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가 많다고 재판의 결론이 단단해지는 건 아니다…이혼 유책주의, 가장 큰 논거는 ‘감정’이기 때문에

2018.07.15 20:43

이혼, 유책주의와 파탄주의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근거가 많다고 재판의 결론이 단단해지는 건 아니다…이혼 유책주의, 가장 큰 논거는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판사로 재직하던 2007년 간통죄 위헌제청을 했다. 실은 혼인빙자간음죄도 같이 위헌제청을 하려 했는데, 그만두었다. 해당 사건의 피고인이 피해 여성을 상대로 혼인하자고 꾀어 돈을 갈취하는 등 죄질이 너무 나빠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위헌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사람을 위해 위헌제청을 해야 하나, 싶었던 것 같다. 혼인빙자간음죄는 다른 이의 위헌제청으로 간통죄보다 먼저 위헌 결정을 받아 사라졌다.

감정이 개입된 법률 문제가 또 있다. 이혼에 관한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의 대립이다. 유책주의는 잘못이 있는 쪽의 이혼 청구를 받아줘선 안된다는 거고, 파탄주의는 잘못이 누구한테 있든 혼인이 깨졌으면 이혼하게 해주자는 입장이다. 가족이라는 집단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요즘에는 파탄주의 쪽이 친할 수 있다. 반면에 잘못한 쪽이 이혼소장을 내고서 뻔뻔하게 구는 사건을 보면 또 기분이 그렇지 못하다. 안된다는 쪽의 분노는 대단히 강렬하다.

2015년 대법, 유책주의 유지 판결
결론 자체에는 이의가 없지만
판결문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2015년 이 문제에 관해 판결을 내렸다. 유책주의 6인과 파탄주의 6인이 팽팽히 대립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유책주의에 표를 던졌다. 결과는 7 대 6으로 유책주의가 간신히 유지되었다.

유책주의라는 ‘결론’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겠다. 이쪽은 도의나 정의 관념의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이 유책주의 판결문을 읽다 보면 뇌 속 논리지향의 뉴런 몇 다발이 아우성을 치는 통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진다.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논리 측면에서만 판결문을 따라가 본다.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이혼법제에는 재판상 이혼만을 인정할 뿐, 우리처럼 협의이혼 제도가 없다. 우리는 협의이혼 제도가 있으니 상대방을 설득해서 이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래서 재판상 이혼에서까지 파탄주의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은 기본적으로 파탄주의다. 재판상 이혼만을 인정한다지만 그건 법원을 통해서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을 법원에서 확인하는 정도여서 협의이혼이나 다를 바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상대방 설득이 안되니까 재판까지 간 것 아닌가? 그런데 설득하면 된다니, 이런 해결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유책 배우자 이혼 청구 허용은
입법적 조치 마련되지 않아
상대방 일방적 희생 위험 커…”
→ 위자료를 증액하면 될 일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을 보호할 입법적인 조치가 마련되어 있지 아니하여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게 되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희생될 위험이 크다.” -상대방을 보호하는 ‘입법적인 조치’란 게 어떤 건지 판결문에는 설명이 없다. 혹시 유책주의를 유지해 상대방을 보호하겠다는 이 판결 자체를 염두에 둔 건 아닐까? 그걸 입법의 임시 대체물로 삼겠다는 복안?

혼인서약을 위반했으니 당연히 배상을 해야 한다. 위자료도 높게 책정해야 하고, 재산분할도 부양의 측면을 고려해서 정하고. 상대방 보호를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조치는 이것밖에 없고, 이것이 핵심이다. 이거라면 당장 판결로 할 수 있다. 입법까지 갈 필요 없다. 유책 배우자의 이혼소송에서 위자료를 대폭 증액하든가 재산분할의 기준을 달리 정하면 된다. 바로 사법부의 일이다. 당장 할 수 있는 판결을 피하면서 입법이 없으니 임시로 유책주의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유책주의는 축출이혼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간통죄를 폐지한 대신 중혼 처벌규정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 대책 없이 파탄주의를 도입한다면 중혼을 결과적으로 인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 -축출이혼이란 용어는 전근대적, 종족적 표현으로 들린다.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느낌도 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위자료와 재산분할에서 탄탄한 보장을 해주면 그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 유책주의 판례가 형성되던 1960년대에는 재산분할도, 면접교섭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생겼고, 양육권과 친권 등도 동등하게 보장된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제도를 실질화해야 한다. 유책주의가 직접 막는 건 ‘이혼’이지 ‘축출’이 아니다. 축출을 막는 건, 위자료와 재산분할 같은 현실적인 보장책들이다. 이혼 자체를 금하면 결과적으로 ‘축출’도 막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앞뒤가 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외국의 중혼 처벌은 간통죄의 대체물이 아니다. 대체할 거면 그냥 간통죄를 유지했겠지. 글자 그대로 중혼 지경까지 간 경우에는 처벌하겠다는 것뿐이다(중혼은 이중결혼이라는 뜻이다. 단순한 바람과는 다르다). 서구의 가톨릭 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혼인 파탄의 원인은 성격 차이, 괴벽, 폭행, 도박, 낭비, 외도 등 실로 다양하다. 중혼은 그중 한 예일 뿐이며, 비율로는 극히 작을 것이다. ‘중혼이 처벌 안되는 판에 파탄주의마저 도입하면 어찌되겠는가’라는 주장인데, 이 특수한 위험을 막기 위해 이 거대한 제도를 운영할 수는 없다. 파리를 잡기 위해 F22를 띄울 것인가? 그런 식이라면 반대로 ‘함정을 파 상대의 잘못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유책주의를 통째로 버려야 한다’는 말도 가능해진다.

“양성평등의 전적인 실현 미흡
생계유지가 곤란한 경우 생겨”
→ 유책 배우자, 남편뿐일까?

“우리나라에서 아직 양성평등의 전적인 실현은 미흡해 보인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국민의 인식이 변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혼인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로 인해서 정신적 고통을 받거나 생계유지가 곤란한 경우가 있다.” -유책주의가 여성을 보호한다고 하려면 유책 배우자는 늘 남성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성립하지 않는다. 이혼을 청구하는 쪽이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다. 일반론으로 될 수가 없는데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논거로 삼는 건 곤란하다.

이혼율이 급증하면 ‘혼인 보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 판결문에서 보인다. 여기서 의문이 또 든다. 혼인 보호는 결국 이혼을 줄이자는 얘기일 텐데, 이혼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상대가 싫고 괴로워도 꾹 참고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혹시 ‘남이 보기에’ 좋을 뿐인 건 아닐까? 누군가와 평생을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다는 건데, 그 누군가를 위해서 내 인생은 희생되어야 할까? 이혼을 문제시하는 이런 잠재 인식이 이혼자와 그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혼인의 보호’라는 표현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국가가 가정의 후견인 역할을 하겠다는 국친주의적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 정도 갖고 일일이 비판의 날을 세울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유책주의가 혼인을 보호한다’는 논리는 수긍하기 어렵다. 파탄주의가 거론되는 정도의 혼인은 글자 그대로 파탄, 사실상 깨졌다. 싫은 상대와 어거지로 같이 살게끔 해놓고 혼인이 보호됐다며 박수치는 법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혼인을 보호하는 건, 혹은 나아가 보호할지 말지는 근본적으로 그 사회의 문화다. 유책주의가 보호하는 건 혼인의 껍데기일 뿐 혼인 그 자체는 아니지 않나?

‘이혼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변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역설적으로 혼인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증거다? 국민이 이혼을 관대하게 보아주고 있는데, 또 다른 누가 보호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한다는 걸까? 혹시 이혼에 대한 관대한 인식을 다수의견 대법관들이 마땅찮게 여기고, 이런 인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결혼제도를 더 수호해야겠다고 느낀다는 이야기일까? 국민의 인식을 함부로 심사하는 듯한 이런 서술은 편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만약 이왕이면 결혼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법원이 이혼 제도의 운영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법원은 만능이 아니며, 온갖 일에 다 간섭할 만큼 전지하지도 않다. 그저 사후적 심사기관에 불과하다. 결혼 제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건(굳이 이끌어야 한다면) 사회, 문화, 의식 차원의 일이며, 그들이 담당해야 한다. 예를 들면, 가정의 기초경제, 성평등 의식, 교육제도 같은 것들. 이미 곪아버린 가정을 법으로 지탱한다고 해서 혼인 제도가 보호되는 것일까?

상대방의 생계문제를 언급했는데, 거듭 말하지만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먼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이혼 후에 양육비를 안 주면 과태료라도 매길 수 있지만, 혼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돈을 안 주면 오히려 방법이 없다.

이런 논거는 안 드는 편이 나아
유책 배우자로 인한 ‘정신적 고통’
마땅히 위로받아야 하지만
부부관계 회복불능 이르렀는데
‘혼인 유지’로 제재하는 건 ‘갸웃’

결론적으로, 이런 논거들은 들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근거의 개수가 많다고 결론이 단단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이론상 이런 주장은 가능할 것 같다. ‘혼인은 계약이다. 결혼의 약속을 깬 사람이 혼인 계약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계약법의 기본 원리에 반한다. 그러니 잘못한 쪽이 이혼 청구하는 것은 안된다.’

사실 유책주의에는 강력한 부동의 논거가 따로 있다. 감정이다. 판결문에서도 언급한 ‘정신적 고통’ 바로 이 부분이다. 법률에 무슨 감정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법은 감정의 제국이다. 모든 형벌과 법제도의 근간이 감정이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여도, 물건을 훔쳐도 피해자는 물론 공동체의 어느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처음부터 범죄가 될 수 없다. 손해를 입은 사람이 개의치 않는다면 배상도 필요 없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갖는 응보감정, 배신감, 분노. 그런 것들을 토대로 법제도는 쌓아올려져 있다. 유책 배우자에게 갖는 이 감정은 강하고 선명하다. 파탄주의의 온갖 논리를 다 합쳐도 덤비지 못할 만큼이다.

이 울분은 확실히 위로받아야 한다. 다만, 꼭 결혼을 깨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해야 할지는 다른 문제다. 결혼을 제재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보다는 고액의 위자료와 재산분할, 이게 우선이고, 직접적이다. 그 후의 유책주의 논의는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대법원의 유책주의 유지 선언과 무관하게 하급심에서는 이미 변화의 바람, ‘wind of change’가 불고 있다. 위자료와 재산분할 기준은 높아가고, 이혼 기준은 파탄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 대법원 다수의견도 결국 파탄주의가 ‘논리적으로 불가’한 게 아니라 ‘준비될 때까지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책주의를 보고 있노라면 현재 우리의 사형 제도가 문득 떠오른다. 아무도 나서서 폐지를 공언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폐지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 어쩌면 대법원 판결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실상은 파탄주의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도 유책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선언을 감히 하지는 못하고, 그저 사실상 파탄주의 운영을 슬쩍 눈감겠다는 ‘츤데레’ 아닐까. 파탄주의는 과거 호주제, 간통죄, 혼인빙자간음, 양심적 병역거부 등이 그랬듯이 딱 한 가지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시간’이다.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근거가 많다고 재판의 결론이 단단해지는 건 아니다…이혼 유책주의, 가장 큰 논거는 ‘감정’이기 때문에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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