물이라는 정의는 동물보호/복지법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를 구성하며, 이는 단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국가들의 동물보호법에도 적용된다. 서구의 맥락에서 이와 같은 존재로서 동물을 정의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실제로 이 시기 영국에선 동물학대 또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잔혹 행위에 대한 반대 움직임들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 예로써 닭싸움 등의 대중적 오락을 금지한 1654년의 동물학대방지법을 들 수 있다. 1824년에 이르면 최초의 근대적 동물보호협회가 런던에서 등장하였으며, 이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의 동물보호 운동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게 된다.

지금의 우리들에게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서의 동물, 또는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의 동물이란 관념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미디어를 통해 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동물도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식의 뉴스를 접하게 되면 ‘당연한 차원의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굳이 연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사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동물관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 데카르트는 동물이 이성과 정신의 작용이 부재한 생물학적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즉 그에게 동물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실험을 위해 동물을 아무렇게나 절단하고 불에 태워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살았던 16~17세기를 지나 18~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에 대해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과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실험을 위해 비둘기를 죽였을 때 그가 느꼈던 복잡한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비둘기를 사랑하기에 비둘기 껍질을 벗기거나 뼈를 추리는 일이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난 그런 악행을 저질렀고, 태어난 지 열흘밖에 안된 천사 같은 녀석을 살해했다.”(할 헤르조그,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중)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동물관을 발견한다. 다윈은 실험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새끼 비둘기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꼈으며, 이는 동물 또한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보았던 그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물론 다윈은 동물실험을 과학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다윈의 사례는 모두가 동물에 대해 데카르트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또는 더 나아가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물과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물복지와 인도주의

현재 한국에서 동물복지란 개념은 아주 생소하지만은 않은 용어가 된 듯하다. 제도적 차원에서 이 개념은 농림축산식품부가 관할하는 식용동물의 사육과 도축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다. 또한 일반 개개인은 이 용어를 소비라는 행위에 윤리적·사회적 고려를 포함시키는 이른바 ‘착한 소비’라는 차원에서 인식한다.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이 동물복지라는 개념은 인권 및 인도주의라는 근대적 관념과 감수성의 등장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개념이다. 동물 또한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은 본질적으로 인도주의적 감수성 안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문화사적 의미에서 인권과 인도주의는 인간의 신체적 ‘고통’을 정의하고, 또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의 제반 변화 속에서 등장했다. 린 헌트는 그의 저서 <인권의 발명>에서 인권이란 개념이 기존의 형벌 제도와 범죄자의 처우에 대한 비판, 특히 고문과 같이 제도적으로 허용된 잔혹 행위들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발전하였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와 고통에 관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헌트에 따르면 이와 같은 변화들은 18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1760년대에 볼테르는 고문의 사용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프랑스의 형벌 제도를 비판하면서 문명화된 국가는 그와 같은 구식 풍습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보다 앞선 1754년에 볼테르의 친구이기도 했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그의 영토에서 모든 형식의 고문을 폐지하였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이후 스웨덴과 보헤미아, 프랑스와 영국으로 퍼져나갔다.

16~17세기 과학자들 실험 위해
동물을 아무렇게나 절단·불태워
18~19세기에 이르러 일부 과학자
동정심·죄책감 표현에 변화 감지

‘착한 소비’ 미명에 축산 대량화
축산 노동자들 신체·정신적 차원
축산 동물들 못지않은 고통 느껴
고된 상황도 개별 노동자가 감수

동물복지, 고통 제거 표방하지만
일부 고통을 감추는 제도에 그쳐
사회적 제도서 또 다른 고통 생산
인간·동물들에 고통 전파 이어져

신체적 고통에 대한 거부를 기반으로 하는 인도주의는 형벌 제도 및 기술에 있어서 여러 가지 혁신을 가능케 하였다. 그 예로써 지금의 우리에게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정부가 이끈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단두대가 그 당시에는 처형당하는 자의 고통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기 위해 고안된 인도주의적 발명품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동시대에 제러미 벤담이 영국에서 고안한 ‘원형 감옥’(판옵티콘)에 대해 길게 분석하면서, 이를 신체형과 고문이라는 고통의 스펙터클에 의존하던 전근대적 권력(주권 권력)과 달리 피감시자가 스스로 ‘감시 권력’에 예속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근대적 권력(규율 권력)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본다. 인도주의와 감옥개혁 운동 속에서 등장한 판옵티콘이라는 감시 장치는 궁극적으로 매우 새로운 형태의 형벌 제도와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물 가면을 쓴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3년 1월 서울 삼청동에서 동물복지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동물 가면을 쓴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3년 1월 서울 삼청동에서 동물복지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전파된다”

신체적 고통의 거부라는 인도주의적 감수성이 근대적 감옥 제도에서 동물복지에 이르는 얼핏 보기에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새로운 사회적 개입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단지 신체적이고 물리적 차원의 고통을 넘어서 ‘고통의 스펙트럼’을 조금 더 확장시켜볼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의료적 문제들을 완전히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사회적 고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인간의 고통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통증’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제도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인류학, 특히 의료인류학은 고통과 질병 등에 관한 의료적 지식들과 실천들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사회문화적, 도덕적 행위들로써 구성되는지 이해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넓은 의미의 고통 개념은 인간 사회에서 축산동물, 반려동물, 전시동물, 실험동물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되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조슬린 포르셰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동물을 고통을 느끼는 주체로서 정의하고, 그 고통의 최소화라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동물복지라는 장치가 정말로 동물의 고통을 제거하고 있는가에 대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문제제기한다. 포르셰는 전통적으로 가축과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거리 두기의 곡예”로서 묘사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The Relationship Between Workers and Animals in the Pork Industry: A Shared Suffering.” J Agric Environ Ethics(2011) 24:3-17). 전통적 농업 환경에서 가축으로서의 동물들과 그 가축을 키우는 농부들 사이에 일종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그와 같은 감정은 가축이 도살되는 시점에서는 거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애정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면 안되는 이 상황은 애착과 무심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것과도 같다.

포르셰에 따르면 이와 같은 관계의 성격은 지금의 대량화된 축산 산업에서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며, 여기서 ‘고통’은 축산 노동자와 축산동물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이 된다. 즉 고통은 단지 대량 생산되어 대량 도축되는 동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그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무엇으로서 이해된다. 축산 현장에서 개별 노동자가 감수하게 되는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차원에서 복잡하게 얽혀 생산/재생산된다. 여기서 고통은 작업 자체의 고된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개별 동물들에 대해 몇 킬로그램의 고기인 동시에 또 (동물복지라는 차원에서) 감정을 가진 존재로 접근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또한 또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즉 도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느끼게 되는 고통은 윤리적 차원의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원의 고통은 항생제를 투여함으로써 동물의 신체적 고통을 감소시키고, 궁극적으로 식품 안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물복지 제도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포르셰에 따르면 동물복지는 어떤 고통은 제거하지만 동시에 어떤 고통은 감추기만 할 뿐인 제도가 된다.

어느 수의사의 죽음

얼마 전 대만의 한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일하던 젊은 수의사가 700마리의 개를 안락사시킨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수의사는 개들을 안락사시키기 전에 산책을 시킨다거나 간식을 주면서 정성을 쏟았지만 끝내 개들을 안락사시킬 때 사용하였던 약을 스스로 먹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포르셰가 말한 축산 노동자들과 축산동물들 사이에 전파되는 고통, 즉 물리적 통증을 넘어선 ‘사회적 행위와 관계’로서의 고통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마도 고통의 제거 내지 축소를 표방하는 사회적 제도하에서 또 다른 고통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많은 국가에서 유기동물보호소라는 시설은 동물복지라는 제도적 차원에서, 특히 안락사라는 특정한 개입은 입양과 같은 장기적 보호의 가능성이 부재한 경우, 또는 질병·부상이 초래하는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회복불가능한 경우 차라리 죽는 것이 그 동물의 행복과 안녕에 이로운 것이라는 동물복지의 윤리적 자장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치와 개입 속에서 또 다른 고통이 만들어지고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사회적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고통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해소가능한 것일까? 또는 누군가의 고통은 이를 목도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감염시키고 함께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 전의령

[전문가의 세계 - 전의령의 동물이야기] (5) ‘대량도축 시대’ 동물 고통 앞 인간도 ‘말 못할 통증’ 마주한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채플힐) 인류학과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주와 다문화에 대해 담론화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통치성, 반다문화와 우익 포퓰리즘, 동물과 생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학적 믿음 하나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 중이며, 전주와 파주를 오가며 세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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